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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Review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


<히로시마 내 사랑>은 누벨바그의 진정한 출발을 알리는 선구적인 작품이자 감독 알랭 레네와 누보로망 작가인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만남으로 유명하다. 관습적이고 선형적인 이야기에만 매달려온 기존의 영화 작업에 의문을 제기했던 레네는 새로운 형식과 기교를 구사하는 누보로망 작가인 뒤라스에게 직접 시나리오를 부탁했다. 뒤라스는 상식적인 전개 방식 대신 그녀의 소설에서나 접했을 법한 다양한 실험 구조를 영화에 적용시킨다. 뒤라스는 히로시마 원폭 투하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의 충격을 전하며 이후 시나리오를 쓰게 된 동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히로시마 내 사랑>의 시나리오를 주문받지 않았다면, 나는 히로시마에 대한 글은 아무것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히로시마 내 사랑>의 시나리오를 쓰게 되었을 때, 나는 히로시마의 엄청난 사망자 수를 보고 내가 만들어 낸 유일한 연인의 죽음의 스토리를 쓰게 되었다.”


영화의 첫 장면은 밀착된 피부의 움직임에서 시작한다.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폭의 형상을 띠는 분진들이 시대를 덮는 상흔처럼 남녀의 살갗에 뿌려진다. 곧이어 히로시마에서 우연히 만나 사랑을 나누는 프랑스 여자와 일본인 남자의 관계가 드러나고, 단순한 우연을 가장하던 이들의 만남은 히로시마라는 공간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다. 뒤라스는 “지리적으로, 철학적으로, 역사적으로, 경제적으로, 인종적으로 가능한 한 최대한 서로 동떨어진 두 인물에게 히로시마는 에로티시즘과 사랑, 불행의 보편적인 여건들이 강렬하게 조명될 수 있는 공통된 장소”라며, 히로시마가 이 세상에서 유일한 곳이라 말했다.



여자는 히로시마에서 모든 걸 다 보았으며 항상 히로시마의 운명에 대해 슬퍼했다고 말한다. 그녀는 영화 촬영을 위해 히로시마를 처음 방문했다. 하지만 히로시마는 이미 그녀의 의식에 깊이 각인된 공간으로 자리한다. 스무 살도 채 되기 전 느베르에서 적군 병사를 사랑했다는 이유로 삭발당한 채 지하실에 감금됐던 그녀에게는 몰래 파리로 떠나올 때 들었던 종전 소식이 아물지 않았던 아픔으로 남아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비극에서 기인한 히로시마와 그녀의 운명이 조응하면서 히로시마는 여자가 머물고 있는 현재의 공간이자 느베르에서 겪은 아픔에 어떤 보편성을 확인시켜주는 환상의 공간이 된다. 점차 여자는 기억을 매개로 과거와 현재를 무차별하게 넘나들며 시간이나 합리성의 경계를 망각한다. 이와 같은 의식의 흐름을 따르는 것이 바로 레네와 뒤라스가 주목했던 화법이다.



여자는 느베르에서 겪은 시간을 통해 ‘그럼에도 삶이 계속된다’는 엄숙한 진리를 알고 있다. 히로시마에서 여인들이 기형아를 낳거나 남자가 불임이 된다고 해도 그 역시 계속되는 삶이다. 그런 점에서 <히로시마 내 사랑>은 개별적인 모든 것이 보편적이던 시대의 상흔을 공간으로 은유하는 영화이자, 한 시대에 편입되어 기꺼이 살아가며 각자가 감당하고 있는 삶의 규모에 집중하는 영화다. 뒤라스는 당시 히로시마 원폭에 대한 엄격한 취재로 주목받았던 존 허시의 현지 보고 기사의 원문을 일부 이용해 다음과 같은 내용의 대본을 썼다. “보름째 되는 날 히로시마는 다시 꽃으로 뒤덮이게 되었다. 수레국화와 글라디올러스, 그리고 둥근잎 나팔꽃과 수선화들이. 그때까지 꽃들의 세계에서 알려지지 않았던 어떤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잿더미에서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장미경 : 에디터)


1.17(화) 19:00 상영 후 김종관 감독 시네토크
1.29(일) 1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