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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모스필름 90주년 특별전

[리뷰] 전쟁을 대하는 이중적 관점 - 카렌 샤흐나자로프의 <화이트 타이거>

모스필름 90주년 특별전


[리뷰] 전쟁을 대하는 이중적 관점

- 카렌 샤흐나자로프의 <화이트 타이거>




2차 대전을 배경으로 한 카렌 샤흐나자로프 감독의 <화이트 타이거>(2012)는 겉으로는 전쟁의 위험을 경고하지만 사실 전쟁에 대한 열망을 은밀히 드러내는 영화다. 또한 전쟁을 그리면서도 정작 그 외의 부분에 대한 묘사가 더 기억에 남는 독특한 전쟁영화이기도 하다. 영화의 줄거리만 간단하게 정리하면 언뜻 ‘매끈한’ 장르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정체 불명의 독일 전차 ‘화이트 타이거’의 공격으로 거의 죽을 뻔한 이반은 전차에 대한 것을 제외한 모든 기억을 잃는다(‘이반’이란 이름조차 임의로 지은 것이다). 그런데 이반은 사고 후 전차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신비한 힘이 생기고, 이 능력을 바탕으로 화이트 타이거를 집요하게 쫓기 시작한다.


그런 맥락에서 이 영화를 독일군과 화이트 타이거에 대한 이반의 복수극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총 상영시간 110분의 영화에서 정작 화이트 타이거와의 전투는 80분 만에 끝나 버린다. 이반은 거의 다 잡은 화이트 타이거를 눈앞에서 놓쳐버리고, 마침 독일이 때맞춰 패전을 선언함으로써 그의 복수는 다소 허무하게 마무리된다. 그런데 영화는 이때부터 다시 시작한다. 이반의 이야기가 모두 끝난 뒤 약 30분 분량의 에필로그를 덧붙이는 것이다. 이는 전체 줄거리와는 아무 관련 없는 불필요한 사족처럼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이 장면이 <화이트 타이거>를 흥미롭게 만든다.



그중 딸기 아이스크림 시식 장면이나 진화론에 대한 논의 등도 물론 인상적이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단연 마지막에 등장한 히틀러이다. 2차 대전이  끝났을 당시 히틀러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지만 영화는 그를 다시 카메라 앞으로 불러온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내용의 대사를 말하게 한다. “독일은 전쟁에 패했고 일종의 희생양으로서 전쟁에 대한 책임을 홀로 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사실 독일은 유럽의 은밀한 꿈을 대신 실현시키려 했을 뿐이다. 유대인과 러시아를 멸망시키는 것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끝날 수도 없을 것이다. 전쟁은 인간의 삶 그 자체다.”


이 말은 표면적으로는 끝나지 않은 전쟁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은밀하고 노골적으로 전쟁의 당위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먼저 유럽을 하나의 단일한 주체로 상정하며 유럽의 적이 러시아라고 기정사실화한 뒤, 그와 똑같은 논리로 결국 러시아의 적은 유럽이라고 가정하는 것이다. 그 발언의 주체가 다름 아닌 히틀러라는 점에서 그런 시각을 비판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히틀러라는 절대적인 악의 상징을 내세움으로써 그 발언에 무게를 싣고 있다고 보는 편이 이 경우엔 더 적절할 것 같다. 다시 말해 마지막의 히틀러 에피소드는 ‘나는 당신을 적으로 생각하지 않지만 당신이 나를 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싸움을 준비할 수 밖에 없다’는 이상한 논리로 전쟁에 대한 핑계를 대는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이반은 아직 화이트 타이거에게 복수를 하지 못했다는 것도 떠올려야 한다. 전쟁이 다시 일어나기를, 즉 화이트 타이거가 다시 자기 눈앞에 나타나기를 가장 간절히 원하는 사람은 바로 이반이다. 마치 전쟁 기계처럼 행동하는 그는 영화에 등장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전차를 고치고 있었고, 전차 안으로 다시 들어가며 영화에서 퇴장한다. 전쟁의 참혹함을 부각시키는 듯한 영화의 메시지를 쉽게 믿을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도 지금까지 화이트 타이거와 다시 싸우기를 고대하고 있을 이반의 존재 때문이다.


김보년│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