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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프랑스 영화의 황금기:1930-1960

[리뷰] 마르셀 카르네 '인생유전 Les enfants du paradis'


2차 대전 나치 점령기 파리에서 촬영한 <인생유전>은 상실을 통해 인생의 쓰라린 의미를 통각하게 되는 이들에 대한 서사시이다. 물경 세 시간을 상회하는 유장한 스토리는 한 편의 가면무도회 같은 삶의 아이러니를 스케치한다. 1830년대 파리, 광휘에 찬 아름다움과 기품을 지닌 여주인공 개랑스 주변에 그녀를 흠모하는 네 명의 남자가 모여든다. 곡예극단의 마임 광대 뱁티스테와 떠돌이로 극단 생활을 시작한 배우 프레데릭, 작가이자 범죄의 거리를 지배하는 범죄의 왕 라스네어, 그리고 속물적인 귀족 몽트레이 백작이 개랑스의 사랑을 얻기 위해 고투를 벌인다. 개랑스의 속마음은 열정적인 뱁티스테를 향하지만, 그녀가 라스네어의 음모적 범죄 행각에 휘말림으로 말미암아 연인의 사랑은 좌초될 운명에 처한다. 영화는 19세기 초입 흥청거리는 파리에서 주요 인물들이 우연히 얽히며 관계를 맺는 1부 ‘범죄의 거리’, 개랑스와 뱁티스테가 헤어진 몇 년 뒤 극단을 대표하는 유명인사가 된 뱁티스테와 개랑스가 재회하게 되는 2부 ‘흰 옷의 남자’로 구성되어 있다.

<인생유전>은 프랑스 영화사에서 위대한 성취를 이룬 작품 중 하나일 뿐 아니라 마르셀 카르네의 영화적 야심이 최고조에 달한 대표작으로 꼽힌다. 전쟁 중에 제작된 영화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원대한 스케일을 자랑하는 이 영화는 고전 비극을 연상케 하는 사랑과 증오, 질투로 점철된 스토리, 19세기 파리의 저잣거리를 재현한 다채로운 볼거리, 슬픔과 비극조차 예술로 승화할 수 있는 시정, 웅대한 세트 위에서 묘사되는 화려한 무대 공연으로 좌중을 홀린다. 마르셀 카르네의 역량이 응집된 것은 3년간의 제작기간이 수긍될 만큼 압도적인 시각적 장관의 연출이다. 춤과 노래, 판토마임, 익살광대극이 상연되는 곡예극단을 배경으로 한 까닭에 <인생유전>에는 많은 공연 장면들이 삽입되어 있다. 때로는 생략 없이 10분여에 이르는 공연을 담아낸 시퀀스도 있는데, 19세기 파리의 공연문화와 배우들의 생동감 넘치는 연기는 스크린에서 보았을 때 더 강렬하다. 특히 밀랍 인형처럼 분칠을 한 마임 배우 뱁티스테로 분한 장 루이 바로의 퍼포먼스는 무언의 제스처가 주는 영기로 객석을 매료시킬 것이다.


<안개 낀 부두> <새벽> 등의 영화에서 마르셀 카르네와 협업한 바 있는 시인 자크 프레베르는 각본을 맡아 이야기에 깊은 맛을 더한다. 특별히 프레베르의 손을 거친 대사는 구절구절 시적 함축성을 머금고 있으며, 촬영, 편집, 조명, 음악, 프로덕션 디자인 등 전 분야에 걸친 완벽에 가까운 카르네의 통제는 프로덕션의 완성도를 최상급으로 올려놓았다. 1,300여 명의 엑스트라와 막대한 물량이 투입된 대형 프로덕션의 산물이지만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지극히 사적이며 작은 부분에 맞춰져 있다. 잘 써진 낭만주의 시대 연극을 본 것 같은 인상을 남기는 <인생유전>은 사랑에 눈 먼 자들 간에 좀체 교환되지 않는, 어긋난 러브스토리이다. 작중 인물들은 하나같이 사랑을 절대화하고 또 갈구하지만 우리네 인생은 뜻대로 되는 일이 별로 없다. 사랑받지 못한 자들의 고통과 상실은 주요 인물들을 순환하며 뜻하지 않는 사이 비극적 운명의 애상곡을 완성한다. 거리에서 구걸을 하는 걸인조차 낭만적 기질을 가지고 있었던 시대의 실패한 로맨스. 염세주의적 범죄자인 라스네어가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는 것 자체가 삶의 역설 아니겠는가? 그러나 사악한 음모를 모의하는 음산한 범죄자마저도 연모의 상대를 향한 애끓는 마음을 어쩌지 못한다. 다시 오기 힘든 프랑스 영화의 웅대한 황금기를 증언하는 역작이다.

글/ 장병원(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