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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Review

[리뷰] 자궁의 빙하기 - 가이 매딘의 <겁쟁이는 무릎을 꿇는다>

상영작 리뷰

.......가이 매딘, 자궁의 빙하기

가이 매딘의 '겁쟁이는 무릎을 꿇는다' 


한국뿐만 아니라 전세계를, 영화감독들 뿐만 아니라 영화팬들을 몇 십 년째 사로잡고 있는 현대의 저주가 있다. 그것은, 영화 문법의 개발은 멈춰 버렸고, 더 이상 형식과 스타일의 새로움은 없으며, 모든 새로움은 이제 내러티브의 몫이 되어버렸다는 자포자기다. 누구 말대로, 더 이상 영화는 없던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있던 것을 취하는 것이라는 저주. 가이 매딘은 이 공공연한 저주를 깜박 잊었던 작가 중에 한 명이다.

매딘은 무의식을 추구한다. 하지만 그것은 영화를 통해 비춰보는 인간의 무의식이 아니라, 반대로 그를 통해 인간이 스스로를 비춰보는 영화의 무의식이다. 매딘이 원시적인 옵티칼 효과, 조악한 아이리스나 이중노출, 소프트 필터, 어설픈 자막 삽입, 저감도 필름 혹은 8mm 필름에서 얻어지는 거친 그레인과 같은 초기 무성영화의 이미지로 물러선다면, 그것은 영화 자체를 그 자신의 오래된 시간, 즉 영화사조차 버려졌던 역사의 쓰레기통에서 주워오기 위해서다. 그 쓰레기통이야말로 영화의 무의식이다. 이것은 마치 삶에서 잊혀졌던 사람들이 꿈을 타고 튀어나오는 것, 도시에서 사라졌던 쓰레기들이 홍수를 타고 쏟아져 나오는 것, 또한 이사하려고 가구를 옮기다가 오래전 잃었던 물건을 되찾는 것과 같다. 그래서 매딘의 영화는 신화의 영화이기도 하다. 이것은 너무나 오래되어 잊혀졌던, 그래서 그에 선행하는 어떠한 시간도 불가능한 최초의 시간에 속하는 영화다. 매딘 영화는 영화의 선사시대에 존재한다. 자궁의 빙하기. 8mm 그레인들이 눈보라치는.

그러나 그 신화엔 거주하는 자들은, 고상한 그리스 신들이 아니라는 점에 주의할 것. 가이 매딘의 신화에는 아이스하키 선수들, 프로레슬러들, 점성술사나 미치광이 과학자, 음흉한 간호사들이나 가죽의상을 입은 변태들, 무엇보다도 조악한 옵티칼 효과를 입은 유령들이 산다. 꿈의 홍수를 타고 튀어나오는 것들은 짝퉁 프라이팬, 날짜가 지워진 새마을호 티켓, 코묻은 불량식품 포장지, 퇴폐이발소 언니들과 같은 쓰레기 혹은 싸구려들이지, 결코 단군, 이순신, 유관순, 대통령 혹은 영부인과 같은 거룩한 문화재 혹은 위인들이 아니다. 여기에 여타의 다른 꿈 혹은 신화 작가들과 매딘이 견지하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고급신화로 꾸며지는 인간의 무의식이 아니라, 저급신화 즉 대중신화로 꾸며지는 영화의 무의식. 이것은 표현주의 카메라에 찍힌 멜로드라마, 혹은 방화가 되어버린 선데이 서울이다. 괴테 혹은 삼국유사는 그만큼 키치하지 않다. 싸구려만이 거룩해야 한다. 아마도 매딘이 정립한 가장 위대한 정식은 다음일 것이다: <영화의 무의식=대중의 신화>. 빙판을 미끄러지는 정충들은 아이스하키 선수들이다(<Coward Bends the Knees>).

만약 매딘이 언제나 키치로 신화를 꾸민다면, 그것은 기억을 잃어버리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싸구려만이 죽은 것이고, 잃어버릴 수 있고, 또 반복해서 잃어버릴 수 있다. 그래서 이 신화국(神話國)에 이주할 수 있는 유일한 여권이란 기억상실증이다. 신화는 기억나지 않을 만큼 기억의 끄트머리이고, 그보다 오래된 어떠한 기억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령들은 자신들이 죽은 것조차 잊어버렸기 때문에 돌아온다. 매딘의 영화들을 관통하는 주요한 모티브는 그래서 기억의 오작동이다. 과대기억과 과소기억의 대결이 매딘의 유치뽕짝 결빙 멜로드라마를 사로잡는다. 한 여자만을 기억하는 강박적 신랑과 결혼한 것을 매번 잊어버리고 매일 결혼준비만 반복하는 바보 신랑의 쌍(<Archangel>), 복수심에 사로잡힌 메타와 바람둥이 어머니(<Coward...>)이 그러하고, 예수연기자와 장의사라는 두 형제(<Heart of the World>)도 그러하다. <Careful>은 그 중 가장 흥미로운 쌍일 것이다: 서로에게 기억상실을 요구하는 두 연인은, 사실 어머니의 자궁과 아버지의 정충에 이끌리는 과대기억 망상증자들이었다. 어떠한 경우든, 그 가능성과도 같을 “총체적 기억상실”에 이르는 것, 모든 얄팍한 기억을 휩쓸어 가는 중인 8mm 눈보라를 타고 기억의 빵구에 이르는 것, 나아가 스스로 그만큼 결빙되어 투명한 입자가 되는 것이 관건이다. 빙하기란 비기억immemory의 시대다. 하지만 바로 그 얼어붙은 것의 투명함이 다시 빛을 발할 것이다. 크리스탈만이 자체발광한다(<The Saddest Music in the World>, <My Winnipeg>). 빵꾸를 통하지 않고서 우린 삶으로 돌아올 수 없다. 기억의 바닥을 치지 않고서, 우린 어느 하나 기억할 수 없다. 죽어보지 않은 자가 어찌 환생할 수 있단 말인가. 후굴되지 않은 자궁이 어찌 배태할 수 있을 것이며.

물론 이 모든 것은 매딘이 다른 풋티지 작가들과 공유하는 방법론이다. 그러나 풋티지 작가로서, 매딘의 고유성은 풋티지를 영화의 숙명으로 선언했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매딘은 풋티지로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 작가가 아니다. 그는 반대로 영화를 풋티지로 만들고자 한다(그러한 의미에서 그의 풋티징은 구스타프 도이치, 피터 체르카스키와 같은 오스트리아 전통에 견주어야 한다). 매딘의 가장 위대한 유머가 여기에 있다: 선사시대에 발견된 최초의 영화, 그것은 풋티지 영화였던 것이다(가장 담대한 시도는 단연 <Heart of the World>일 것이다). 어떤 영화도 원본이었던 적이 없다. 모든 영화는 풋티지 영화이며, 최초의 영화도 풋티지인 것은 마찬가지다. 그래서 영화는 태생적으로, 선험적으로 신화이며, 바로 그 신화를 통과하는 8mm 그레인들은 눈보라처럼 기억을 결빙시킨다. 신화제국, 그곳은 캐나다의 얼어붙은 두메산골, 위니펙이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이, 발명도 아닌 것처럼, 단지 발견은 아니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기억으로부터 분실되었던 8mm 눈보라는, 없던 것도 아닌 것처럼 있던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없으면서도 있었던 것이기에 무의식의 원소들이다. 매딘의 영화는 “영화를 처음부터 재발명하려는 시도”이고 “우주의 정중앙에 끝내 영화를 위치시키려는 경건한 신화”*다. 


김곡 / 영화감독


*Guy Maddin, "Very Lush and Full of Ostriches" in From the Atelier Tovar: Selected Writings, Coach house Books, 2003, p.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