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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프랑스 영화의 황금기:1930-1960

[리뷰] 막스 오퓔스 '쾌락 Le Plaisir'

<쾌락>은 할리우드로 넘어가 작업하던 막스 오퓔스가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 <윤무 La Ronde〉(1950)에 이어 두 번째로 연출한 작품이다. <윤무>에서처럼 <쾌락> 역시나 내레이션이 등장하고 여러 가지 이야기가 에피소드 형식으로 진행되며 트레이드마크라 할 만한 우아한 카메라 움직임이 여전하다는 점에서 막스 오퓔스의 영화적 세계가 심화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 영화는 기 드 모파상의 작품을 원작삼아 ‘쾌락’에 관한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쾌락>의 내레이션은 <스팔타커스>로 1961년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피터 유스티노프가 맡았다. 스탠리 큐브릭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 중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유일한 경우다.) 첫 번째 에피소드 ‘가면’은 지나간 젊음이 아쉬워 가면을 쓰고 무도회장에 들러 여성들에게 구애하는 노인의 이야기이고, ‘텔리에 부인의 집’은 조카의 성찬식에 참여하기 위해 창녀들과 함께 시골로 가는 텔리에 부인의 사연이며, ‘모델’은 자신의 모델과 사랑에 빠진 쟝이라는 화가가 등장해 그리 달콤하지만은 않은 사랑의 면모를 보여준다.
막스 오퓔스는 <쾌락>의 내레이션을 통해 행복에 대해 이런 생각을 드러낸다. “행복은 그저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이 영화의 에피소드에서 보이는 쾌락의 실체는 지극히 짧고 제한적이다. ‘가면’의 노인의 경우, 무도회장에서 만난 여인들과의 짧은 쾌락 이후 나이를 이기지 못해 쓰러지고 마는데 그렇게 된 사연의 이면에는 오랫동안 젊음을 그리워해온 회한이 자리 잡고 있다. 또한 ‘모델’의 화가 쟝 역시 상대 모델과 뜨거운 인연을 이어가지만 사랑의 유통기한은 그리 길지 못하다. 연애 초반에는 잠시만 떨어져도 안달 나는 사이였다가 이내 관심이 멀어지면서 서로에게 상처주고 비수를 꽂는 남보다도 못한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연극 연출가로 일한 경력 때문인지, 막스 오퓔스의 영화는 무도회장(‘가면’), 기차 안(‘텔리에 부인의 집’), 집안(‘모델’)과 같은 실내에서 이야기가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 까닭에 오퓔스 감독은 실내에 어울릴만한, 그러니까 제한된 공간에서의 카메라 이동에서 탁월한 성과를 이끌어냈다. <쾌락>에서도 그런 카메라 이동의 미학은 여전히 눈을 사로잡는데 ‘가면’에서 젊은이로 분장한 노파가 여인의 손을 잡고 춤을 추는 장면에서의 카메라는 빙글빙글 돌아가며 우아한 움직임을 뽐내고 ‘모델’에서는 쟝에게 버림받은 여자가 계단을 뛰어올라가 창문 밖으로 뛰어내려 자살을 시도하는 장면이 카메라의 시점이 되어 실제적인 느낌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런 오퓔스의 카메라 이동 미학은 계단에서 특히 빛을 발한다. 이 계단의 미장센에는 오퓔스가 품고 있는 행복에 대한 생각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찰나의 쾌락 뒤 찾아오는 씁쓸한 비애가 짧은 상승과 급격한 하강이라는 계단의 이미지 속에 덧씌워져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영화평론가 크리스 후지와라는 “오퓔스의 영화에는 스타일이 있다. 숙련된 장식가들은 의미의 부재를 은폐하기 위한 예쁘장한 터치들을 ‘스타일’이라고 말하지만 오퓔스의 스타일은 오히려 의미를 생산한다.“고 평했다. 또한 스탠리 큐브릭의 초기 영화를 보면 유별나게 부드러운 카메라, 복잡한 크레인, 그리고 바람에 날리는 듯한 돌리의 움직임 등에 오퓔스의 영화가 보여준 매혹적인 숏의 운용이 어렵지 않게 감지된다. 또한 2편의 영화에서 함께 작업한 배우 제임스 메이슨은 막스 오퓔스의 카메라 움직임에 대한 짧은 시를 남기기도 했다. 믿거나 말거나.


A shot that does not call for tracks 트랙이 필요하지 않는 숏이란
Is agony for poor old Max, 불쌍한 늙은 막스에겐 고통일지니
Who, separated from his dolly, 달리에서 떨어지자
Is wrapped in deepest melancholy. 깊고 깊은 멜랑콜리에 싸이네
Once, when they took away his crane, 한번은 크레인을 뺏기자
I thought he'd never smile again. 다시는 미소 짓지 않을 사람처럼 굴었지

글/ 허남웅(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