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회고전/러시아 모스필름 회고전

러시아 전쟁영화의 서정성

지난 1일 시네마테크 전용관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게오르기 추흐라이 감독의 <병사의 발라드> 상영 후, '러시아 영화의 서정성'이란 주제로 경상대 러시아학과 홍상우 교수의 강연이 있었다. 기존 전쟁영화와의 차별성을 보여준 <병사의 발라드>를 중심으로 러시아 영화인들에게 새로운 표현 기회를 준 러시아 전쟁영화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었던 그 소중한 시간의 일부를 옮겨 본다.


홍상우(경상대 러시아학과 교수): 러시아는 20세기 들어서 1, 2차 대전 외에 연방체제의 구성 및 해체과정에서 여러 전쟁을 겪었기 때문에 전쟁영화가 영화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특히, 러시아는 서로 다른 민족과 종교로 구성된 연방체제로 인해 끊임없는 내전에 시달려 왔다. 그래서 지금 현재까지 만들어지는 러시아 전쟁영화는 주제나 소재 면에서 다른 나라보다 복잡하고 다양한 측면이 많다. 또한 아직까지도 러시아 전쟁영화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걸작들이 나오고 있는데, 이는 해빙기 전쟁영화에서 이뤄낸 혁신적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전쟁영화 중 뛰어난 평가를 받는 영화들의 공통점은 적에 대한 분노나 적에 대항해 싸우는 자국 군인이나 군대의 영웅적 행동을 묘사하는 것을 넘어선다는 것이다. 전쟁 자체의 비극성을 다루면서 전쟁당시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사연이나 인간 자체에 관심을 두는 영화들이 높게 평가받았다. 소련에서는 30년대 ‘소비에트 문화예술의 3대 원칙(당성, 인민성, 교육성)’이 발표되는데, 이것이 사회주의국가 전체의 문화예술의 원칙으로 채택되었다. 이 중 인민성은 특정 개인을 영웅시하지 않고 대중이 중심이 되는 문학작품을 만들도록 권고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스탈린집권시기에 스탈린을 영웅시하고 우상화하게 되면서 왜곡되어 인민성의 원칙이 유지되기 힘들었다. 이런 시기에 대한 반동으로 해빙기 때 상대적인 자유화로 새로운 경향의 영화가 나왔다고 볼 수 있다.

해빙기 전쟁영화를 서정성의 측면에서 볼 때는 대표적으로 <이반의 어린시절>, <학이 난다>, <병사의 발라드> 등을 꼽을 수 있다. 세 작품 전부 다 기존의 전쟁영화에 반기를 들고 혁신을 이룬 영화들이다. 전체영화사로 볼 때 <이반의 어린시절>이 내용의 혁신 외에도 미학적 형식에서 혁신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다. 방금 보신 <병사의 발라드>는 전쟁이 끝나고 15년 남짓한 시기에 만들어졌는데, 당시 2차 대전 패전의 상처가 가시지 않았고, 여전히 파시스트에 대한 분노가 강했던 상황에서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멜로드라마 형식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놀랍고 혁신적인 영화로 불리운다. <학이 난다>의 경우는 전장에 있는 애인을 배신하는 내용을 다루었기 때문에, 영화가 처음 발표될 당시 언론에서는 상당한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세 작품 모두 해외영화제에서 상을 받는 등 외평단의 상당한 지지를 받았다. 이 영화들은 서구사회가 지녔던 스탈린시기 고정관념을 깼다는 점에서 해외의 주목을 받은 것이라 생각된다.

<병사의 발라드>는 제목이 말해주듯이, 영화 전체가 알료사라는 한 병사의 이야기를 서정적인 발라드의 느낌을 주면서 진행된다. 전쟁영화에서 듣기 쉽지 않은 경쾌한 분위기의 음악이 영화전체에 흐르는 가운데 영화 사이사이에 삽입되는 기차의 바퀴소리가 일종의 후렴구 역할을 한다. 서정적인 멜로디의 음악과 기차바퀴소리가 조화를 이루면서 영화 전체의 시적인 느낌을 강조한다. 또한 알료사가 영화에서 겪게 되는 페쇄적이고 개별적인 에피소드들은 이러한 역동적이고 리듬감 있는 음악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연결되게 된다. <병사의 발라드>가 기존전쟁영화와 다른 새로운 면모는 영화가 처음 시작될 때부터 드러난다. 이미 전장에서 죽은 알료사에 대한 내레이션으로 영화가 시작되며, 전투장면은 딱 두 번 나온다. 전쟁을 전면에 내세우기 보다는 알료사가 겪은 사건이나 상황들, 인물들 간의 관계를 보여주면서 휴머니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전쟁이 아니었으면 순조롭게 흘러갔을 인간 삶의 모습이 전쟁으로 인해 방해받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영화 초반에 알료사의 어머니가 길을 바라볼 때 알료사의 어머니를 안쓰럽게 바라보는 젊은 부부가 나오고, 영화의 마지막 내레이션에서는 알료사가 전쟁에서 죽지 않았더라면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를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를 두고 일부 평론가들은 전장에서의 죽음으로 인해 이루지 못한 한 병사의 사랑과 이후의 삶에 대한 연민을 발라드처럼 표현했다고도 말한 바 있다. 이렇듯 영화 전체를 서정적인 분위기로 만들면서 영화가 보여주고자 한 것은, 전쟁이라는 상황에서도 억제되지 않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과 감정이다. 또한 전장이 아닌 후방의 에피소드들을 보여준 것은 전쟁의 고통이 결국 일상에서 살아가는 일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인 것으로도 생각된다.

영화 전체의 서정성은 무엇보다도 알료사의 이미지와 알료사와 슈라의 사랑으로 인해 더욱 더 강조된다. 알료사는 기존 전쟁영화의 영웅적이거나 신화화된 주인공과 달리 전쟁에서 의도치 않게 공적을 세운 평범한 병사이다. 아직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연약하고 보호받아야 할 것 같은 인물이다. 영화에서 나오는 암호명과 알료사의 성은 작은 새를 의미한다고 한다. 그는 훈장 대신 휴가를 선택하고, 시간이 별로 없는 상황에서도 남을 도우는 일에 앞장선다. 기차를 타고 가면서 그가 벌이는 일들이 일종의 로드무비 형식으로 펼쳐진다. 특히 알료사와 슈라의 풋풋하고 순수한 사랑의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감독은 상당히 고심했다고 하는데, 두 주인공이 모두 당시 연기학교에 재학중인 신인배우였다고 한다. 러시아의 평론가들 중에는 이 영화의 성공요인으로 이 두 주연배우를 꼽는 이들도 있다.

두 사람의 사랑은 기차 안에서의 대화와 에피소드들을 통해 발전되며, 기차 밖의 풍경과 두 사람의 풋풋하고 순수한 표정의 클로즈업, 기차바퀴소리, 그리고 서정적인 음악 등이 두 사람의 사랑의 느낌을 더욱 더 서정적으로 전달한다. 특히나 안타깝게 헤어진 후 육교에서 재회한 두 사람이 애칭을 부르기 시작하고, 수돗가에서 음식을 나눠먹고 씻는 장면은 전쟁이란 상황에서도 그들만의 소우주가 만들어지는 느낌을 잘 전달하고 있다. 감독은 주연배우 기용과 관련해서 “관객한테 기억이 분명하게 남아야 한다. 전쟁에 의해 훼손되는 게 아니라 더 깊어지고 심화되는 주인공들의 고양된 사랑을 온몸으로 감정을 실어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한편, 알료사는 시적이고 서정적인 느낌을 주는 나약한 이미지이기는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주류영화의 영웅적인 면모도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촉박한 휴가시간에 남을 도와주면서도 이러저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사실상 비범한 능력을 가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결국은 짧은 만남이기는 하지만 어머니를 만나게 된다. 알료사의 이런 면모를 두고 유연한 태도로 처한 상황에 대처하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인물이란 평가도 있다. 영화의 내용이 비극적임에도 영화 전체가 서정적이고 밝은 분위기를 전달하는 것은 살아있고 진실한 인물로 평가받는 알료사의 형상으로 인한 것이 아닌가 싶다. (정리: 김수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