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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Review

[리뷰] ‘화란 영화’를 보고 찡해지다- 한받의 추천작 <마리안의 허상>

“91년의 여름이었던 것 같습니다.

텔레비전 모니터로 이 영화를 접한 이후로

제게 이 영화의 잔상이 계속 남아 있어요.

어두운 극장에서 필름으로 꼭 보고 싶었습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마리안의 허상> 가수 한받(야마가타 트윅스터)의 추천사



[리뷰] ‘화란 영화’를 보고 찡해지다- <마리안의 허상>





90년 봄에 <죽은 시인의 사회 Dead Poets Society>(1989)를 뒤늦게 재개봉관에서 보고 슬슬 영화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고1이었고 사춘기였습니다. 가요톱텐에 강수지가 나와서 ‘보라빛 향기’를 불렀고, 방송반에서 단체로 미팅을 했고, 걸어서 간 호숫가 벤치에 앉아 파트너와 함께 배를 타던 친구들을 바라봤습니다. 짝사랑하던 여학생을 막연하게 길에서 기다렸고 우연히 만나서 ‘폴리스(The Police)’의 《싱크로니시티 Synchronicity》(1983) 앨범을 녹음한 카세트 테잎을 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시도들이 수포로 돌아갈 무렵이었습니다. 그저 방송실에서 좋아하는 노래를 1,000번 정도 들으려고 했고 실제로 들었던 것 같습니다. 어떤 영화가 좋은 영화인지 표지만으론 알 수 없었습니다. 그나마 몇 년 후 박찬욱 감독이 연재하던 《스크린》이나 《로드쇼》에서의 B급영화 계보들이 레퍼런스로 찾아보는 영화들이 되었습니다만 아직은 무리였습니다. 그 와중에 티비에서 주말 밤에 방영하는 영화들 중에 운 좋게 좋은 느낌으로 남게 되는 영화들을 만나게 됩니다. 물론 잘 못 알아듣는 게 흠이었지만 AFKN에서도 좋은 영화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티비로 본 영화 중 이렇게 화란 영화를 구하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는 화란, 곧, 네덜란드 영화입니다. 91년 여름에 이 영화를 소개할 때 화란 영화라고 했습니다. 화란 영화 중에 제가 좋아하는 영화로 폴 버호벤 감독, 얀 드봉 촬영, 룻거 하우어 주연의 풋풋한 영화 <사랑을 위한 죽음 Turkish Delight>(1973)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을 위한 죽음>은 아벨 페라라의 <스네이크 아이 Dangerous Game>(1993)의 엔딩 크레딧에서 들려오던 ‘블루 문(Blue Moon)’ 노래를 듣고 받은 어마어마한 충격 뒤, 또는 소위 말해서 소마이 신지 감독의 카메라가 그림자로 거칠게 출연하는 중2發(발) 롱-테이크(Long Take) 영화 <태풍클럽>(1985)을 영접하고 나서의 20대 중반에 봤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시네마테크 키드’가 된 후에 봤단 말입니다.

그리고 이 화란 영화는 시네마테크 이전의 ‘주말의 영화 키드’ 시절의 영화입니다. 훨씬 더 깊은 영화의 묵은 때로 범벅이 되기 전에 보았던 영화입니다. 보고 좋았기 때문에 저는 책상 옆 캘린더에 이름을 적어 놓았습니다. 91년 8월 24일 <마리안의 허상>. 저는 2000년대 초 제 홈페이지에 이 영화에 대한 추억을 짤막하게 제목만으로 적어 놓았습니다(“<마리안의 허상>이라는 화란 - 네덜란드 - 영화를 보고 찡해지다”라고 웹 페이지에다가 썼습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뒤, 누군가에게서 이메일을 받았습니다. 자기도 그 영화를 추억한다며 우연히 검색하다가 보게 되었고 같은 기억을 가진 이가 반가워서 메일을 보냈다고. 저도 포털 사이트에서 이 영화를 검색해 보았습니다. 이 영화를 기억 속에서 복기하는 이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저도 그런 이들 중에 하나인 것 같았습니다. 이런 면에서 ‘주말의 영화 키드’들이 존재했던 것 같고 저도 그중에 하나인 것입니다.


네덜란드에 가본 적은 없습니다. 앞으로 언젠가는 가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만 스피노자도 네덜란드로 피신했다고 했나요? 우리에게 많이 알려져 있진 않지만 자유로운 공기가 살아 숨쉬는 곳이 아닐까 하는 느낌은 있습니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색감이 남다르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기존의 할리우드 영화나 유럽 영화, 홍콩 영화 또는 방화(한국 영화)의 색감과 확연히 차이가 났습니다. 한편으론 낯선 유럽 도시의 도시괴담 같은 이야기가 와 닿았던 것 같습니다. 남자 주인공은 저처럼 뿔테 안경을 끼고 있고 상의를 추리닝 바지 안으로 집어넣는 훌륭한 패션의 소유자이며 여자 주인공은 눈이 크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매력적인 여성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이 굵은 느낌은 아닙니다. 선이 굵거나 색이 또렷한 느낌이 아니라 조금은 그 경계가 번져 있는 느낌입니다. 영화는 그래서 조금 조잡하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오히려 이런 느낌이 조금은 모던하면서도 인간적이어서 좋았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대만 영화도 조금 이런 느낌이던가요?

이 영화의 압권은 역시나 마지막 장면입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서로의 갈 길을 가던 두 남녀가 다시 뒤를 돌아 서로를 바라보는 상황에서 멈추어 버린 그 장면은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열린 결말이라고 할까요? 확실히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 없는 그런 결말이었거든요. 그래서 더욱 아련하고 가슴 찡하게 남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마지막 장면이 누군가의 손길인지는 알 수 없으나 편집된 것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이쯤에서 한여름의 신기루 같았던 저의 유치한 스토킹 이야기로 마무리 지을까 합니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시내의 학원에서 수업을 마치고 저는 같이 수업 듣던 어느 여학생을 쫓아갔던 적이 있습니다. 그 여학생은 시내를 걷다가 어느 서예용품 가게에 들렀습니다. 저는 밖에서 그녀를 몰래 훔쳐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버스정류장으로 갔고 저도 따라갔습니다. 저는 버스정류장에서 그녀에게 말을 걸어볼 심산이었습니다. 버스정류장에 도착하자 몇 번 버스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버스가 막 출발하려 했고 그 안에는 사람이 한가득 실려 있었고 급하게 출발하려는 그 버스에 그 여학생은 황급히 올라탔고 곧이어 버스의 출입문은 닫혔고 버스는 달려가 버렸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그냥 쳐다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상당히 짧은 시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와의 마지막이었습니다. 그 여학생을 그 뒤로는 다시는 볼 수 없었습니다. 지금은 기억 속에서 그 여학생의 이미지만이 흐릿하게 남았는데 그 당시 현실에서 못 찾은 그녀를 다음 해 여름밤 화란 영화 속에서 찾았던 것은 아닐까요? 사우스 코리아, 남쪽 대도시 변두리, 남자 고등학생의 마음입니다.

그로부터 22년이 지난 어느 날 이 영화를 다시 보았습니다. 이번에는 옆에 아내가 자리하였고 영화를 둘이서 같이 보았습니다. 두 아이들은 저 방에 재웠습니다. 결말은 역시 달랐습니다. 22년 전의 그 느낌은 더 이상 이 공간에 속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고민이 되었습니다. 아내는 이런 저를 보고 웃었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큰 스크린으로 다시 보게 되면 어떨지 궁금한 밤입니다. 그때 다시 뵙겠습니다. 그 여름의 영화를 다시 볼 수 있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한받(야마가타 트윅스터) / 가수


마리안의 허상 Zoeken Naar Eileen / Looking For Eileen

1987│98min│네덜란드│Color│DigiBeta│청소년 관람불가

연출│루돌프 반 덴 버그 Rudolf Van Den Berg

출연│톰 호프만, 라이셋 안토니, 마리케 뵈겔레르스

상영일시ㅣ 2/7(금) 19:40, 2/15(토) 19:00(상영 후 가수 한받 시네토크), 2/20(목) 1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