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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아트시네마 소식

관객의 뜻과 함께 우직하게 간다

글 : 이영진   사진 : 오계옥 | 2010.03.05

시네마테크 전용관 공모 거부한 서울아트시네마 최정운 대표

태초에 문화학교 서울이 있었다. 시네마테크 부산이 생겨나기 전, 서울시네마테크가 생겨나기 전, 강릉시네마테크가 생겨나기 전, 청주 씨네오딧세이가 생겨나기 전, 문화학교 서울이 있었다. 1990년대 초 문화학교 서울은 시네필들에겐 유일한 오아시스였다. 문화학교 서울에서 잠깐 목을 축인 시네필들의 갈증은 점점 더 커졌고, 그들의 목마름은 지금의 서울아트시네마를 만들어냈다. 서울아트시네마 최정운 대표는 목마름으로 길을 낸 한국 시네마테크 역사의 산증인이자 보이지 않는 후견인이다. “돈 많은 한의사가 딴따라한다고 놀림도 오해도 많이 받았다”는 그는 지난 20년 동안 한결같이 ‘돈 안되는’ 시네마테크의 친구 역할을 자임해왔다. 영화진흥위원회가 영화계와 관객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시네마테크 전용관 운영자 공모’를 강행한 상황에서 최 대표를 만났다. 시네마테크의 미래를 위해 시네마테크의 과거를 증언할 수 있는 적임자라는 판단에서였다.

-문화학교 서울이 문을 연 지 햇수로 20년이 됐다.
=그러게. 그때 일했던 20대 대학생 친구들이 모두 마흔이 넘은 아저씨들이 됐다.

-1991년 5월에 문을 열었는데 문화학교 서울의 이름을 내건 첫 상영회는 1993년이다.
=초기 멤버는 현재 인디스토리 대표인 곽용수씨와 전창수, 정민택씨 이렇게 세 사람이었다. 한의원 3층 사무실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더라. 처음부터 시네마테크를 해보자라는 명확한 지향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91년과 92년에는 주로 영화 스터디 모임을 진행했고, 93년이 돼서 중국 5세대 감독들 영화를 틀었다.

-빈 사무실이 본인 소유였나.
=그건 아니고. (웃음) 영화를 만들어보겠다고 찾아온 친구들 틈에 끼어 있으면 귀동냥 좀 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좀더 적극적으로 했으면 영화쪽으로 길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첫 상영회에 대한 기억이 가장 강렬하게 남아 있을 것 같다.
=강의실이 60평이었는데, 의자 40개만으로는 부족해서 매트를 깔았다. 적어도 80명은 왔을 거다. 가설극장에서 연극 보듯이 영화를 봤다.

-10년 넘게 문화학교 서울의 사무실 임대료를 개인 부담했다. 만만치 않았을 텐데.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젊은 친구들이 하니까 고마웠다. 같이 있다는 것만으로 긍지를 가질 수 있었다. 돌아보면 내가 힘들었던 적은 별로 없었다. 힘들게 활동하는 스탭과 회원들을 보는 게 안타깝긴 했지만. 한번은 진료를 받으러 오신 아주머니가 나보고 ‘영화도 한다면서요’라고 물었다. 자기 아들도 영화 한다고 했다. 그래서 어디서 영화하냐고 물었더니 이 근처에서 한다고 하셨다. 알고 보니 문화학교 서울 스탭의 어머니였다. 제발 아들이 문화학교 서울에 오지 못하도록 해달라고 부탁하러 오셨다가 차마 속마음은 털어놓지 못하신 거지. 나는 직업이라도 있지만, 다른 친구들은 아니었으니까. 부모로선 대학 졸업한 뒤 어두운 창고 같은 곳을 들락거리며 매일 영화를 보는 자식이 걱정스러웠을 것이다.

-영화에 대한 관심은 대학 시절부터 갖고 있었나. 그랬다면 문화원을 찾아다니면서 영화를 챙겨보고 그랬을 것 같은데.
=대학 다니면서 친구 따라 프랑스 문화원에 가본 적은 있다. 거기 가는 친구들은 지성인 같아 보였다. (웃음) 한의학과 친구 따라서 갔는데 분위기가 안 맞더라. 내가 지성인도 아니고. 처음 본 영화가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몇번 가다 말았지. 영화에 대한 관심이 일었던 건 한국소형영화작가협회 활동을 하면서다. 대학 졸업하고 8mm 필름카메라를 중고로 샀는데 가지고 노는 게 재밌었다. 재롱 떠는 조카들 모습을 찍는 게 전부였으니까 취미라고 말하기도 뭣한 수준이었지만. 그러다 1987년쯤 한국소형영화작가협회에서 낸 광고를 신문에서 봤다. 유현목 감독님이 만드신 단체다. 공개강좌에 다녀온 뒤로 장롱 속에 처박아둔 카메라를 꺼냈다.

-직접 연출한 단편도 있겠다.
=내가 영화를 찍었다고는 말 안 했다. (웃음) 협회 회원들이 대개 아마추어였다. 1년에 4번 정도 정기 촬영회가 열렸다. 5분짜리 단편 시나리오 하나를 정해서 산 좋고 물 좋은 곳으로 야외 촬영을 나갔다. 참가 회원이 45인승 버스를 대절하면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많았다. 협회에서 배우들을 데려왔는데, 최유라 같은 프로 배우들도 왔다. 촬영은 배우가 연기를 하면 회원들이 동시에 찍는 식이었다. 장난이라고 비웃겠지만 회원들에겐 신기하고 소중한 경험이었다.

-한국소형영화작가협회는 지금도 명맥을 이어가며 활동한다고 들었다. 협회 회원으로 만나 결혼한 커플도 있을 것 같다.
=협회에 들어왔다가 헤어진 뒤 둘 다 나가버린 커플은 있었다. (웃음)

-사당동 시절 문화학교 서울의 가장 큰 난관은 뭐였나.
=불법 복사 테이프를 틀 수밖에 없으니까 항상 걱정이었다. 저작권법에도 걸리고, 상영공간 허락도 제대로 받지 못했고. 경찰들이 수시로 찾아왔다. 뭐 처단하겠다기보다 정보 취합 차원에서 동태 파악하는 정도에 그쳤지만. 항상 하는 말은 ‘좋은 일 하시네요’였다.

-진짜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나.
=정기상영회 시작할 때부터 불법이지만, 필요한 불법이라고 생각했다. 불법이 아니면 영화 서적에 나와 있는 작품들을 볼 수 없으니까. 관객이 늘어날 때마다 누군가는 불법을 저질러야 하는구나, 그랬다.

-2002년부터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이하 한시협) 이사장까지 맡게 됐다.
=문화학교 서울 입장에서는 비디오가 아니라 필름으로 영화를 상영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DVD 등이 출시되고 관객 수준도 높아졌는데, 테이프만으론 안된다고 봤다. 상영횟수를 줄이더라도 필름으로 상영하자. 다른 지역 시네마테크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연대회의 형태로 함께 모여서 머리를 맞댔고, 한시협이 결성됐다. 나야 문화학교 서울이 갖고 있는 상징성 때문에 이사장이 됐는데 아이디어를 짜고 사업을 리드하는 전문가 그룹 덕분에 지금까지 왔다.

-행사 때마다 인사말을 준비해 온다고 들었다.
=말을 잘 못한다. 준비 안 하고 가면 버벅거린다. 지하철 타고 가는 동안 핵심 키워드 두개를 항상 선정한다. 그런데도 무대 위에 올라가면 머릿속이 하얘진다.

-한시협의 고민거리는 문화학교 서울 때보다 더 많아졌겠다.
=경제력으로는 몇위 한다는 대한민국에 시네마테크다운 시네마테크가 없다. 시네마테크 부산이 있긴 하지만 영화제 소유다. 서울아트시네마의 경우 영화제 한번 치르려면 50명 정도 필요하다. 대부분은 (우리 사정을) 좀 아니까 도와달라, 고 부탁한 분들이다. 팸플릿에 적힌 고마운 분들의 이름을 볼 때마다 눈치가 보인다. 그나마 서울은 사정이 낫다. 지역은 더 힘들다. 국가에서도 이런 상황을 모르진 않을 텐데, 서울도 어려운데 지방이라고 되겠어,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가끔 그런 생각도 한다. 이런 걱정을 국가 대신 왜 우리가 하고 있지.

-영화진흥위원회의 공모 추진에 대해 불만이 클 텐데.
=시네마테크 일 하는 친구들이 돈 바라고 활동한 게 아니다. 그래도 모든 것을 다 걸었다. 그런데 지금 영진위의 공모를 보면 성질이 좀 난다. 우리가 하는 일을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시네마테크가 뿌리 내리기도 전에 고사하려고 하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영진위의 공모에 어느 단체도 응하지 않았는데.
=공정한 기회를 주기 위해 공모했다는데 아무도 접수하지 않은 건 무엇을 의미하나. 시네마테크 운영이 쉽지가 않다. 극장에 의자 놓고 영화 튼다고 시네마테크가 아니다. 영진위는 정부 방침이라 공모를 해야겠다는 이야기만 했는데, 적어도 공모를 하기 전에 서울아트시네마 외에 시네마테크 전용관을 운영할 능력과 준비를 하고 있는 곳이 있는지부터 조사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한시협이 운영하는 서울아트시네마는 지난해 영진위 내부 평가 때도 85점을 받았다. 잘하려면 더 지원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도 영진위는 행정지침만 내세웠다. 정부에서 설령 지침이 내려진다고 하더라도 외려 영진위가 시네마테크 전용관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면 방어를 해줘야 했던 것 아닌가 싶다.

-그동안 서울아트시네마는 영진위가 시네마테크 전용관 운영자를 공모할 권한이 없다고 주장해왔다. 영진위의 지원 또한 극장 임대료에 해당하는 30% 정도에 불과했다고 지적했다. 반면 영진위는 최근 보도자료를 내서 2008년 기준으로 시네마테크 전용관 전체 예산의 54.29%를 지원했고, 이 자금이 시드머니가 되어 결과적으로 90%에 해당하는 자금을 지원했다고 반박했다.
=영진위 지원금이 종잣돈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문화예술에의 지원을 무슨 투자 개념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소유를 주장할 순 없다. 이 자금을 굴린 건 영진위가 아니라 서울아트시네마와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다. 영진위는 투자가 아니라 지원을 했다. 영진위 말대로 2008년에 54% 지원해서 90% 효과를 거뒀다고 하자. 비영리 기구를 영진위가 지원해서 이만큼의 성과를 끌어냈다면 표창받을 일 아닌가. 영진위의 다른 사업들이 이만큼 결과를 냈나. 수치를 중요시하는 기업도 이 정도 지원하고 왈가왈부 안 한다. 게다가 54%라고 말하는 지원금 비중은 지역예산, 라이브러리 예산까지 포함하는데, 이런 예산은 서울아트시네마의 운영과 관련없는 것으로, 이런 예산을 제하자면 예산 비중은 기껏해야 30% 정도에 달한다.

-재공모에 응할 계획은 전혀 없나.
=공모에 참여하고 말고의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시네마테크 공모가 정당한 것인지, 그것이 시네마테크의 진흥과 영화발전을 위해 필요한 것인지, 장기적인 시네마테크의 진흥정책이 무엇인지 등의 문제가 더 중요하다. 게다가 현재 공모는 1년마다 사업 주체가 바뀌는 구조다. 시네마테크 전용관 사업은 올해에 이미 내년, 내후년 사업을 내다보고 준비해야 한다.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시네마테크에 대해 영진위가 장기적인 플랜을 갖고 있는지다. 영진위가 생각하는 시네마테크는 무엇이고, 그 시네마테크 전용관에서는 어떤 영화들이 상영되어야 하나. 공모 절차를 두고 옳다, 그르다를 따져 묻는 건 부차적이다. 올해 영진위의 시네마테크 사업 예산은 공공 라이브러리 구축 예산이 빠지면서 지난해보다 1억5천만원이 적은 4억원이 됐다. 왜 공공 라이브러리 예산을 없앴는지 그것도 의문이다. 게다가 500억원의 기금을 조성해 시네마테크 전용관을 짓겠다던 영진위의 약속 또한 물거품이 됐다. 영진위가 어떤 정책적인 판단을 했기에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인가. 영진위가 답변해야 할 건 바로 이런 문제들이다. 영진위가 현명한 판단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

-관객과 영화인들의 후원금은 큰 힘이 될 것 같다.
=5천만원이 넘긴 했는데, 얼마가 모였느냐보다 중요한 건 관객이 우리와 뜻을 같이하고 지지해준다는 거다. 수십억원보다 더 가치있다. 우직하게 제 길 가라는 바람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아직 갈 길이 멀다.
=보상없이 사람들 부려서 영화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시네마테크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시네마테크는 영화도서관이다. 영화소비자의 필요를 만족시키려면 보고 싶은 영화에 언제든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시네마테크가 존재해야 한다. 지금은 그렇게 하지 못해서 창피하지만, 이건 엄밀히 말하면 국가의 창피다.

[출처] 씨네21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5002002&article_id=59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