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특별전/서울아트시네마 개관 10주년 기념 존 카사베츠 회고전

[리뷰] 존 카사베츠의 <기다리는 아이>

카사베츠의 또 다른 그림자

- 존 카사베츠의 <기다리는 아이>

 

 

 

 

<기다리는 아이>는 카사베츠의 영화 중 가장 이례적인 영화다. <그림자들>로 첫 연출데뷔작을 내놓은 카사베츠가 할리우드에서 두 편의 영화를 연이어 만들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투 레이트 블루스>와 <기다리는 아이>다. 『존 카사베테스의 영화들』의 저자 레이 카니는 이 두 작품과 <글로리아>(<글로리아> 역시 할리우드에서 작업했다)를 두고 “작품성이 떨어지”며 “카사베츠의 영화 중 가장 흥미 없는 작품”이라 혹평한다. 그나마 <투 레이트 블루스>는 존 카사베츠가 관심을 가지고 있던 뉴욕 재즈씬을 배경으로 직접 각본을 썼던 영화지만, <기다리는 아이>는 그저 ‘할리우드의 간섭을 받은’ 정도가 아니라 예술적 비전을 실현할 기회를 거의 봉쇄당한 영화였다.

 

 

<기다리는 아이>는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버트 랭카스터와 주디 갤런드가 주연을 맡았으며, 40년대부터 미국 내에서 커다란 인기를 모았던 드라마 ‘스튜디오 원’ 시리즈에서 57년 방영된 동명의 에피소드를 원작으로 한다. 즉, 카사베츠가 직접 각본을 쓰지 않은 유일한 영화라는 얘기다. 원래 감독으로 내정돼 있던 잭 클레이튼이 하차한 뒤, 아직 파라마운트와 계약에 묶여있던 카사베츠는 TV버전 및 영화의 각본을 쓴 애비 만의 추천으로 연출을 맡게 된다. 제작을 맡은 이는 바로 스탠리 크레이머. <시라노 드 벨주락> <하이눈>의 제작자로서뿐 아니라, <흑과 백> <초대받지 않은 손님> 등 인종차별을 주제로 한 소위 ‘메시지 영화’들로 이름이 높은 감독이기도 했다. 보다 전통적이고 관습적인 영화문법을 옹호하던 크레이머가 배우들의 즉흥연기를 중시하며 새로운 영화적 비전을 지니고 있던 카사베츠와 내내 불화를 빚은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더욱이 버트 랭카스터와 주디 갤런드, 각본가 애비 만은 모두 크레이머가 연출과 제작을 겸한 1961년작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이미 팀을 이룬 전력이 있다. 결국 카사베츠는 영화의 후반작업 중 해고를 당하는 굴욕을 당했고, 영화는 크레이머의 의지에 따라 재편집됐다. 실제로 카사베츠는 이 영화와 인연을 끊은 채 ‘스탠리 크레이머의 영화’라 불렀고 자신의 버전보다 “너무 많이 센티멘탈하다”고 비판했다. 이때의 상처로 카사베츠는 다시 독립영화 방식으로 돌아와 <얼굴들>을 완성했고, 이후 아내인 지나 롤랜즈와 가족들, 친구들과 함께 일종의 ‘가내 수공업’ 방식으로 영화를 찍는 이른바 ‘카사베츠 방식’의 제작을 고수하게 된다.

 

 

그러나 치명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는 실제 지체장애학교의 아이들을 대거 출연시켜 얻게 된 생동감, 카사베츠의 특유의 클로즈업과 유영하는 듯한 카메라 등 ‘카사베츠적 특징’들이 여전히 남아있다. 카사베츠의 즉흥적이고 자유분방한 스타일이 ‘시스템’을 만났을 때 생기는 긴장감은, 비록 우리가 아는 ‘카사베츠 스타일’과는 현격히 다르되 당대 할리우드의 여느 영화들과도 다르다. 만약 그가 할리우드에 무사히 안착했다면 이후 어떤 영화를 만들었을지 이 영화를 통해 가늠하고 상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정말 그랬다면 할리우드는 또 한 명의 ‘위대한 이단아 감독’을 갖게 됐을지도 모른다. 물론 우리에겐 그가 ‘미국 인디영화의 대부’로서 남은 게 훨씬 축복이긴 하지만. (김숙현 /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코디네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