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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전/마스무라 야스조 회고전

감정과 스타일의 정동의 변증법을 구축한 모더니스트, 마스무라 야스조


시대를 앞서간 모더니스트라 불리는 마스무라 야스조의 영화세계는 일본영화사에서 어떤 분기점을 이룬다. 미조구치 겐지, 오즈 야스지로가 일본적인 정신성을 대표하는 예의바름, 절제의 미덕과 그 안에 담긴 내적 슬픔을 우아하게 표상했다면, 마스무라 야스조는 생동하는 삶의 원초적인 충동과 욕망을 파격적으로 표출, 또 다른 일본성을 드러낸다. 이는 오시마 나기사, 이마무라 쇼헤이 등 일본 뉴웨이브 계열의 감독들에게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마스무라가 바라본 60년대의 일본은 치유될 길이 없을 정도로 병든 사회였고, 그의 영화에는 그러한 비관적 세계관이 담겨있다. 사회가 병들었고, 사람들의 감정이 병들었으며, 욕망은 뒤틀려있다. 그의 영화에서 전쟁과 관련된 시기를 살아가는 인물들의 욕망은 다른 욕망이나 공동체에 의해 억압되는데, 그 공동체란 집안, 마을, 혹은 국가이다. 군국주의 사회 속의 ‘전체를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희생됐던 개인의 삶과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억눌린 욕망들이 있고, 그 억압된 욕망은 어떤 방식으로든 일상을 뚫고 강렬히 분출된다. 또한 전후의 초기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인물들은 끝없는 성공을 꿈꾸며, 성적 욕망을 자유로이 표출한다. 이에 대한 과대망상적인 집착은 쉽사리 광기로 전이되고 그들 욕망의 충돌은 일종의 게임처럼 펼쳐진다.

이처럼 마스무라는 인간의 마성을 극단적으로 탐구한다. 특히 마스무라의 페르소나 와카오 아야코를 통해 자유롭게 표출된 여성의 욕망은 그 자체로 급진적이다. 아울러 사랑을 갈망한다. 그러나 그 사랑은 정신적 뒤틀림과 신체에 대한 페티시즘적 욕구에 의해 오염되어 있는, 병든 에로스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에로스는 결국 타나토스, 즉 죽음으로 이끌린다. 가령 <만지>의 부부는 “사랑만이 전부야. 죽는다 해도 후회하지 않을 거야”라며, 정말로 죽음을 향해 계속해서 나아간다. 마치 죽음만이 삶을 증명할 유일한 수단인 것처럼.

마스무라가 일본 영화계에서 이뤄낸 전복적 성취는 격정적 감정의 표출이 엄격하게 형식화된 미장센과 몽타주 스타일 속에서 정동의 변증법을 구축해낸다는 점에 있다. 오즈와 마찬가지로 그의 카메라는 고정되어 웬만해서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는 하나의 카메라 셋업으로 하나의 숏만을 찍고, 계속 셋업을 바꿔가며 360도 공간을 전면적으로 활용한다. 하지만 오즈와 달리 마스무라가 만들어내는 숏들의 프레이밍은 매우 탈중심적(파스칼 보니체가 말한 데카드라주 décadrage)이다. 

그는 시네마스코프 화면의 빈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리하여 파편화되고 잘려진 느낌을 갖게 되는 숏들의 몽타주로 구축되는 영화적 공간은 시각적이라기보다는 촉각적인 접속에 의해 구성되는 느낌을 준다. 이러한 엄격한 형식적 스타일 안에 놓인 인물들은 마치 움직이지 않는 카메라를 뚫고 나갈 것 같은 감정적 격동을 만들어내고, 그 감정들을 파편화해 다시 이어붙이는 몽타주가 강렬한 정동을 이룬다. 그리고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것처럼 마침내 카메라가 움직이는 순간, 그 감흥의 강렬함은 말할 것도 없다.

가령 <아내는 고백한다>의 마지막 순간 비틀비틀 파멸을 향해 걸어가는 여자의 발걸음을 따라가는 트래블링 숏이 그러하다. 또한 <만지>의 최종적 순간에 세 명의 인물이 기도를 하고 수면제를 먹고 나란히 누워 죽음을 기다릴 때, 불교의 여보살화를 따라 수직으로 이동하는 카메라의 상승과 하강은 삶과 죽음의 경계와 그 이행을 보여준다. (박영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