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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우리 시대의 프랑스 영화 특별전

[리뷰] 필립 가렐의 <평범한 연인들>

거역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

 

 

프랑스영화는 그들이 ‘68의 적자라고 말해왔다. 올해 베니스영화제에도 ’68에 관한 또 한 편의 프랑스영화가 등장했다. 올리비에 아싸야스의 <5월 이후>가 그것이다. 영화평론가 닉 제임스는 이 영화가 혁명의 ‘행동주의와 쾌락주의’를 대비하는 방식에서 필립 가렐의 <평범한 연인들>과 비교했다. ‘68을 해석하고 기억하려는 프랑스영화의 노력은 전쟁에 가깝다. 하지만 2005년에 <평범한 연인들>을 발표할 당시의 가렐은 다르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1968년을 역사의 지도로부터 지우려는 경향이 프랑스에서도 엄연하다고 보았다. 그는 영화란 소중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68년에 대한 날것의 기록을 <평범한 연인들>에 남겼다. 그런 점에서, 여주인공 릴리가 옆의 남자에게 “<혁명전야>(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1964)를 봤냐?”고 묻는 장면에 대한 내 생각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바뀌었다. 릴리는 스크린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라는 이름을 말한다. 이전에는 가렐이 <몽상가들>에서 느낀 배신감을 그렇게 표현한다고 여겼다. 지금은 다르다. 가렐은 기억하는 것, 그리고 어떤 태도를 지니는 것으로 충분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가렐은 베르톨루치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아 <평범한 연인들>을 제작했다. <몽상가들>의 엑스트라와 의상을 공유한 것이 한 예다.

 

<평범한 연인들>은 68의 영웅적 행적과 그 여파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한 시간에 걸쳐 화염병과 바리케이드의 밤이 카메라의 덤덤한 시선에 잡힌다. 밤을 새운 젊은이가 어머니에게 돌아와 “우리는 끝났어. 노동자 계급이 포기하려 해. 노조는 부르주아보다 혁명을 더 두려워하거든. 그들은 돈을 더 받기만을 원해. 그것으로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해”라고 말한다. 그러나 혁명에 헌신하는 젊은이는 이내 스크린 바깥으로 사라진다. 진짜 영화는 화염병의 밤이 지난 후에 시작하며, 이어지는 두 시간 동안 영화는 화염병과 총성에서 가능한 한 멀리 벗어난다. 일군의 젊은이들이 그룹 ‘더 킹크스’의 <디스 타임 투마로우>에 맞춰 춤을 춘다. 레이스와 벨벳 복장의 댄디한 모습을 한 그들은 기실 혁명의 패잔병들이다. ‘진짜 예술가는 익명의 존재로 남는다’는 것이 그들의 신념이다. 그래서 그들은 외로운 존재들이다. 영화는 남은 2시간 동안, 도피자의 신세로 하나씩 모여든 청년들이 어떻게 해서 환멸의 시간으로 빠지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누구는 사랑하고 누구는 그림을 그리고 누구는 직업을 구하고 누구는 결혼하고 누구는 미치고 누구는 떠난다. 그들은 대마초와 쾌락과 사랑과 일상을 탐닉한다. 마침내 그들조차 하나씩 흩어진 뒤 홀로 남은 주인공의 예고된 죽음 앞에 나지막한 내레이션이 흘러나온다.

 

김수영은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절망한 자의 상처만큼 복수를 되새김질하기에 좋은 무기도 없다. <평범한 연인들>은 혁명의 실패와 함께 사라진 동지에게 바치는 쓸쓸한 조사이자 현실의 젊은이를 위해 준비한, 멈추지 않는 혁명의 목소리다. 인터뷰에서 가렐은 ‘66년에 만났던 영화적 동지 장 으스타슈를 기억하며 <평범한 연인들>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전작 <야성적 순수>를 으스타슈에게 바쳤던 가렐은, 으스타슈의 <엄마와 창녀>를 따라 1.33:1 화면비율의 흑백영상으로 <평범한 연인들>을 연출했다. 1973년에 <엄마와 창녀>라는 시와 여자편을 얻었던 68혁명은 다시 30년 뒤에 소설과 남자편인 <평범한 연인들>을 구했으니, 결코 비범하지 않은 ‘평범한 연인’은 그렇게 짝을 찾게 된다. 1980년 서울의 봄과 1987년 6월 항쟁 사이에 20대를 보내면서, 나는 친구들이 하나씩 평범한 가족과 일상의 굴레 속으로 사라져가는 것을 보았다. <평범한 연인들>에서 릴리가 프랑수아에게 묻던 질문 - “우리는 지금 뭘 하려는 거지? 그리고 우리는 어디로 가게 될까?” - 을, 나는 더 이상 내게 묻지 않는다. 나는 궁금하다. 인간이 꿈을 잃고 지쳐 쓰려져 굴복하게 만드는 것은 시간의 권력일까 아니면 현실의 폭력일까. 사랑이 그러하듯 시간도 우리를 구원하고 감싼 끝에 저버린다.

 

글 / 이용철(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