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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Review

[리뷰] 이들의 찰진 사랑 - 장선우의 <우묵배미의 사랑>

상영작 리뷰

이들의 찰진 사랑

장선우의 '우묵배미의 사랑' 



<우묵배미의 사랑>은 장선우라는 한국영화사에서 가장 격렬한 논쟁을 야기했던 감독의 이력에서 예외적인 작품에 속한다. 상징 우화의 형태를 빌었던 데뷔작 <서울황제>(1987)와 후속작 <성공시대>(1988) 이후 발표한 이 영화는 급작한 변신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우묵배미의 사랑>은 코리안 뉴웨이브의 주요한 성과 중에서도 시선의 폭과 성찰의 깊이를 확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남다르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서울 변두리 쪽방촌의 주민 배일도(박중훈)와 최공례(최명길)이다. 치마 공장 재단사와 미싱사로 호흡을 맞추게 된 두 사람은 첫 대면부터 품게 된 호의로 인해 사적인 애정관계에서도 호흡을 맞추게 된다. 허구한 날 공례를 두들겨 패는 폭력적인 남편, 일도의 일거수일투족을 시비하는 억센 아내는 그들의 사랑을 더욱 찰지게 만든다. 일도의 플래시백에 의해 추억되는 내러티브는 가난한 연인의 관계, 삶의 정황들에 의해 멍들어가는 그들의 상처, 도망가려 하지만 발목을 잡히고 마는 운명, 지지고 복고 아등바등 살아가는 공동체적 삶의 아름다움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우묵배미의 사랑>은 변두리 동네에서 벌어지는 통속적인 불륜 혹은 사랑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격동의 1980년대에서 1990년대로 이행하는 당대적 상황에 대한 논평으로 또는 회고형 성장영화로서 그 진가를 드러낸다. 여기서 장선우는 새로운 시각으로 당대의 한국 사회를 조감하려 한다. 일도 부부의 이삿짐 트럭이 서울을 빠져나가면서 펼쳐지는 풍경은 자본주의의 고도화로 인해 변모해가는 서울의 지정학적 위상을 효과적으로 요약한다. 구성진 뽕짝 가락에 실린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이미지들의 트래킹 쇼트는 막 조성된 단단해 뵈는 아파트촌과 우뚝 솟은 마천루, 현란한 벽 그림이 그려진 백화점, ‘우리의 서울’이라는 도로 간판, 아파트 재개발 공사가 한창인 공사 현장을 차례로 비춘다. 이 파노라마적 이미지의 모음은 서울의 변화를 압축적으로 제시한다. 궁벽한 서울 달동네에서 경기도 쪽방 촌으로 쫓겨가는 일도의 이동은 도시화, 산업화의 과정에서 주변으로 밀려나는 하층민들의 처지를 암시한다. 몇몇 인상적인 묘사를 통해 장선우는 밑바닥 인생들의 연대와 도시화, 현대화, 자본주의화의 힘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심어놓았다. 

고도 자본주의로 인해 파생된 소외를 다룬 영화로서 <우묵배미의 사랑>의 백미는 빈민 혹은 서민 생활의 실상과 애환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에서 찾을 수 있다. 실제 삶에서 길어 올린 생생한 대사, 일체의 꾸밈을 배제한 정직한 이미지, 은유나 상징으로 환원되지 않는 생기 넘치는 캐릭터들은 극적인 효과를 위해 인위적으로 연출되지 않았다. 이대근이 연기하는 남편 석희가 공례를 곤죽이 되도록 두들겨 패는 신에서의 살기, 세인의 시선을 피해 숨어 든 비닐하우스 거적때기 위에서 나누는 사랑은 당대 한국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빛나는 사실성의 성취이다. 주변화된 개인의 절망에 대한 심금을 울리는 묘사들도 도처에서 발견되는데, 특히 허름한 여인숙에서 눈물을 흘리며 나누는 섹스는 가난으로 헐벗은 그들의 내면적 정황을 육체의 제스처를 통해 절감시킨다.


장병원 /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