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14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Review

[리뷰] 황폐한 세계와 그곳의 인간들 모두의 존엄을 위한 춤



“이 영화를 좋아하기도 하고, 극장에서 보고 싶어서 추천을 했다. 나도 극장에서는 본 적이 없는데 이번 기회에 같이 보면 참 좋지 않을까. 영화사에 좋은 영화가 많지만 최고의 작품 열 편을 꼽으라면 이 작품을 넣을 것 같다. 벨라 타르는 하나의 영화에 대해 한 명의 예술가가 어디까지 장악할 수 있는지 그 극대치를 보여주는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 <사탄탱고> 영화평론가 이동진의 추천사



[리뷰] 황폐한 세계와 그곳의 인간들 모두의 존엄을 위한 춤




안개가 자욱이 낀 황량한 평원을 담아내는 흑백의 이미지. 비바람을 맞으며 진흙탕이 되어버린 대지를 터벅터벅 걸어가는 인물. 그의 발걸음을 따라가는 느릿느릿한 카메라 움직임과 롱테이크. 거기에 덧입혀지는 생생한 자연의 소리들.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인간의 비참과 우울의 정서를 한껏 머금은 벨라 타르적인 세계가 탄생한다. 그의 경력의 후반부, <파멸>(1987)로부터 시작하여 <토리노의 말>(2011)까지 하나의 순환적 원을 그리는 타르적 우주의 중심에는 <사탄탱고>(1994)가 자리한다.


타르의 영화들, 특히 <사탄탱고>는 극장에 가서 필름으로 상영되는 영화를 보는 것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미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최후의 보루 중 하나로 남아있다. 그것은 그의 영화가 필름이라는 매체의 물성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름 표면의 질감과 그레인은 물론이고 필름의 노화와 스크래치조차도 이미지의 중요한 요소이며, 이러한 필름의 물성은 영화 속 세계의 물리적 감각을 담아내고 리얼리티를 보증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타르의 영화에 담긴 모든 자연적인 요소들이 사실은 정교한 연출의 산물이라는 점은 흥미롭다. 가령 <사탄탱고>의 공간은 하나의 마을이 아니라 헝가리의 시골 곳곳에서 촬영된 것을 모아 구성되었다. 휘몰아치는 비바람은 모두 기계를 통해 연출된 효과이며, 영화에 담긴 사운드는 모두 후시녹음된 것이다. 타르에게 물리적 현실이란 발견하고 기록하는 게 아니라 예술가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다. 또한 필름에 담기는 물리적 현실의 핵심은 시간 그 자체이다. 우리는 그 어떤 영화보다 느린 타르의 영화를 통해 시간의 무게와 시간 그 자체의 물성을 감각하게 된다.



<사탄탱고>가 7시간 10분이라는 엄청난 러닝타임을 갖게 된 이유는 시간을 체험하게 하는 엄격한 영화적 스타일을 지키면서도 동시에 상당히 치밀하며 실험적인 내러티브를 구축하기 때문이다. 이는 이 영화가 갖는 엄청난 흡인력의 비밀이기도 하다. 황폐한 시골 마을의 공동농장에 그동안 다 같이 땀 흘려 일한 대가가 들어온다. 일부에서는 이 돈을 몰래 빼돌리려는 음모가 꾸며지는 가운데, 그동안 죽은 것으로 알려졌던 이리미아스가 돌아온다는 소식이 들린다. 마치 메시아처럼 마을에 도착한 이리미아스는 사람들을 장악하고 그들을 새로운 여정으로 이끈다. 탱고는 서로를 믿음으로써 가능한 춤인데, 이 영화의 탱고는 믿음이 아니라 협잡과 배신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는 곧 공동체의 실패를 뜻한다. 탱고의 12스텝에 상응하여 12개의 파트로 구성된 이 영화의 전반부는 마을 사람들의 동요를 윌리엄 포크너적인 다중시점으로 담아낸다. 이 다중시점의 효과 중 중요한 측면은 하나의 사건에 반응하고 하나의 시간을 살아가는 다양한 인물들의 그들 각자의 삶을 모두 긴밀히 다루는 것이다. 심지어 전반부에 가장 긴 시간이 할애되어 있는 부분이 이 영화의 주된 서사에서조차 소외되어 있는 인물들을 다룬 부분, 즉 마을 사람들을 감시하며 끊임없이 술을 마셔대는 알코올중독자 의사(파트3)와 고양이의 죽음에 충격을 받는 백치 소녀(파트5)를 다루는 부분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의사는 술을 구하기 위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소녀는 죽은 고양이를 한 손에 들고 영혼이 나간 것처럼 정처 없이 걷는다. 지속되는 시간의 무게는 곧 파멸 혹은 죽음으로 향하는 발걸음의 무게이다.


타르의 우주에는 유물론과 형이상학이 공존한다. 물리적 현실을 포착하면서 동시에 그곳에서 형이상학적 부재를 환기하는 것. 부서진 종탑에서 종소리가 들려오는 것처럼, 혹은 이리미아스가 안개 낀 숲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무릎을 꿇는 것처럼, 무언가 초월적인 것이 존재하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며, 세계의 붕괴와 인간성의 파멸을 늦추거나 붙잡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대신 타르의 카메라는 비참한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들을 밑바닥까지 들여다보면서, 궁극적으로 그들이 파멸의 상황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하는지를 오랜 시간을 두고 지켜봐 준다. 타르는 영화가 유토피아적 희망과 위로를 안겨주는 것이 거짓과 위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영화는 현실의 비참을 직시해야만 하는데, 그것이 허무주의나 염세주의로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긍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니체적인 의미의 ‘디오니소스적 긍정’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타르의 영화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탄탱고’는 황폐한 세계와 그곳에서 살아가는 인간들 모두의 존엄을 위한 춤이다.



박영석 / 중앙대학교 영화과 박사과정



사탄탱고 Sátántangó / Satantango

1994450min헝가리, 독일, 스위스B&W35mm│15세 관람가

연출벨라 타르 Bela Tarr

출연│미할릭 빅, 푸티 호바스, 라슬로 루고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