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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전/아녜스 바르다 회고전

가장 불행한 상실은 아름다운 계절을 잃는 것이다



이번 주 화요일부터 '아녜스 바르다 회고전'을 개최하고 있다. 원래대로라면 작년에 열렸어야 했던 회고전이다. 그동안 클레르 드니, 샹탈 애커만,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영화들을 소개했고 워낙 좋아하는 아녜스 바르다의 회고전은 일정을 미루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지난 해 드디어 10월에 회고전을 개최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 바르다의 영화를 상영하는 행사가 9월쯤에 열린다는 소식을 접했고, 일정상 양보하기로 했더랬다. 대신 21세기의 프랑스 영화들을 소개하는 특별전을 치르기로 했다. 다른 곳에서 바르다의 회고전이 열린다면 아쉽지만 그래도 기뻐하면서 보러 갈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약속과 달리 회고전이 열리지는 않았다. 그렇게 일년이 지났고, 바르다의 영화를 서울아트시네마의 스크린에서 소개할 수 있게 됐다. 어디서든 영화가 상영되는 것은 상관 없는 일이지만, 직접 좋아하는 작가의 회고전을 개최하게 될 때 그 기분은 꽤나 즐거운 일이다. 애커만을, 클레르 드니를, 뒤라스를 처음으로 소개할 수 있었던 것만큼 바르다의 좋아하는 영화들을 관객들과 만나게 하는 일은 그 자체만으로도 마음이 뛰는 일이다. 작품을 둘러싼 논의는 영화를 보는 이들, 그리고 평자들의 몫이기도 하다. 많은 작품들이 상영되기에 몇 작품을 추천해달라는 질문을 받기도 하지만, 그럴땐 대부분 바르다의 모든 영화를 보아주세요, 라 말하곤한다. 추천이랄께 딱히 없다. 다른 회고전들도 그랬지만, 알려진 작품이든 그렇지 않은 작품이든 시간이 나는 대로 바르다의 모든 영화를 만난다면 더더욱 좋은 일이다. 고다르의 <그녀의 생을 살다>에 나오듯이 일을 하는 이들은 영화를 볼 수 없는 것이 딜레마이긴 하지만, 그래도 시간 나는 대로 바르다의 영화를 보아주었으면 한다. 이런 건 홍보라기 보다는 못보는 사람이 손해야,라는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다.

다소 생소한 영화도 있는데, 이를테면 <시몽 시네마의 101일 밤>이 그러하다. 영화탄생 백주년을 맞아 만들어진 영화로, 생각보다 이 영화는 평자들의 논의에서도 전혀 소개되지 않았던 작품이다. 고다르의 <프랑스 영화의 역사 백년>의 경우가 자주 소개되지만(물론, 이 작품도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은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바르다의 영화는 거의 언급되지 않고 있다. 예전에 파리의 헌책방에서 정말 싼 가격으로(책방에 그 책이 잔뜩 먼지가 가득한 채 쌓여있더랬다) 이 영화와 관련한 스틸사진이 잔뜩 들어있는 책자 한권을 샀던 적이 있는데, 그러면서 필름으로 이 영화를 볼 궁리를 했었다. 나중에 영화를 보게 됐는데, 바르다의 이전 영화들에서의 비평적 태도보다는 펠리니식의 환상과 스펙터클이 많이 들어있는 대중적인(물론 영화상식을 지닌 시네필들에 그런 것이겠지만) 작품처럼 느꼈다. 많은 관객은 아니었지만 지난 수요일, 서울아트시네마의 상영회에서 관객들의 반응은 꽤 좋았다. 재미있는 영화다. 바르다가 생각하는 영화란게 어떤 것인가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고다르가 '작지만 보석같은 작품들'이라 말했던 단편들, 에세이 영화들을 좋아하는 편이다. 이 단편들은 정말 시간 날때마다 챙겨봐야 할 작품이다. 예전에 파리의 포럼 데 이마주에서 바르다의 단편들을 조금씩 볼 기회가 있었는데, 특히 여행단편들의 <해변에서>와 '시네바르다포토'에 실린 <율리시스>, <방 7, 부엌, 기타 등등>(이 영화는 부언하기 싫을 만큼 좋아하는 작품이다!), 그리고 파리지앵 단편들이 그러하다. 파리에는 건물의 외관에 다양한 조각상들이 있는데,그 조각상들을 다룬 단편, 그리고 시네마테크의 계단을 영화사를 장식한 다양한 영화들에서 발췌한 계단 시퀀스들과 연결한 <시네마테크의 계단>이 재밌었다. 사실 <시네마테크의 계단>을 조금 변형해 <서울아트시네마의 엘레베이터>란 시네마테크 홍보영화를 만들 생각도 있었다. 작년 말에 실행에 옮길 생각도 있었고, 다양한 영화들의 장면을 실제로 찾아놓고 있었다. 하지만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글쓰기도 그렇지만 역시 간절함이 있어야만 하는 법이다. 생각만 하고 실행은 하지 못했다. 이 아이디어를 얼마전 트위터에 올렸더니, 몇 사람들이 뜨거운 반응을 보였고 어쩌면 다른 이들이 만들지도 모를 일이다. <율리시스>에서 사진에 대한 바르다의 비평적 식견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고, <이란인의 사랑>에서 세속과 신성미술 사이를 오가며 커플의 사랑을 논할때, 그리고 장 비고의 <니스에서>를 떠올리게 하는 <해변에서>라는 단편에서 '모두의 꿈이라 할지라도 에덴은 우리 것이 아니다. 가장 불행한 상실은 아름다운 계절을 잃는 것이다'라고 말할 때, 그 바다들을 볼 때 여행을 떠나고 싶어진다.


바르다의 영화 중에는 기억과 역사를 다룬 영화들이 꽤 있는데, 단편 중에서도 테디 베어의 역사 수집가 이데사 헨델레스를 다룬 <이데사, 곰, 그리고 기타 등등>도 인상적이다. 공교롭게 올 해 광주비엔날레에서는 '테디베어 프로젝트'가 열리고 있는데, 바르다의 단편은 뮌헨에서 열렸던 그녀의 '테디베어 프로젝트'를 담고 있다. (이데사 헨델레스의 '테디베어 프로젝트'와 관련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고하면 된다 http://insidecanada.kr/114). '시네바르다포토'에 담긴 다양한 단편들은 사진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는데, 그 중에서 <율리시스>는 바르다의 이미지 비평의 식견과 세계에 감화를 받기에 충분한 작품이다. 1963년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를 방문해 혁명의 물결을 사진에 담은 <안녕 쿠바인들> 또한 작고 일상적인 영역에서 사회의 맥을 간파하는 그녀의 비평적 태도가 돋보이는 작품. 바르다는 정말 눈과 귀가 예민하고 섬세한 감독이다. 바르다는 리얼리스트라기보다는 초현실주의자라 말할 수 있는데, 특히 부뉴엘을 좋아했다. <시몽 시네마의 101일 밤>을 보면 부뉴엘에 대한 그녀의 숭배를 느낄 수 있다. 바르다는 <시몽 시네마의 101일 밤>에서 부뉴엘의 <황금시대>를 찬미한다. 고다르가 <프랑스 영화탄생 백주년>작에서 '생일 아닌 날을 축하'했다면 바르다는 백살 무슈 시네마의 망각과 부뉴엘적 아나키를 찬미한다. 왜 황금시대인가? <시몽 시네마의 101일 밤>에 언급되는 장면은 <황금시대>에서 세레모니가 열리는 가운데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순간이다. 바르다 또한 영화탄생 백주년의 세레모니를 비켜가려 했던 것 같다. 전복적이고,도발적이면서 시적인 부뉴엘의 영화. 라무르 푸의 찬미!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는 첫 상영을 금요일 저녁 7시에 한다. 왜 5시에서 7시인가? 무슈 시네마는 이 시간이 꿈같은 연인들의 시간이라 말한다. 그 꿈같은 연인들의 시간에 클레오는 발둥 그린의 회화의 여인처럼, 혹은 운명론자 자크처럼 파리의 거리를 쏘다닌다. '추하지 않다면 나는 살아있는 거야'라며. 이 영화 때문에 몽수리 공원을 찾았더랬다. 영화 속 클레오가 노래 부르던 나무 계단이 있는 오솔길을 걷기도 했다. 누벨바그의 아웃사이더였던(그녀는 카이에의 수다스런 영화광들과는 다른 경로로 영화에 입성했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녀의 장편 데뷔작인 <라 푸앵트 쿠르트로의 여행>의 편집을 알랭 레네가 했는데, 레네는 그녀에게 이런 식으로 이야기했다고 한다. 레네: 너의  작품은 비스콘티의 <흔들리는 대지>를 닮았어. 바르다: 비스콘티가 누구지요? <율리시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바르다는 장편 영화를 찍을때까지도 영화를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녀는 사진과 미술에 조예가 깊었고, 문학에 심취해 있었다. 바르다는 <라 푸앵트 쿠르트로의 여행>을 비스콘티, 혹은 자크 타티의 영화처럼 만들었는데 이전 영화들에의 영향력은 거의 없었다. 그녀는 차라리 이 영화가 윌리엄 포크너의 <야생종려나무>에 더 큰 영향을 받은 작품이라 말한다) 바르다는 이 영화에서 누벨바그리언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제작자는 고다르의 데뷔작 <네 멋대로 해라>의 제작자, 음악은 미셸 르그랑, 고다르-카리나가 또한 영화 속 영화에 출연했다.(고다르는 <그녀의 생을 살다>가 이 영화에 깊은 영향을 받은 작품이라 말한 바 있다)  재밌는 사실은 바르다가 이 영화를 미국에서 리메이크 할 생각을 했었던 것. 여주인공은 마찬가지로 유명 가수를 염두에 두었는데, 바로 마돈나였다! (계속)

글 /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