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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루키노 비스콘티 특별전

루키노 비스콘티: 늦어버린 자의 통절한 시선



자신이 매혹된 대상을 향해 격정적으로 타오르는 눈빛, 그리고 그 대상을 소유할 수 없음을 깨달은 후 내비치는 쓸쓸한 눈빛. 루키노 비스콘티의 중·후기 영화들에서는 인물들의 이러한 눈빛들을 자주 볼 수 있다. 비스콘티가 창조한 인물들은 늘 무언가에 매혹된다. 그것은 주로 이성이나 동성에 대해 느끼는 사랑이나 욕정인데, 그 매혹은 스스로의 생명을 갉아먹을 만큼 치명적이다. 그들은 그 대상을 먼발치에서 은밀히 응시하거나, 혹은 품에 안고 격정적으로 바라본다.


인물들의 응시는 비스콘티의 영화가 작동하는 핵심적인 동력임에 틀림없다. 카메라는 무언가를 응시하는 인물들의 눈을 클로즈업으로 보여준다. 그 눈은 매혹의 대상을 얻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으로 불타오르다가, 이내 허망한 느낌으로 변한다. 그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없음을 깨닫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그들이 응시하는 시선을 따라 줌인을 한다. 급박한 줌인의 시선은 인물들이 느끼는 강렬한 매혹과 격정적인 심리 상태를 그대로 드러낸다. 줌의 사용 방식은 이채롭다. 격조 높은 미장센에 담겨진 주제 의식과 대상을 향해 급박하게 접근해 들어가는 줌인의 빈번한 사용이 충돌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는 거의 소격효과에 가까운 인상을 주면서 인물들의 응시의 순간과 시선을 더욱 강조한다. 예컨대 19세기 이탈리아의 상류사회를 묘사한 <순수한 사람들>(1976)의 인물들은 자신의 열망의 대상을 직접적으로, 혹은 은밀하게 응시한다. 주로 줌인을 이용한 시점 숏에는 시선의 교환 속에 인물들 간의 사랑과 욕정, 그리고 상류사회의 복잡한 정치성이 함축되어 있다.


비스콘티의 중·후기 영화들에서 역사와 멜로드라마의 충돌은 핵심적인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런 요소들은 <센소Senso>(1954)부터 시작되어 <레오파드>(1963) 이후의 영화들에서 본격적으로 볼 수 있다. 역사와 멜로드라마라는 요소가 결국 인물들의 열망과 관련해 작동한다. 격변하는 역사로부터 살아남는 것과 매혹되는 대상에 대한 사랑을 이루는 것은 사실상 비슷한 열망이다. 그러나 비스콘티의 영화들에서 이들의 열망은 결코 이뤄질 수 없다. <레오파드>의 살리나 왕자(버트 랭카스터)는 자신의 조카 탄크레디(알랭 들롱)의 약혼녀 안젤리카(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를 보고 한 눈에 매혹된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얻기에는 너무 늙었다. 육신은 노쇠했고, 정신은 "내가 원하는 것은 잠을 자는 것"이라고 말할 만큼 지쳤다. 살리나는 안젤리카와 격정적인 춤을 춘다. 두 사람의 눈은 서로에 대한 욕정으로 불타오른다. 마치 춤으로 섹스를 대신하는 것처럼. 그러나 그들은 다른 시간대를 살고 있으며, 그들 자신도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리하여 이 춤은 살리나 자신의 사랑에의 열망과 그것의 불가능성, 그리고 역사의 변경에 대한 뒤늦음에의 자각이 어우러져 빚어진, 스스로를 위무하며 탄식하는 춤이 된다.




<가족의 초상Gruppo di famiglia in un interno>(1974)의 노교수(버트 랭카스터)의 상황도 유사하다. 그는 자신의 안락한 방에서 평화로운 노년을 보내고 있다. 그를 둘러싼 수많은 책과 미술품은 그의 시간이 끝나간다는 것을, 곧 화석과 같이 굳어질 그의 시간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러나 위층에 들어온 세입자들로 인해 그 평화가 깨진다.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젊은 남자(헬무트 베르거)는 노교수의 온 마음을 뒤흔든다. 그가 청년을 바라보는 눈빛은 아버지의 눈빛이 아닌 사랑이나 욕정의 눈빛임에 틀림없다. 그 사랑은 마치 화광반조처럼 격렬히 타오르지만, 그의 시간이 곧 끝나리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베니스에서의 죽음 >(1971)의 음악가 아센바흐(더크 보가드)는 베니스에 휴양을 왔다가 아름다운 금발의 미소년 타치오(비요른 안드레센)를 보고 단숨에 매혹된다. 젊음과 미에 대한, 영혼이 뒤흔들릴 정도의 완전한 도취가 있다. 하지만 그는 그 마음을 들키는 것이 너무나 두렵다. 엄청난 나이차와 동성애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이다. 끝없이 타치오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수치심과 감출 수 없는 흥분으로 인해 부르르 떨린다. 카메라는 그의 시선을 계속적인 줌인으로 보여주는데, 이 과격한 줌인은 그의 격정적 감정과 불안한 심리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는 결국 해변가에서 소년을 바라보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소년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며, 동시에 그 아름다움을 바라보다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을 찬미하는 비스콘티의 데카당스가 정점에 달한다.


비스콘티의 멜로드라마에는 종종 역사가 개입하지만, 이 역사가 직접적으로 재현되는 경우는 매우 적다. 그저 파편처럼 스쳐지나갈 뿐이다. 하지만 이 역사는 마치 속박과도 같이, 인물들의 삶과 사랑에 끊임없이 틈입해 들어온다. <센소>는 이를 시각화해 보여준다. 여주인공 리비아(알리다 발리)는 이태리 통일 운동의 역사를 담은 오페라를 바라본다. 카메라는 오페라 장면과 객석을 하나의 숏으로 보여준 후, 리버스 숏으로 리비아를 보여줌으로써 역사를 응시하는 자로서의 리비아의 위치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관계는 곧 깨어진다. 직접적으로 삶에 침투한 역사는 리비아의 사랑이 실패하는 숙명으로 작용한다. <저주받은 자들>(1969)에 등장하는 일가는 2차 대전이라는 역사에 직접적으로 휘말린다. 나치즘은 그들의 삶에, 심지어 내면에까지 파고들어온다. 성적 욕망을 품은 인물들의 시선 교환은 관능적이며 퇴폐적이다. 이러한 욕망은 나치즘의 광기와 맞물리면서, 이들의 삶을 파멸의 길이자 아수라장의 지옥도로 이끈다. <루드비히 Ludwig>(1972)에서 루드비히 2세(헬무트 베르거)는 역사의 흐름으로부터 도피하려 하지만, 결코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루드비히는 그가 사랑했던 유일한 여성인 엘리자베트(로미 슈나이더)를 타오르는 강렬한 눈빛으로 바라보지만, 그녀는 루드비히를 배신한다. 좌절한 루드비히는 자꾸만 성 안으로 숨어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예술과 동성애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광인이 되어간다. 루드비히가 역사로부터 소외된 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19세기 후반이라는 시간은 이미 왕들의 시대가 끝나가던 때다. 즉 그는 너무 늦게 도착한 왕이다. 루드비히는 또한 문을 걸어 잠그고 역사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이루지 못한 사랑이 집착이 되어 그를 파멸로 몰고 가는 것이다. 이제 그의 눈은 활력을 잃고 빨갛게 충혈 된다.





비스콘티의 인물들은 무언가를 얻기를 열망하지만, 결코 그것을 얻을 수 없다. 그들의 육체와 정신적 시간이 이미 지나가 버렸거나(노쇠), 혹은 그들이 역사로부터 뒤쳐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사실을 자각한 채, 매혹의 대상들을 쓸쓸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이 죽음은 열망에 대한 패배인가? 아니, 오히려 그들은 죽음 그 자체에 매혹된 것처럼 보인다. 비스콘티는 영화의 마지막에 그 인물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레오파드>에서는 살리나가 땅에 무릎을 꿇은 후 어두운 골목을 향해 걸어가는 것으로, <베니스의 죽음>에서는 아센바흐가 쓰러지면서 드넓은 해변에서 실려 나가는 롱숏으로, <루드비히>, <가족의 초상>, <순수한 사람들>에서는 죽은 이의 얼굴을 마치 박제하듯 멈춰놓은 스틸이미지로 영화가 끝이 난다. 이들의 모습은 역사와 사랑에 있어 뒤늦은 자들을 바라보는 통절한 시선으로, 자신의 시대가 끝났다고 느끼는 비스콘티의 시선과 정확히 겹쳐진다. 비스콘티의 데카당스 미학은 이처럼 무언가를 바라보는 시선에 의해 드러난다. 아름다움에 대한 매혹, 그리고 죽음에 대한 도취가 그러하다. (박영석: 시네마테크 관객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