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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전/마스무라 야스조 회고전

날 것 그대로의 삶의 욕망을 긍정하는 영화

[영화읽기] 마스무라 야스조의 <문신>


전당포집 딸 오츠야는 혼처가 정해지자 종업원 신스케와 사랑의 도피를 떠난다. 신스케와 살겠다는 일념으로 그녀는 부모도 재물도 안정된 미래도 버린다. 신분상의 차이로 이루어지기 힘든 두 사람의 사랑이 멜로드라마의 공식을 환기시키지만 <문신>은 그러한 관객의 기대를 일찍부터 배신한다.

일본의 멜로드라마는 예정된 파국에 순응하는 개인의 비극을 죽음의 미화를 통해 해결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사내들의 계략에 빠져 연인을 잃고 유곽의 기녀로 전락한 순간, 그러니까 멜로드라마의 히로인들이 비껴갈 수 없는 숙명을 받아들이고 삶을 체념하는 그 순간, 도리어 오츠야는 남자들을 희롱하며 그들의 돈을 쥐어짜는 요부로 다시 태어난다. 멜로드라마의 세계에서 출발한 영화는 어느새 팜므파탈이 지배하는 느와르적인 세계로 변모한다. 욕망과 그 실천에 몰두하는 인물들이 스크린을 장악하고 나의 욕망이 타자의 욕망에 선행한다는 불문율이 사나운 기세를 드러낸다.

운명에 순종하며 기꺼이 죽음을 선택하는 일본영화 특유의 처연한 풍경을 <문신>에서 발견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하다. 실제로 <문신>의 살인 장면은 죽음에 저항하며 최후까지 발악하는 몸뚱이의 물질성을 최대한 부각시킨다. 보스 곤지의 사주를 받아 신스케를 살해하려는 산타가 도리어 신스케에 의해 죽음을 맞는 씬은 조악하기까지 하다. 산타의 단도는 애처로울 정도로 헛 칼질을 반복하고 우산 하나로 방어하는 신스케의 몸은 진창을 구르고 바닥을 긴다. 무려 5분 가까이 지속되는 두 사내의 어설픈 육탄전은 신스케가 산타의 이마에 단도를 박는 것으로 끝이 난다. 카메라는 격렬한 고통에 괴성을 지르며 몸부림치는 산타의 얼굴과 버둥거리는 두 다리를 집요하게 보여준다. 거친 육탄전과 낭자한 혈전은 이후에 벌어지는 수차례의 살인에서도 어김없이 되풀이된다.

<문신>의 살인 장면들은 유려한 영상미보다는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육체의 중량감을 고집한다. 그 육체들은 치명상을 입고도 좀처럼 죽지 않는 생명력을 자랑한다. 몇 번씩이나 억센 신음소리를 토하면서 꽤나 긴 시간을 버틴다. 그래서 죽은 오츠야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마지막 쇼트는 마치 좀비처럼 그녀가 금방이라도 눈을 뜰 것 같은 기괴한 착각을 자아낸다. 죽여도 죽지 않는 몸의 질긴 생명력 또는 죽었지만 살아있는 듯한 몸의 비논리성은 강한 생존의 욕구가 이성으로 가늠할 수 없는 차원임을 지적한다.

온갖 종류의 기상변화를 동반하는 <문신>의 살인 장면은 삶에 천착하는 인간의 욕망을 가치판단이 불가능한 일종의 자연현상으로 제시한다. 신스케의 살인이 법이 아니라 원혼에 대한 두려움과 죄의식에서 비롯된 자살로 처벌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세차게 퍼붓는 빗속에서 신스케는 죽음의 위기에 직면한다. 곤지가 죽기 직전에는 바람이 불고 포주 토쿠베가 죽은 숲에는 안개가 자욱하다. 신스케와 오츠야와 문신사 세이키치가 죽어가는 결말에서는 천둥번개가 치고 비가 내린다.

거듭되는 살육전의 룰은 순수한 약육강식의 논리이다. 누구도 죽음을 원하지 않으며 오로지 내가 살기 위해 네가 죽어야 한다는 논리. 따라서 그 누구도 아름답게 죽지 못한다.

<문신>의 세계는 결국 죽음을 미화하는 일본영화의 신파적 전통이 얼마나 부조리한 것인가를 증명한다. 죽음을 이상화하는 신파적 결말이란 스스로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욕망이 거세된 식물인간을 양산하는 폭력일 뿐이다. 아름다운 죽음보다 살고자 하는 추잡한 욕망이 차라리 자연스럽다고 말하는 영화 <문신>은 날 것 그대로의 몸과 그 몸이 발하는 삶의 욕망을 긍정한다. (최인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