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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2012 베니스 인 서울

[리뷰] 이바노 데 마테오의 <곡예사>

한 남자의 끝없는 추락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우리는 영화의 주인공인 훌리오가 직장 으슥한 곳에서 한 여성과 열정적으로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보게 된다. 하지만 훌리오는 지금 바람을 피우는 중이고 그는 두 명의 자녀를 둔 행복한 중산층 가족의 가장이다. 결국 바람을 피운 사실이 아내에게 들통 나고, 훌리오는 어쩔 수 없이 집을 나와 혼자만의 외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물론 완전한 ‘독립’은 아니라서 여전히 막내아들을 학교에서 집까지 데려다주어야 하며 아내와 자식들에게 생활비를 계속 보내주어야 한다. 자동차 할부금 납부나 큰 딸의 해외 여행비를 모아야 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게 영화가 시작한지 약 20분 만에 일어나는 일이다. 이제 나머지 90분 동안 관객은 집을 나온 한 남자가 무력하게 노숙자로 전락하는 모습을 보아야 하는데, 이때 흥미로운 것은 상식을 넘어서는 추락의 낙차이다. 그는 처음에는 1000 유로 때문에 전전긍긍하다가 나중에는 200유로 때문에, 마지막에는 1유로 때문에 행패를 부리는 사람으로 변한다. 매 끼니를 샌드위치로 때우고, 집값을 내지 못해 차에서 잠들고, 허리를 다쳐가며 막노동을 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영화의 제목인 ‘곡예사’가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제목이란 생각이 든다. 그는 정말로 줄 위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다만 훌리오가 워낙 손쓸 새도 없이 비참하게 몰락하다보니 이 영화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헷갈리기도 한다. 이탈리아의 사회복지 시스템이 얼마나 엉망이기에 시청에서 일하는 공무원이 제 한 몸 하나 건사 못할까라는 남의 나라 걱정이 절로 들기도 하고, 남편과 아빠가 저렇게 고생하는데 근사한 크리스마스 파티나 준비하는 가족의 태연한 모습에 내가 괜히 울컥하기도 한다. 그러나 공들여 묘사한 훌리오의 우습고도 슬픈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면, 그리고 엔딩크레딧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고 있으면 이 영화는 훌리오가 겪는 고통의 근본적 이유나 그 고독한 내면에는 별 관심이 없고, 그냥 훌리오가 외줄 위에서 휘청대는 모습을 약간의 냉소와 함께 팔짱끼고 지켜보고만 있다는 생각도 든다. 이러한 영화의 태도에 동의할지 말지는 물론 직접 보고 생각할 문제이다. 2012 베니스영화제 오리종티 부문 상영작.

 

글/ 김보년(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코디네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