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10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영화제 소식

강추!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어떤 영화와 입 맞춰 볼까?

2010년 1월 19일 화요일  정시우 기자  

눈 밑에 점 하나 찍었을 뿐인데, 애미애비도 못 알아보는 딸내미로 변신하는 막장 이야기가 기막히다면, 자판 하나 뚝딱 두드려서 영화를 다운 받아 보는 낭만 잃은 시대가 아쉽다면, 엔딩 크레디트가 다 올라갈 때까지 객석을 뜨지 않는 마음 맞는 이들과 함께 하고 싶다면, 그리고 무엇보다 영화가 좋아 죽겠다고 모인 이들의 열기 가득한 공간이 그립다면 낙원상가에 위치한 시네마테크로 살짝 눈길을 돌려보라. 영화를 사랑하고, 영화에 대한 존경을 마다않는 시네마테크의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

영화인들이 또 한번 의기투합했다. 2006년 1월, 영화문화의 다양성을 외치며 출항 한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가 어느덧 5주년을 맞았다. 개막작 루이 푀이야드의 <뱀파이어>를 시작으로 45일간의 항해에 들어간 올해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영화는 모두 44편. 박찬욱 감독을 비롯해 김지운, 김한민, 윤종빈, 류승완, 박찬옥, 봉준호, 오승욱, 이명세, 이재용, 전계수, 최동훈, 홍상수 감독과 배우 안성기, 영화평론가 김영진 등이 자신들의 가슴에 품은 영화를 들고 관객 앞에 섰다. 하나같이 주옥같은 작품들이니, “도대체 뭘 봐?”하는 고민이 안 될 수 없을 터. 그래서 영화제에 탑승할 친구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9편의 작품과 걸작전 1개를 소개한다. 하지만 아래 소개하는 영화들은 순전히 ‘무비스트’의 취향이 반영된 리스트일 뿐이니, 기타 자세한 사항은 영화제 홈페이지를 참조하길 바란다. 특히 두 달이라는 긴 영화제 기간 동안 일정에 변동이 생길 수 있으니, 틈틈이 체크하는 센스는 필수다. 그래야 1년을 기다린 영화를 눈앞에서 놓치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을 것이다.

정성일 영화평론가가 추천하는 <뱀파이어> Les Vampires
연출: 루이 푀이야드 | 출연: 무시도라, 에두아르 마테| 1915년 | 399분 | 12세 관람가

<트와일라잇>의 사각턱 뱀파이어 오빠, 에드워드(로버트 패틴슨)을 생각하면 안 된다. <렛미인>의 미소녀 뱀파이어 이엘리를 기대해서도 안 되고, 사랑에 눈이 먼 ‘옥빈낭자표’ 뱀파이어를 추측해서도 안 된다. 이번 영화제 개막작이자 정성일 영화평론가의 추천작이기도 한 루이 푀이야드의 <뱀파이어> 속, 뱀파이어는 피에 환장한 흡혈귀가 아니라, 파리의 범죄 집단 이름이다.

1915년부터 1916년까지 제작된 <뱀파이어>는 총 10편으로 제작된 무성영화다. 그러니까 <스파이더맨>, <트랜스포머>류의 시리즈물을 떠올리면 되는데, 영화는 앞의 두 영화만큼이나 당대에 큰 사랑을 받으며 공전의 히트를 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푀이야드를 스릴러 장르의 주요 개척자로 자리 잡게 한 수작으로 몽환적이면서 낮선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그의 연출력은 훗날 프리츠 랑, 알프레드 히치콕, 알랭 레네, 데이비드 린치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오는 1월 20일과 2월 10일, 10개의 에피소드가 모두 상영된다고 하니, 도시락 싸 들고 가서 하루 죙일 극장에 칩거해보는 것도 기억에 남을 추억이 될 듯싶다.

류승완 감독이 추천하는 <열혈남아> 旺角下問
연출: 왕가위 | 출연: 유덕화 장만옥| 1987년 | 94분 | 18세 관람가

맨몸으로 세상과 맞짱 뜨는 열혈남아 ‘다찌마와 리’로 사랑받은 류승완 감독의 추천작은 (너무나도 어울리게) <열혈남아>다. 뒷골목 인생들의 허무와 패배의식을 통해 홍콩의 불확실한 미래를 보여준 왕가위 감독의 데뷔작으로 '왕가위표'라는 새로운 감수성을 탄생시킨 작품이기도 하다. 주목할 것은 이번에 상영되는 <열혈남아>는 기존에 개봉한 대만 버전이 아닌 홍콩버전(감독판)이라는 점이다.

때문에 이번 상영작에는 공중전화박스 장면에서 흘러나왔던 왕걸의 노래 "너는 내 가슴 속의 영원한 아픔" 대신, 임억력이 <탑건>의 O.S.T를 번안해 부른 ‘Take My Breath Away’가 나온다. 공중전화 키스씬과 더불어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린 엔딩장면 안타깝지만 역시 볼 수 없다. 하지만 유덕화, 장학우, 장만옥 등 톱스타들의 혈기왕성하고, 주름 없는 옛 모습을 볼 수 있으니, 그들의 팬이라면 놓치기 아까운 시간이다

봉준호 감독이 추천하는 <서바이벌 게임> Deliverance
연출: 존 부어맨 | 출연: 존 보이트, 버트 레이놀즈| 1972년 | 110분 | 15세 관람가

<서바이벌 게임>을 어떻게 표현해야 가장 적절한 설명이 될까? 위험한 장면이 너무 많아 모든 보험회사들로부터 촬영 관련 보험 가입을 거부당했다는 사실? 아니면 할리우드의 강심장 쿠엔틴 타란티노가 어릴 적 이 영화를 보고 큰 충격에 빠졌다는 사실? 그것도 아니면 2005년 최고의 공포영화로 뽑힌 닐 마샬 감독의 <디센트>의 레퍼런스가 된 작품이라는 사실? 수몰지역의 자연과 자연인들이 네 명의 도시인에게 무차별적인 복수를 가하는 대학살 극 <서바이벌 게임>은 현대 슬래셔 영화들에 원대한 영향을 끼친 작품으로 평가받는 영화다.

그러니, 호러영화의 애호가라면, 냉큼 서바이벌 게임 속으로 들어 갈 준비를 하시라. 영화는 ‘위대한 미국’이라는 건국 신화 이면의 야만성과 모순을 폭로했다는 높은 평가를 받으며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안젤리나 졸리의 아버지로 잘 알려진 존 보이트의 겁에 질린 명연기에 덩달아 겁에 질리게 될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명세 감독이 추천하는 <동경 이야기> Tokyo Story
연출: 오즈 야스지로 |출연: 류 치슈, 히가시야마 치에코| 1953년 | 136분 | 15세 관람가

비주얼리스트 이명세 감독이 미니멀리즘 미학의 선구자인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상영작 중에 추천인과 추천작의 매치도가 가장 낮은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만, 야스지로가 (낮은 앵글로 인물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일명) '다다미 쇼트'를 통해 가장 전통적이고 일본적인 영상미학을 구축했다는 평을 받는 감독이라는 점을 상기해보면, 일면 공감이 가기도 한다.

<동경이야기>는 자타가 공인하는 오즈의 대표작으로 평론가들이 뽑은 역대 최고의 영화 순위에서 10위권 밖으로 밀려난 적이 없는 수작이다. 영화는 가족 제도의 붕괴와 노인 소외 문제에 대한 비판을 ‘무심한 듯 시크하게’ 흐르는 절제된 카메라와 쓸쓸한 필치로 풀어낸다. 파격적인 내용을 찾는 이들에겐 심심할 수 있는 작품이지만, 최소의 움직임만으로 삶을 꿰뚫어내는 기운만은 강력하니, 오즈 야스지로를 몰랐던 사람이라면 도전해 볼 만 하겠다.

김지운 감독이 추천하는 <마태복음 Il> Vangelo secondo Matteo
연출: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 | 출연: 엔리케 이라조퀴, 마르게리타 카루소| 1964년 | 137분 | 12세 관람가

이탈리아의 뛰어난 시인이자 소설가, 영화감독이자 평론가였던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를 아는가. 1975년 11월 2일 로마 외곽의 황량한 벌판에서 동성애 매춘을 하던 한 소년에 의 해 처참하게 살해되며 더 유명해 진 감독, 파시즘에 정면도전한 공산주의자로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감독이 바로 파올로 파솔리니다. <마태복음 Il>는 예수의 삶과 말씀인 마태복음 1장에서 28장까지의 전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로 파솔리니는 영화에서 자신만의 리얼리즘 방법론으로 새로운 예수의 이미지를 창조하는가 하면, 바흐 모차르트의 종교음악 등을 삽입해 경건한 분위기를 연출해 냈다.

결국 영화는 영화평론가들로부터 종교적 영감을 가장 감동적으로 표현했다는 평가를 얻으며 파솔리니에게 베니스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국제 비평가협회 대상, 최우수 촬영상과 기독교 영화제 대상 등의 영예를 안겼다. 이 영화를 김지운 감독이 추천했다는 사실에 놀랄 이도 있겠으나, 그가 오래전부터 파솔리니에 대한 애정을 밝혀 온 감독임을 아는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것으로 보인다.

최동훈 감독이 추천하는 <바람에 사라지다> Written on the Wind
연출: 더글라스 서크 | 출연: 록 허드슨, 로렌 바콜| 1956년 | 99분 | 12세 관람가

최근 <전우치>의 흥행으로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는 최동훈 감독의 추천작은 1940~1950년대 할리우드 멜로영화를 이끌었던 더글러스 서크 감독의 <바람에 사라지다>다. <범죄의 재구성>, <타짜>로 대변되는 최동훈의 전작을 살펴보면, 그가 멜로영화를 추천했다는 게 다소 의외일 수 있으나, 그건 더글라스 서크를 몰라서 하는 말씀이다. 그는 단순한 통속극을 이데올로기적 비판의 도구로 승화시킨 대표적인 작가주의 감독이다. 석유재벌 2세 카일과 가난한 단짝 친구 미치, 카일 소유의 계열사 비서 루시와 카일의 여동생 마릴 리가 펼치는 애정관계를 담은 <바람에 사라지다>는 시나리오 상으로는 삼각, 사각으로 꼬인 구닥다리 멜로드라마에 불과하다.

하지만 서크는 놀라운 연출력이 더해지면 영화는 장르영화의 컨벤션을 전복시키고, 급기야 부르주아와 가부장적 문화에 날카로운 비판의 날을 세운다. 로버트 와일더의 통속 소설을 영화화 한 작품으로 멜로드라마의 선구적인 작품으로 기억되고 있다.

배우 안성기가 추천하는 <아마데우스> Amadeus (New 35mm 디렉터스 컷)
연출: 밀로스 포먼 | 출연: F. 머레이 에이브러햄, 톰 헐스| 1984년 | 160분 | 전체관람가

짐작컨대, 밀로스 포먼의 <아마데우스>를 통해 관객들이 발견하고, 감정이입하게 된 인물은,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 난 주인공 모차르트가 아니라, 그에 대한 ‘넘사벽’을 실감하며 일평생 질투와 열등감에 괴로워했던 안토니오 살리에르일 것이다. 특히 영화 마지막, “나는 보통사람들의 대변자”라고 고백하는 살리에르의 고독한 얼굴은 묘한 연민을 불러일으키며 그를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악당으로 만들었다.

피터 쉐퍼의 동명 희곡을 바탕으로 한 <아마데우스>는 살리에르의 고백을 통해 모차르트의 짧은 생애와 음악을 조명한 영화다. 1985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 최우수 작품상, 남우주연상 등 8개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번 영화제에서는 개봉 당시 삭제됐던 20분을 완벽하게 복원한 디렉터스 컷으로 상영된다. 배우 안성기가 추천하는 영화로 ‘살리에르 증후군’에 시달리는 이들이라면 주목하시길.

시네마테크가 추천하는 <사냥꾼의 밤> The Night of the Hunter (New 35mm 프린트)
연출: 찰스 로튼 | 출연: 로버트 미첨, 셀리 윈터즈| 1955년 | 92분 | 12세 관람가

개봉 당시에 엄청난 혹평을 받았다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재해석되고, 재평가를 받는 영화를 ‘저주받은 걸작’이라고 한다. 대표적으로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와 왕가위의 <아비정전>을 꼽을 수 있는데, 그나마 이들은 살아있을 때 재평가를 받았다는 점에서 행운아다. <사냥꾼의 밤>의 찰스 로튼은 살아생전 좋은 소리 한 번 못 들었다가, 사후에야 인정을 받았으니 말이다. 결국 찰스 로튼은 작품의 실패에 크게 낙담해 계획됐던 차기작 연출을 모두 포기했고, <사냥꾼의 밤>은 그가 연출한 처음이자 마지막 작품이 됐다.

참고로 찰스 로튼은 감독이기 이전에,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인기 배우다. 그러니 만약 <사냥꾼의 밤>이 당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았다면, 우리는 일찍이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같은 ‘명배우겸 명연출가’를 만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요괴라는 소재를 통해 인간의 선과 악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돈을 차지하기 위해 어린 남매를 쫓아다니는 로버트 미첨의 신들린 듯한 연기가 압권이다. 영국에서는 한 때 어린이들에게 보여줘서는 안 되는 X등급 영화로 평가되기도 했는데, 이번 영화제에서는 12세 관람가로 소개되니, 과거와 현재의 등급에 대한 상대적인 눈을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하다.

관객들이 추천하는 <항해자>The Navigator
연출: 버스터 키튼 | 출연:버스터 키튼, 캐트린 맥과이어 | 1924년 | 63분 | 12세 관람가

‘소녀시대가 제일 우월하네, 원더걸스가 더 지존이네’ 하는 논쟁보다 오래된 갑론을박이 있다. 바로 찰리 채플린과 버스트 키튼 중 누가 더 위대한 무성영화의 전설인가를 논하는 싸움이다. 국내에서는 (TV에 자주 등장하는) 찰리 채플린에 대한 선호도가 훨씬 높지만 이는 버스트 키튼에 대한 소개가 상대적으로 덜 이루어진 탓일 뿐, 영화사에서 그는 채플린 못지않은 지위를 점하고 있다. 찰리 채플린과 함께 슬랩스틱코미디 장르를 이끈 버스트 키튼은 ‘아크로바틱’한 스턴트 묘기와 영화적인 기교들을 이용해 당대의 사람들에게 큰 웃음을 안겼다.

동시에 웃음을 자아내는 상황에서도 표정이 전혀 변하지 않는 ‘그레이트 스톤 페이스’로 삶에 대한 묘한 페이소스를 전하기도 했다. 그런 버스트 키튼을 이번 영화제에서는 <항해자>를 통해 만날 수 있다. 오해에 휘말린 두 남녀가 '항해자' 호를 타고 망망대해에서 표류하게 되면서 겪는 모험을 그린 작품으로 장 엡스텡 감독의 <어셔가의 몰락>과 함께 ‘관객들의 선택’ 상영작으로 선정 돼 관객을 찾아간다.

존 포드 걸작전 John Ford Special

이번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는 1940∼60년대 할리우드의 서부영화 전성시대를 이끈 존 포드의 영화들이 ‘존 포드 걸작전’이란 이름으로 상영된다. 김영진 평론가가 추천하는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와 크리스 후지와라 평론가의 선택작인 <말 위의 두 사나이> 외에도, 1924년작 <철마>, 35년작 <굽이도는 증기선>, 39년작 <모호크족의 북소리>, 40년작 <분노의 포도>, 46년작 <황야의 결투>, 그리고 62년작인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와 48년작 <아파치 요새> 등 총 9편이 찾아간다. 서부극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는 그의 39년작 <역마차>와 56년작 <수색자>가 빠진 게 아쉽지만, 이 중 6편은 서울아트시네마 측이 '필름 라이브러리' 사업의 일환으로 직접 구입한 새 35mm 필름으로 상영될 예정이라니 존 포드의 팬들은 주목하길 바란다.

글_ 정시우 기자(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