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특별전/2016 스페인 영화제

[리뷰] 죽은 자를 떠나보내는 시간 -욘 가라뇨와 호세 마리 고에나가의 <플라워>

[리뷰] 죽은 자를 떠나보내는 시간

-욘 가라뇨와 호세 마리 고에나가의 <플라워>

 




욘 가라뇨와 호세 마리 고에나가의 <플라워>(2015)의 초반부는 아네를 위한 꽃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아직 비교적 젊은 나이에 의사에게서 폐경 진단을 받은 아네에게 어느 날부터 꽃배달이 온다. 남편이 보냈을 거라 생각했던 꽃은 익명의 누군가에게서 온 것이었고, 아네는 매주 같은 시간 도착하는 정체모를 꽃다발에 내심 즐거워한다. 영화는 꽃을 보낸 사람이 누군지 알려주지 않은 채 잠시 다른 부부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간다. 아네와 같은 직장에 다니던 베나트와 그의 아내 로우르데스의 이야기다. 로우르데스는 베나트의 어머니와 갈등을 겪고 있다. 그러던 중 베나트가 교통사고로 죽어버리고 만다. 로우르데스는 시어머니와 연락을 끊고 다른 남자와 살기 시작한다. 베나트가 죽은 후 또 한 가지의 변화가 생기는데, 더 이상 아네에게 꽃배달이 오지 않는다.


이후의 시간동안 영화는 베나트의 죽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을 보여준다. 죽음은 아주 짧은 순간 벌어지고, 영화는 죽은 후에 남은 이들의 이야기를 죽은 자를 완벽하게 떠나보내는 여정으로 보여준다. 자신에게 꽃을 보낸 사람이 베나트였을 거라고 추측하게 된 아네는 매주 그가 죽은 장소에 꽃을 가져다 놓고, 누군가 매주 꽃다발을 가져다 놓는단 사실을 알게 된 로우르데스는 누가 어떤 이유로 이런 일을 하는지 알고 싶어 한다. 새 남편의 불만스러운 말에 로우르데스는 약간 격앙된 톤으로 난 이걸 끝내야해라고 얘기한다. 영화의 중후 반부를 끌고 가는 핵심적인 대사라고 생각한다. 죽음 후에도 끝내야 할 것이 남아있는 것이다. 로우르데스가 완결지어야 하는 것은 베나트를 상실한 슬픔도 아니고, 시어머니와의 풀지 못한 관계도 아닌 것 같다. 익명의 누군가가 전해주는 꽃다발의 정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자신이 알지 못했던 베나트의 한 부분이다.




실제로 베나트가 아네에게 꽃을 보냈는지가 영화에서 명시되진 않는다. 몇 가지 단서로 추론만 가능할 뿐이며 이미 죽어버렸기 때문에 따져 물을 수도 없다. 아네와 시어머니는 점점 친밀해져 베나트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죽은 이를 슬퍼하는 자리에 로우르데스는 끼어들 틈이 없다. 그러나 이는 몇 년 후 역전된다. 베나트의 어머니는 치매로 아들을 기억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고, 아네는 역시 회의감에 빠져 더 이상 꽃을 가져다 놓지 않는다. 베나트의 죽음 후 그에게 집착했던 두 사람은 고작 몇 년 사이에 이미 돌아섰다. 로우르데스가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보며 우는 모습은 영화에서 가장 마음 아픈 장면이다. 그렇게 집착했던 것조차 기억해낼 수 없는 상태가 돼버린 모습. 동시에 그렇다면 과연 로우르데스는 베나트를 영원히 기억할 것인지 확신할 수 없다. <플라워>는 서서히 잊혀져가는 시간에 대해 차분한 톤으로 이야기한다.




<플라워>는 남은 이들의 겪는 혼란의 시간과 죽은 자의 육체가 완전히 소멸되는 과정을 평행하게 진행시킨다. 베나트는 그가 생전에 바랐던 대로 죽은 몸을 의과대학에 기증하고, 시신이 방부 처리되어 의과 생들의 실습용으로 쓰이게 되면서 그의 (신체의) 죽음은 유예된다. 몇 년 후 마침내 시신의 사용가치가 모두 끝났을 때 그는 화장되어 로우르데스에게 다시 돌아오고, 그때서야 로우르데스는 언뜻 편안한 표정을 지으며 영화가 끝난다. 죽음이라는 시간을 유예시키는 것은 이 영화에서 중요하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플라워역시 유사하게 기능한다. 영화는 꽃다발을 만드느라 꺾여버린 꽃들만을 보여준다. 얼마 시간이 지난 후엔 시들어 죽어버리고 말 꽃들이다. 베나트는 아네와에게 꽃다발을 좀 더 살려둘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알려준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이 모습은 일견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기억해주었으면 하는, 곧 사라질 이의 바람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황선경 | 관객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