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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주앙 세자르 몬테이로와 친구들

[21세기 작가열전 비평좌담]“픽션과 역사를 마주보게 하는 영화" 21세기 작가열전 - 미구엘 고메스의 <타부>

“픽션과 역사를 마주보게 하는 영화"

21세기 작가열전 - 미구엘 고메스의 <타부>


 

“몬테이로와 그의 친구들” 영화제가 한창인 5월 19일, 미구엘 고메스의 <타부>를 두고 비평좌담이 열렸다. 이 자리는 한국에 많이 알려지지 않은 21세기의 작가들을 매달 소개하는 연속 프로그램으로 5월에 소개한 미구엘 고메스는 최근 주목을 받고 있는 포르투갈의 신예 감독 중 한 명이다. 미구엘 고메스의 영화 전반에 대한 이야기, 무르나우와  <타부>의 관련성, <타부>의 특이한 2부 구성, 포르투갈 영화의 현재에 대한 다양한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비평좌담의 일부 내용을 소개한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 지난해 <타부>를 통해서 미구엘 고메스의 영화를 뒤늦게 보았다. 다른 분들은 미구엘 고메스를 어떻게 처음 알았는지 궁금하다. 어떤 점에서 그를 우리 시대의 시네아스트로 생각하고 있나?

 

유운성(영화평론가) : 미구엘 고메스는 영화를 열심히 보는 사람들에게도 잘 소개되지 못했다. 2008년 충무로영화제에서 그의 두 번째 장편인 <우리들의 아름다운 8월>을 처음 상영했다. 이때 그의 영화를 본 사람이 미구엘 고메스가 페드로 코스타 이후 가장 훌륭한 포르투갈 감독으로 성장할 것 같다고 이야기하길래 제천음악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봤다. 그후 DVD를 통해 그의 전작들까지 보고 나니 왜 이 감독이 중요한 감독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포르투갈 영화 특유의 멜랑콜리한 부분을 간직하면서도 유머러스한 측면이 있었다. 이런 면에서 포르투갈 영화의 새로운 길을 열어준 게 아닌가 싶다. 역사와 영화사를 가로지르면서 자기 세대의 감수성에 의존해 유희적으로 작업하는 독특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용철(영화평론가) : 처음 영화제용 스크리너를 통해 <타부>를 볼 때만 해도 이 영화가 별로였다. 하지만 극장에서 영화를 보면서 생각을 바꿨다. 오늘 스크린으로 보신 분들은 눈치챘겠지만 영화의 1부와 2부의 매체가 다르다. 1부는 35mm로, 2부는 16mm로 찍었다. 이걸 DVD로 보니 전혀 알 수 없었던 거다. 영화는 방금 찍은 장면을 지금 보아도 결국 과거의 기록일 수밖에 없다. 이런 면에서 영화의 본질은 낭만성이나 향수와 관련되어 있다. 미구엘 고메스는 영화의 본질적인 측면에 대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다. 하지만 이것을 마주할 때 현실이나 역사를 끌어들인다. 자기가 기억하고 있는 낭만적인 것과 현실의 역사를 마주보게 할 때 전혀 다른 모습이 형성된다. 그의 영화에서 픽션과 역사는 마주보는 거울과 같다. 그래서 이 감독의 영화에서 서사와 현실, 혹은 서사와 역사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유운성 : 영화의 1부와 2부가 매체를 달리할 때 느껴지는 간극이 커서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단지 이런 것 때문만은 아니다. 7-80년대 태어난 감독들의 영화들 중 매체에 대한 민감함이 강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 흔히 쓰는 방법처럼 과거는 흑백, 현재는 컬러로 처리한 뒤 과거가 현재에 영향을 끼치는 것과는 다르다. 특히 라야 마틴이 8mm나 16mm, 그리고 비디오 등을 활용하는 방식을 보면 과거의 방식과는 확실히 다르다는 느낌을 받는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것보다 비디오나 TV를 통해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세대의 영화 관람 경험이 그들이 만든 영화에도 드러나는 것이다.

 

<타부>의 2부는 대사가 소거된 영화다. 나레이션, 사운드, 음악은 있는데 유독 대사 사운드만 없다. 여기에서 영화를 통해 역사에 접근하는 것의 윤리적 입장을 읽을 수 있다. 현재는 35mm 필름을 통해 세밀하게 묘사할 수 있다. 하지만 과거는 상상할 수만 있고 어떤 이야기를 주고 받았는지까지 알 수 없다. 바로 그 불명확함을 16mm 필름과 대사 소거로 묘사한 것이다. 2부에서 우리는 과거의 인물들이 어떤 대화를 했는지 결코 알 수 없으며 단지 이미지로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16mm로 촬영한 것이나 무성영화적 스타일로 연출한 것이 단순히 시네필적 회고 취향이 아니라 역사에 다가가는 자세를 진지하게 고민하며 나온 결과라고 생각한다. 식민 시기와 전쟁을 경험해 보지 못한 세대가 역사를 다루는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김성욱 : 두 번째 이야기로 넘어가서, 고메스의 <타부>는 무르나우의 <타부>(1931)와 제목도 동일하고 구성이나 느낌도 비슷한데 어떤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나.


이용철 : 1931년에 무르나우가 로버트 플레허티와 공동으로 작업한 <타부>와 미구엘 고메스의 <타부>는 표면에 드러나는 연결점도 있지만, 정말 흥미로운 점은 등장인물들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프롤로그에서는 원주민들이 탐험가를 바라보고, 1부의 주인공은 극장에서 또 무언가(아마도 프롤로그)를 본다. 그리고 2부는 그 자체가 타자의 시선을 전제로 한다. 흔히 과거가 현재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지만 고메스의 영화는 그렇지 않다. 현재와 과거가 마주보는 거울로서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 특히 과거가 현재에 영향을 주는 게 아니라 현재가 과거에 영향을 준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는 먼저 1부에서 쓸쓸하게 죽어간 노파를 보고 2부에서 그녀의 과거를 본다. 과연 이것이 실낙원인지 낙원인지 계속해서 질문하며 능동적으로 개입하게 하는 것이다. 이 부분이 영화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다.

 

고메스는 초기 영화에서 자기 영화의 양 축을 명확하게 밝힌다. 하나는 1930년대에 나온 영화 <오즈의 마법사>이고 또 하나는 1974년의 카네이션 혁명이다. 그의 단편 <31 Means Trouble>은 <오즈의 마법사>와 포르투갈의 정치적 현실을 직접적으로 연결해 언급한다. 이런 면에서 고메스는 현실에 매몰되어 낭만적인 것을 비판하는 감독도 아니고 낭만에 빠져서 현실과 역사를 무시하는 감독도 아니다. 그는 <오즈의 마법사>의 판타지와 카네이션 혁명이라는 현실의 역사, 이 두 개의 축 사이에 있다.

 

유운성 : 카네이션 혁명은 공식적으로 포르투갈 독재체제에 종식을 가한 혁명이지만 미구엘 고메스의 <타부>나 몬테이로의 <여정>, 페드로 코스타의 <행진하는 청춘>은 카네이션 혁명에 기이한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한다. 이 혁명이 민주화 혁명인 건 사실이지만 당시 포르투갈에 거주하던 흑인들에게는 재앙이기도 했다. 식민지 출신의 흑인들은 혁명 이후 하루아침에 포르투갈 국민에서 무국적 이주노동자가 된 것이다. 포르투갈 내에서 이렇게 영화적이고 함축적인 방식으로 혁명에 문제를 제기하는 영화들이 많아지고 있다. <타부>는 보수적이거나 노스텔지어적 영화로 보일 수도 있지만 이런 복잡성을 하나씩 검토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용철 : <타부>는 마르그리트 뒤라스나 클레르 드니처럼 식민지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식민지의 경험을 영화로 만든 것과 확연한 차이가 있다. 고메스는 식민지 경험이 없지만 식민지 경험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자신이 알고 있는 현실을 다룬 1부는 일(日) 단위로 전개한다. 하지만 자신이 경험해 보지 못한 식민지 시기를 다루는 2부는 월(月) 단위로 전개한다. 자기가 책임을 질 수 없는 2부와는 달리 현실의 리스본을 다룰 때는 섬세하게 접근하는 것이다. 윤리적 측면에서도 많은 걸 시사한다. \

 

김성욱 : <타부>의 2부 구성은 미구엘 고메스 감독이 자주 택하는 방식이기도 하지만 최근 영화들의 주목할 만한 경향이기도 하다. 여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유운성 : 베를린영화제 감독주간 집행위원장인 올리비에 페레가 <폴리스맨>(나다프 라피드)이란 영화를 보고 클로드 샤브롤의 <둘로 잘린 소녀 The Girl Cut in Two>를 언급해 ‘둘로 잘린 영화(Film Cut in Two)’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다. 단지 플래시백이나 옴니버스 수준이 아니라 서사적으로 느슨하게 연결된 채 급격하게 절단되는 순간을 구조적으로 차용한 영화에 쓴 말이다. 아핏차퐁 위라세타쿨의 <친애하는 당신>과 <열대병>, 울리히 쾰러의 <수면병>, 스와 노부히로의 <유키와 니나>, 김경묵의 <줄탁동시> 같은 영화도 이런 경향을 보여준다. 이런 영화들은 앞과 뒤가 분리된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연결된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밸런스가 맞지도 않고 어떨 때는 러닝타임의 차이도 크다. 올리비에 페레에 따르면 이것이 현대적인 영화를 가늠하는 지표가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영화의 출발점이 히치콕의 <사이코>라는 이야기도 한다. 특이한 견해이지만 다시 생각해 볼 만한 문제이다. 단지 서사의 문제가 아니라 매체와 스타일의 문제이다. 이런 시도를 감행하는 감독들은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요소들을 영화 안에 공존시키려 한다. ‘둘로 잘린 영화’ 안에서 비영화적이라고 불리는 것, 이질적이라고 불리는 것, 시대착오적인 것이라고 불리는 것을 병치시킬 때 감독들이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김성욱 : 초기 영화에 대한 언급 중 ‘크레이지 머신’이라는 표현이 있다. 이는 영화의 다중적 성격에 대한 언급이기도 하다. <사이코>는 외관상으로 구별할 수 없는 다중인격적인 존재를 그리는데 이런 측면에서도 ‘둘로 잘린 영화’와 관계가 있겠다. 혼란스러운 사회에서 영화가 다중인격적인 존재를 표현할 때 영화 자체도 다중인격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최근의 포르투갈 영화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포르투갈에는 마누엘 데 올리베이라나 주앙 세자르 몬테이로 같은 뛰어난 작가들이 있었고, 최근 몇몇 젊은 작가군이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는 것 같다.

 

유운성 : 90년대는 올리베이라, 몬테이로, 코스타 같은 감독들이 주목받았다. 그리고 새로운 포르투갈 감독들에는 20세기 말에서 21세기 초에 데뷔한 미구엘 고메스, 주앙 페드로 로드리게스, 주앙 니콜라우 같은 감독들이 있다. 포르투갈 영화를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우울함, 멜랑콜리, 패배감, 암흑 같은 단어들일 텐데 요즘 감독들은 여기에서 유희적인 측면들을 끌어낸다. 최근 포르투갈 영화의 이런 경향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 <타부>이다. 포르투갈의 감독들은 항상 뒤를 보면서 앞으로 가는 사람들이다. 100년 이상을 끌고 왔던 영화사적 유산을 굉장히 소중하게 생각하며, 이를 모르면 만들 수 없는 영화를 만든다. 사실 현재는 인간이 영화를 보는 시대가 아니라 영화가 인간을 보는 시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포르투갈의 감독들은 이런 환경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을 스스로 자각하고 있다. 비평적인 고민을 함께 하는 것이다.

 

이용철 : 중요한 것은 포르투갈의 감독들은 자국의 자본으로 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유럽 전체에 걸쳐 있는 펀드를 통해서 영화를 찍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힘든 환경에서 영화를 찍으면서도 좋은 영화를 찍는다는 것이 주목할 만한 것 같다. 이런 점에서 아까 이야기한 <오즈의 마법사>의 ‘오버 더 레인보우’가 중요하다. 무지개를 찾아서 갔는데 무지개가 없더라도 다시 무지개를 찾아 떠나는 것이다.


 

정리│최혁규 관객에디터

사진│곽혜원 자원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