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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를 만나다

“지금까지 내 작업은 우연을 포착하는 과정이었다”- <열정> 상영 후 하마구치 류스케 시네토크

하마구치 류스케(감독)

하마구치 류스케(감독) <열정> 이후 10년간의 내 작업을 요약하면 ‘우연을 포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두 개의 장면을 예로 들고 싶다. 먼저 남자가 여자에게 고백하는 후반부의 장면을 보자. 남자는 여자에게 고백을 한 뒤 기뻐하며 여자의 주위를 돌다가 다시 여자에게 돌아온다. 이때 트럭이 뒤에서부터 두 사람에게 다가오는데, 이건 정말 우연히 찍힌 장면이다. 트럭이 프레임 인해서 여자에게 다가오고, 여자가 프레임 아웃할 때 트럭도 유턴해서 같은 방향으로 프레임 아웃한다.

 

우연히 찍힌 장면

이 장면을 어떻게 찍었는지 자세히 설명해보겠다. 일단 이 롱테이크는 두 번 찍었고, 영화에 들어간 건 두 번째 찍은 테이크다. 원래 의도는 일출, 즉 10분 정도의 매직아워 시간에 찍는 것이었다. 새벽은 하루에 한 번만 오는 것이니 무조건 한 테이크에 촬영을 끝내야 했다. 그래서 원래는 그렇게 하지 않는데 이 장면을 찍을 때만 배우에게 동선을 구체적으로 지정해주었다. 여기쯤 멈춰서 대사를 해야 한다, 이런 지시였다. 다음 날 다시 찍을 여유가 없어서 타협을 해야만 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첫 번째 테이크가 정말 멋있게 찍혔다. 날이 서서히 밝아오는 것에 맞게 배우의 감정이 고조되는 순간이 매우 아름답게 그려졌다. 그런데 배우의 움직임이 조금 신경 쓰였다. 아무래도 배우의 움직임을 세세하게 지시해서 그런지 움직임이 좀 딱딱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찍기로 했다. 날은 이미 밝아졌지만 여전히 뒷 건물에 햇빛이 서서히 비치는 장면을 찍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번에 찍을 때는 배우들에게 좀 더 자유롭게 움직여달라고 했고, 카메라는 망원렌즈를 써서 배우들과 수십 미터 떨어져 있었다. 배우들이 더 편안하게 연기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촬영을 시작했는데, 갑자기, 프레임 밖에서 트럭이 들어왔다. 모니터로 이를 보고 있다가 너무 깜짝 놀랐다. 알고 보니 이 부두는 장거리 트럭 운전사들의 휴식 공간이었고, 날이 밝자 일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건 NG라고 생각한 나는 당연히 첫 번째 테이크를 쓰기로 했다.

두 번째 테이크의 가치를 깨달은 건 편집할 때였다. 다시 보니 트럭이 화면에 들어오는 순간이 마침 여자가 남자의 고백을 거절하는 순간이었고, 트럭의 움직임과 여자의 떠나는 몸짓이 완전히 링크된 것처럼 보였다. 또한 배우들은 세로로 움직이고 있었는데 트럭은 수평으로 프레임 인한다. 그러면서 리듬이 바뀌고 여자의 심정이 바뀌는 것과도 정확히 일치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는 내가 의도한 게 아니었다. 나 역시 관객의 한 사람으로 뒤늦게 발견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두 번째 테이크를 썼고, 이는 첫 번째 테이크에 찍힌 빛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두 번째 테이크의 순간적 강렬함을 택한 결과였다. 또한 이 테이크에는 세상에 단 한 번밖에 없는 순간이 포착되어 있었다. 우연이기는 했지만 자연스러운 연기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얻은 장면이라 더욱 소중했다.

이후 <열정>은 비교적 좋은 평가를 받았고 해외 영화제에 초대를 받기도 했다. 내 영화 경력의 본격적인 첫 걸음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인터뷰에서 ‘트럭 장면은 어떻게 연출한 거냐?’란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그때마다 부끄러웠다. 우연히 그렇게 찍었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놀랐고 심지어 ‘영화의 신이 내려왔다’는 말까지 들었다. 좋은 평가를 받은 장면이 내 의도적인 연출이 아니라는 점에서 일종의 부채 의식 같은 것도 있었다. 원래 실력 이상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다만 이 ‘우연의 숏’으로 인해 누군가에게 배운 게 아니라 나 스스로 영화의 연출을 배운 것 같다는 기분은 느꼈다. 그건 바로 ‘우연의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었다. 우연의 순간과 마주하는 건 ‘목격자의 감각’을 갖는 것이다. 그렇기에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조형 예술이 아닌 영화가 만들 수 있는 가장 고유하고 강렬한 순간이 이런 우연의 순간이라 생각했다. 나는 첫 번째 테이크와 두 번째 테이크 중 무엇을 선택할지 고민했고 이 과정에서 이런 배움을 얻었다. 어떤 영상의 아름다움도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무언가와 마주치고 말았다는 감각에는 비길 수 없는 것 같다. 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어떤 순간을 놓치지 않고 기록하는 것이 카메라라는 기록 장치의 본질에 가장 맞는 것이라고 느꼈다.

 

우연의 아름다움

이제 감독인 내가 할 일은 나의 연출로 이 우연을 포착하는 것이다. 운에 맡기지 않고 운을 만드는 것. 더 구체적인 얘기를 하기 위해 두 번째 장면을 예로 들겠다. 이 마지막 장면에서는 대화를 나누는 두 남녀의 시선이 거의 서로 마주치지 않는다. 그런데 어느 순간 두 배우가 그렇게 미리 정하지도 않았는데, 서로 마주보는 게 아니라 같은 곳을 함께 바라본다. 두 남녀의 기억이나 감정이 연결된다는 뉘앙스가 생겨났다.

<열정>을 찍기 전에는 배우들의 연기를 꼼꼼하게 지도했었다. 마주 보라든지, 다른 곳을 보라든지 등 모든 걸 다 지시했었다. 그런데 <열정>을 찍을 때는 이런 방법을 반성한 뒤 의도적으로 연출 방법을 바꾸었다. 배우들에게 연기 지도를 세세하게 하면 기본적으로 배우들의 자유로운 감각이 무뎌진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수준으로 배우의 감정이 올라오지 않았다. 이걸 안 뒤로 나의 우선 순위는 화면 구성이 아니라 배우의 감정을 명확하게 표현하는 것이었다.

방금 이야기한 마지막 장면은 배우들의 자발적인 감정에 의해 만들어진 순간이다. 내가 원하는 걸 이상적인 형태로 만들기 위해서는 첫 번째로 내 손에 쥔 걸 놓아야 한다는 걸 느꼈다. 이는 계획을 전혀 세우지 않는 것과는 다르다. 원하는 게 일어날 수 있도록 미리 최선의 준비를 해야 하지만, 마지막에는 그냥 일어나는 대로 놔둘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한다고 항상 바라는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원하는 건 얻을 수 없다. 몇 번이고 반복할 수 있는 무언가를 추구하는 게 아니라 단 한 번만 일어나는 그 무언가를 마주하는 감각. 이런 일은 오로지 우연을 통해서만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우연적 요소가 있어야 비로소 그 자리에서 삶 자체가 펼쳐지는 것 같은 감각이 발생한다.

두 번째로는 우연을 어떻게 화면에 정착시킬지 고민해야 한다. 두 번째 장면을 예로 들면, 두 사람이 서로 동조하는 순간, 그 관계가 가장 잘 드러나는 곳에 카메라를 두고 기록해야 한다. 첫 번째 장면에서도 카메라가 배우와 트럭을 링크시킬 수 있는 곳에 서있어야 한다. 이런 감각은 카메라의 위치가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사라져버린다. 우연은 영어로 coincident이다. incident의 뜻은 사건이니 두 가지 사건이 동시에 발생하는 걸 co-incident, 즉 우연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내가 바라는 건 본래 아무 상관이 없는 사건이 동시에 일어나는 순간을 영화에 아로새기는 것이다.

이런 내 나름의 교훈을 발전시킨 게 지난 10년간 나의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만든 <심도>나 <친밀함>의 라스트 신에서는 자동차나 전철이 서로 교차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는 <열정>의 트럭 장면을 내 나름대로 발전시킨 버전이라고 봐도 좋다. 그리고 다큐멘터리인 <파도의 목소리: 신치마치>의 마지막 장면에도 우연히 벌어진 사건이 담겼고, 이를 <아사코>에서 다시 한 번 시도하려 했다. <해피 아워>에서는 더 작은, 아주 보잘 것 없는 우연들을 발전시키려 노력했다. 이 영화를 찍으면서 영화는 기본적으로 관객을 설득시키기보다는 관객에게 발견되는 게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우연을 만들어내는 연기 연출

이때부터 내 문제는 더 이상 이 숏을 어떻게 찍을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배우를 캐스팅해 어떻게 연기 지도를 할 것인가로 바뀐다. <열정>의 마지막 장면에서 배우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낸 감정을 포착하는 순간과 같은 장면을 계속 만들려 하는 게 <해피 아워> 이후 내가 하고 있는 작업이다(<해피 아워>에 대해서는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것」이란 책을 직접 쓰기도 했다). <해피 아워> 때는 <장 르누아르의 연기 지도(La direction d'acteur par Jean Renoir)>(지젤 브란베르거, 1969)라는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이탈리아식 대본 리딩’을 내 방식대로 응용했다. 장 르누아르는 배우들이 아무 감정 없이 전화번호부를 읽듯 대본을 읽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각본을 덮은 상태에서도 시나리오의 대사를 문자 그대로 아무 감정 없이 자동적으로 읽을 수 있도록 연습을 반복했다. 이 상태가 되면 배우의 목소리에 무게감이 더해지고 흔들림 없이 대사를 소화하게 된다. 그리고 현장에서는 연기자의 동선을 최대한 간단한 수준으로 제안하고, 리허설까지도 감정 없이 대사를 말하게 한다. 하지만 이후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갈 때는 그 자리에서 받은 느낌과 감정에 바로 즉각적으로 반응해달라고 주문한다. 나머지는 모두 연기자에게 맡긴다. 이렇게 연출한 작품이 <해피 아워>와 <아사코>다. 배우들의 감정을 우연 속에서 포착하기 위해 택한 방식이다.

텍스트와 배우 사이에는 원래 아무 관계가 없다. 배우는 일이 아니라면 그 텍스트를 굳이 말할 내적 필요가 없다. 서로 관계가 없는 배우와 텍스트. 이 두 요소 사이에 우연의 일치(coincident)가 생겼을 때 감독은 이를 포착할 준비를 해야 한다. 어쩌면 미리 정해진 대사를 우연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요소로 볼 수 있겠지만, 내 경험상 소위 애드립은 연출자나 각본가의 역할을 배우에게 강요하는 연출이다. 애드립은 배우가 스스로 안심할 수 없는 상태에서 연기하게 만든다. 배우에게 즉흥이 아닌, 자동적으로 대사를 말하게 함으로써 오히려 대사의 감정에 더 집중하게 할 수 있고 나아가 즉흥적으로 감정을 표현하게 할 수 있다. 나도 잘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텍스트를 계속 집중해서 보고 읽다 보면 저절로 의미가 열리는 순간이 있다. 이 의미가 배우의 신체에 작용을 하기 때문에 배우의 감정에 영향을 준다. 내가 배우의 연기를 카메라로 찍을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배우의 신체에 우연히 일어나는 일을 포착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극영화는 배우의 신체에 관한 다큐멘터리라고 볼 수도 있다. 배우는 픽션의 캐릭터가 아니라 그/그녀의 매력을 가진, 실제로 존재하는 한 사람이다.

그래서 캐스팅이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해진다. 나는 <해피 아워>와 <아사코>의 배우들이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인상을 받았다. 어떻게 보면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이 연기를 잘하는 배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에게 내재된 인품의 솔직함이 내게는 매우 중요했다. 나는 텍스트에 대한 그들의 솔직한 반응을 원했다. 리딩 당시 연습했던 무감정의 톤에 익숙했다가 처음으로 카메라가 돌아가는 순간 배우 자신의 의도를 넘어선 감정이 발생한다. 그런 의미에서 <열정> 이후 지난 10년간의 작업은 내가 바란 우연을 손에 넣기 위해 그 정밀도를 높여가는 작업이었다고 본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연출 방식을 고착시키는 게 내 영화 세계를 좁히는 건 아닐까란 생각도 하고 있다. 다음에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을 시도할지도 모른다. 만약 실패하더라도 앞으로 10년간 다른 작업을 하다 보면 또 다른 수준의 작품이 나올 것이니 따뜻하게 지켜봐주면 좋겠다.

 

일시 2019년 6월 1일(토) 오후 6시 30분

정리 김보년 프로그래머

사진 강의영 자원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