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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서울아트시네마 개관 9주년 기념 영화제

[리뷰] 마뇰 드 올리베이라의 '앙젤리카의 이상한 사례'

‘영화적’, 이 말의 뜻은 무엇인가? 어떨 때 ‘영화적’이라는 것의 의미를 실감하게 되는가. <앙젤리카의 이상한 사례>(2010)의 도입부는 문자 그대로 ‘영화적인 것과 대면하는 순간’이다. 마리아 조앙 피레스의 피아노 연주가 흐르는 아늑한 밤, 비가 오고 있다. 거리를 비추는 나트륨 등의 따뜻한 빛은 비의 차가운 질감과 대비된다. 불빛과 함께 차가 도착하고 우산 쓴 남자가 사진관의 벨을 누른다. 그는 (‘죽은 자’의 사진을 찍어줄) 사진사를 찾는데, 사진사는 멀리 출장 중이다. 우연히 지나가던 남자가 젊은 사진사를 추천한다. 젊은 남자 ‘이작’(리카르도 트레파)은 그렇게 해서 죽은 자의 초대를 받는다. 슬픈 운명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단 2분 30초에 걸쳐 영화는 느와르, 드라마, 미스터리로 시시각각 변하고, 내 가슴은 설렘을 거듭한다. 마뇰 드 올리베이라는 그 짧은 도입부만으로 나를 영화적 순간에 취하게 한다.


사진은 ‘현존을 영원화 하는 작업’이다. 피사체는 시간이 흘러도 늙거나 소멸하지 않는다. 사진을 통해 그 모습 그대로의 피사체와 영원히 만날 수 있는 거다. 그런데 앙젤리카의 가족이 원하는 건 조금 다르다. 그들은 앙젤리카의 아름다운 시신을 사진에 담아 영원히 간직하려 한다. 비록 그녀가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으나 그녀는 이미 죽은 몸. 그렇다면 죽음을 영원히 기억하겠다는 걸까, 아니면 죽지 않았다는 헛된 망상을 품겠다는 걸까. 벽을 따라 둘러앉은 가족들은 앙젤리카와 그들 사이에 위치한 사진사가 그들이 의뢰한 작업을 수행하는 걸 바라본다. 그들은 몇 분 작업의 결과물로 ‘영원하는 현존’을 얻기를 희망한다. 사진사가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원하는 물건을 얻을 것이다. 문제는 사진사에게 일어난다. 카메라에 잡힌 앙젤리카가 그를 향해 눈을 뜨며 방긋 웃는 것 아닌가. 죽은 자가 움직이고 있다니!


움직이는 피사체는 사진이 아닌 영화의 몫이다. 그리고 배우는 인물을 필름 속에 남긴다. 나는 영화가 ‘인물을 유령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필름 속에서 인물이 유령처럼 떠돌거나 쉬고 있을 거라 여긴다. 영사기가 돌아갈 때에야 인물이 쉬던 몸을 이끌고 재등장해 움직이는 거라고 짐작한다. 배우의 영원한 몸짓이 아닌 유령이 된 인물의 피곤한 몸짓을 본다는 거다. (내 말이 의심스럽다면 <기쁨 없는 거리>(1925)의 첫 몇 분을 보라) 영화를 본다는 건 환영을 보는 것이다. 이작은 환영과 사진 사이에 묶인 인물이다. 그는 포도밭으로 나가 일꾼들의 몸을 찍기를 즐기는, 그러니까 보이는 것에서 진실을 구하기를 갈망하는 인물이다. 그런 그에게 환영이 나타났으니 이거 큰일인 거다. 게다가 그의 위치가 그를 더욱 환장하게 만든다. 주변인들은 유령을 알아볼 리 없건만, 그는 유령에 사로잡혀 있고, 관객은 유령과 어울려 지내는 인물을 바라보며 유령‘성’을 인식한다. 결국 죽어나는 건 인물이다.


영혼의 무게는 얼마쯤 될까. 이작이 묵는 하숙집을 방문한 중년의 여자는 “물질은 영의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몸속에서 영혼이 차지하는 무게는 21그램 정도라고 주장하는 자는 바보라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이작의 영혼이 떠날 때 그의 몸이 털썩 쓰러지기에 이른다. 몸 전체를 지탱하고 있는 건 바로 영혼이다. 얼마 후, 우리는 죽은 이작이 누운 방의 바깥에서 스크린을 바라본다. 맞은편 베란다 너머로는 햇살이 가득한데, 죽은 자와 현실 사이에는 그가 찍은 사진들이 걸려 있다. 이어 여주인이 창을 닫자 검은 화면만이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현실은 저 너머에 있고, 죽은 자는 사진과 영화 사이에서 목숨을 거두며, 우리는 스크린 밖에 남는다. 당신이 본 것은 무엇인가.

글/
이용철(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