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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구로사와 아키라 특별전

[리뷰]구로사와 아키라, '아직'끝나지 않은 그의 영화 <천국과 지옥>

[리뷰]

구로사와 아키라, '아직'끝나지 않은 그의 영화

 

구로사와 아키라의 방대한 영화세계를 압축하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한 편의 영화에서 그의 영화세계를 조망해 보는 일은 가능할 것이다. <천국과 지옥>은 오락 사극을 만들던 구로사와가 현대극을 구상하던 중에 우연히 읽은 소설에 촉발되어 만들어진 영화다. 이 영화는 영화 전체를 장악하는 구로사와의 연출력이 극도로 드러나는 작품이자, 서구적이라고 비판받는 지점 역시 극명하게 존재하며 그의 명암이 뚜렷하게 부각된 작품이다.

 

 

윤리적인 고민

 

<천국과 지옥>은 아이의 유괴로 이야기의 비등점이 폭발하는 이야기다. ‘나쇼날 슈즈’의 곤도 사장(미후네 도시로)은 자신의 아들이 납치당했다는 전화를 받는다. 곤도는 전 재산을 유괴범에게 갖다 바쳐서라도 아들을 구하려고 한다. 그런데 묘한 상황이 발생한다. 알고 보니 유괴범의 착오로 곤도를 보좌하는 운전기사의 아들 납치던 것. 그렇다고 곤도가 마냥 기뻐할 수는 없는 입장이다. 자신의 아들은 무사하지만 유괴범에게 돈을 주지 않을 경우, 운전기사의 아들이 위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곤도가 처한 이와 같은 '딜레마'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제의식이라 할 만하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백치>(1951, 도스토예프스키의 동명소설이 원안), <거미집의 성>(1957,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각색)과 같은 '문학 각색물', <들개>(1949), <추문>(1950)과 같은 '현대극', <7인의 사무라이>(1954), <요짐보>(1961)와 같은 '사무라이극'으로 거칠게 분류가 가능함에도 극  중 인물들은 늘 두 개의 선택지 사이에서 윤리적 고민에 빠진다. 예컨대, <숨은 요새의 세 악인>(1958)의 마카베(미후네 도시로)는 가문의 후계자 공주를 적국에서 탈출시켜야 한다. 하지만 마땅한 조력자가 없어 일확천금에 눈이 먼 농부 출신의 무사를 황금으로 회유한다. 그런가 하면 <붉은 수염>(1965)의 젊은 의사 야쓰모토(가야마 유조)는 독일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온 까닭에 왕립의료원에서 일하고 싶지만 서민들을 상대로 한 공동진료소에 배정받자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와 같은 인물들의 윤리적 딜레마를 통해 감독이 획득하려는 감정은 '인간', 즉 휴머니티다.

 

그래서 구로사와 아키라는 매 영화에서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인간의 삶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조용한 결투>(1949), <붉은 수염>처럼 환자가 선인이건, 악인이건 사심 없이 촌각을 다투어 생명을 구해야 하는 의사가 종종 전면에 등장하기도, <이키루>(1952)처럼 죽음을 선고받은 주인공이 삶을 의미 있게 마무리하기 위해 시민공원을 만들기도, <쓰바키 산주로>(1962)의 미숙한 젊은 무사들을 돕는 백전노장의 떠돌이 무사처럼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부각되기도 한다. 이처럼 윤리적 고민이 사건의 시발점이 되어 종국에는 인간성을 획득하려다 보니 구로사와 아키라는 경찰도 인간적(?)으로 그리길 주저하지 않는다. 이는 감독이 평소에 즐겨 읽던 에드 맥베인의 '87분서 시리즈' 중 『왕의 몸값 King's Ransom』을 원작 삼아 <천국과 지옥>을 만든 주요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도쿠라 경부(나카다이 다쓰야)로 대표되는 <천국과 지옥>의 경찰은 몸값의 전부를 찾지 못한 것에 미안해하고 그로 인해 회사에서 직위 해제를 당한 곤도를 위해 꼭 납치범을 검거하자며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연출의 장악력

 

<천국과 지옥 High and Low>은 그 제목에서처럼 전반부와 후반부가 확연히 구별되는 연출의 특징을 보인다. 전반부는 언덕 꼭대기의 호화 빌라에 사는 곤도의 이야기를 실내에서만 진행하는 무대극으로, 후반부의 언덕 아래 빈민촌에 거주하는 유괴범을 경찰들이 쫓는 추격전은 야외극으로 구성한다. 기차에서 곤도와 유괴범이 돈과 아이를 교환하는 장면이 전반부와 후반부를 가르는 선()처럼 삽입되면 정적이었던 카메라가 이후 동적인 움직임으로 변화하는 식인 것이다. <라쇼몽>(1950)과 더불어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 중에서 가장 뛰어난 형식미를 보여주는 <천국과 지옥>은 동시에 감독의 연출 장악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확인시켜 주는 적절한 예에 속한다. 구로사와 아키라(1910.3.23~1998.9.6)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사이트 앤 사운드가 준비한 2010년 7월호 커버스토리의 관련 기사 중 한 편의 제목은 “마지막 황제, 구로사와 Kurosawa the Last Emperor”였다. 아닌 게 아니라 구로사와 아키라는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현장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것으로 유명하다.

 

<거미집의 성>에서 극 중 주인공 무사의 최후를 사실적으로 찍겠다며 명사수를 기용, 미후네 도시로를 겨냥해 실제 화살을 쏜 일화는 전설처럼 전해진다(박스 참조). <란>(1985)의 현장을 담은 다큐멘터리 <A. K.: 구로사와 아키라의 초상>(1985)을 보면 '황제' 구로사와 아키라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사례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그중 개인적으로 경악했던 건 히데토라를 연기한 나카다이 다쓰야의 분장을 확인한 후 전장의 무사 같지 않다며 진노한 감독이 배우의 얼굴을 향해 신경질적으로 모래를 뿌리는 장면이었다. 실제로 현장에서 그가 가장 많이 쓴 말은 “아니, 아직 아니야! No, Not yet!”였다고 한다. 어느 인터뷰에서 "나는 8개월 이상의 시간을 들여 촬영한다"고 밝혔던 그는 영화 한 편을 찍기 위해 무려 1년 가까운 시간을 현장에서 보냈다. 게다가 매일 촬영을 하는 게 아니어서 3대의 카메라를 동시에 투입해 장면을 찍고는 했는데 그만큼 철저한 준비는 필수였다. <도데스카덴>(1970)의 상업적 실패 이후 자국의 영화사들로부터 투자를 받지 못해 해외 자금을 끌어들여 어렵게 찍었던 <가게무샤>(1980)도 촬영 기간만 무려 1년이 걸렸을 정도다.

 

구로사와 아키라가 보유한 특유의 장악력 때문일까. <가게무샤>처럼 스케일이 큰 영화도 한편으로는 잘 짜인 무대극의 느낌을 선사하는가 하면 반대로 <붉은 수염>처럼 실내 장면이 주가 되는 영화도 규모가 크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천국과 지옥> 역시 실내에서만 진행되는 전반부를 지나 야외로 나가는 후반부에도 무대를 벗어나지 않은 것 같은 정교한 형식미가 관객을 압도한다. 소재만큼이나 형식이 중요했던 그에게 처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겼던 영화가 3명의 서로 다른 관점을 3개의 에피소드로 담아낸 <라쇼몽>이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일본적이면서 보편적인

 

구로사와 아키라가 세계영화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지만 자국의 후배 감독 중에서 그의 영향력을 언급하는 이들은 생각 외로 적다. 오히려 할리우드의 감독들이 그를 영화적 스승으로 삼았는데 <가게무샤>는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와 조지 루카스의 도움으로 제작비를 확보할 수 있었고, <꿈>(1989)의 경우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자로, 마틴 스콜세지가 배우로 참여하기도 했다. 할리우드에서 진행하는 리메이크도 여러 편이어서 <이키루>와 <7인의 사무라이>, <천국과 지옥>도 이 목록에 포함이 된 상태다.

 

특히 <천국과 지옥>은 원작이 미국 소설이어서인지 <이키루>, <7인의 사무라이>와 달리 제작 마틴 스콜세지, 감독 마이크 니콜스(<졸업>(1967)), 프로듀서 스콧 루딘(<머니볼>(2011)), 각본 데이빗 마멧(<한니발>(2001)) 등 화려한 진용을 갖추고 빠르게 작업을 전개하고 있다(하지만 예정했던 2010년 개봉을 훌쩍 넘기고 현재는 여전히 ‘개발 중 in develop’인 것으로 알려진다). 이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에 대한 비판의 맥락과 맞닿아 있을지도 모른다.

 

일본에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를 ‘너무 서구적 too Western’이라며 비판하는 이가 적지 않다. 미국의 추리물, 그중에서 에드 멕베인의 작품을 좋아해 구로사와 아키라는 <천국과 지옥>을 만들었으며 <백치>, <거미집의 성>, <란>(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이 원작) 등 서구의 위대한 고전소설을 영화화하기를 즐겼다. 게다가 <7인의 사무라이>, <요짐보>와 같은 사무라이극을 보면 존 포드, 프레드 진네만 등 미국 서부극의 영향력이 강하게 느껴진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이런 비판에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는 한편 스토리텔러로서 그가 영향을 받는 것에 대해 이런 얘기를 했다. “우선적으로 내가 사는 일본사회를 염두에 둔다. 그리고 우리의 문제를 찾아 솔직하게 이야기에 반영한다.” 그럼에도 그의 영화가 서구적이라는 혐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건 일본사회가 그만큼 서구화되어 갔다는 방증일 것이다. 예컨대, <천국과 지옥>의 경우처럼 미국의 소설을 일본사회로 무리 없이 옮길 수 있었던 건 그 당시 일본 역시 빈익빈 부익부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까닭과 무관하지 않다. 세간의 평가에 상관없이 구로사와 아키라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시대극과 현대극을 초월하며 보편적이라고 할 만한 감성과 세계를 구축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서구 소설을 자주 스크린에 옮겼다지만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덤불 속』(<라쇼몽>), 야마모토 슈고로의 『붉은 수염』과 『계절 없는 거리』(<도데스카덴>) 등 자국의 소설을 다수 영화로 만들었다. 또한 미국 서부극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지만 역으로 <7인의 사무라이>는 <황야의 7인>(존 스터지스, 1960)으로, <요짐보>는 <황야의 무법자>(세르지오 레오네, 1964)로 리메이크되기도 하였다.

 

그의 마지막 연출작은 <마다다요>(1993)이다. <마다다요>는 어느 노()교수에 대한 이야기로, 그의 생일날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때 제자들은 ‘마다카이’라는 노래를 불러주는데 “(생을 마감할 마음의) 준비가 되셨나요?”라는 의미를 담은 곡이다. 이에 노교수는 “마다다요 まあだだよ”, 즉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대답한다. 마찬가지로 구로사와 아키라는 <마다다요>를 마치고 1998년 뇌졸중으로 세상을 뜨기까지 차기작에 대한 구상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염두에 두고 있던 작품의 소재는 ‘반 고흐’였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반 고흐의 일생을 다룬 영화야말로 필생의 프로젝트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고는 했다. 그는 어떤 불행과  고난에도 끝까지 붓을 놓지 않았던 반 고흐의 예술혼을 항상 마음속에 부적처럼 간직하고 있었다. 반 고흐의 영화화에 앞서 <마다다요>를 선택했던 건 아직 할 일이 남아있던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적인 의지의 표현이었을지 모른다. 영화 현장에서 배우와 스태프를 향해 “아니, 아직 아니야!”라고 외쳤던 것처럼 구로사와 아키라는 자신의 운명에게마저도 그렇게 외쳤던 것이다.


허남웅│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