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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작은 영화의 조용한 반란

“애도는 상처를 바라보게 하는 형식이다”

다시 태어나고 싶어요, 안양에박찬경 감독 GV 현장스케치


지난 11일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박찬경 감독의 첫 장편영화 <다시 태어나고 싶어요, 안양에> 상영되고,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 시간을 가졌다. 안양 공공 예술 프로젝트로 지난 해 탄생한 영화 <다시 태어나고 싶어요, 안양에>는 안양이라는 도시를 입체적으로 조명하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비춘다. 다큐멘터리와 픽션이 뒤섞인 독특한 형식 속에 담긴 잊혀진 이야기들을 박찬경 감독에게 직접 들을 수 있었던 그 현장을 전한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전체적으로 두 가지의 사건이 주를 이룬다. 88년 그린힐 화재 사건과 안양천 수재 사건이다. 물과 불이라는 두 가지 사건이 안양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특정하게 이 부분을 다뤄야겠다고 생각했는지 궁금하다.

박찬경(영화감독): 안양이라는 도시는 80년대 중반 대학에 다닐 때 여공들이 밀집해있던 도시로 기억된다. 안양이 큰 도시가 된 것은 6,70년대 여공들의 경공업 단지 덕분이다. 그 중 88올림픽 시절 그린힐 화재 사건이 여러 사람들에게 중요한 사건이었는데 잊혀져 있었고, 다루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물과 불이라는 우주적이고 기본적인 요소를 택한 것은 영화 전체의 냄새와 색깔, 어조가 무속 신앙과 전통 문화와 관련되게 만들려 했기 때문이다.

김성욱: 안양이라는 이름과 공간지리적인 기원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온다. 옛 안양사를 발굴하는 장면은 영화를 찍을 당시에 실제 발굴이 있었기 때문에 선택한 것인가.

박찬경: 안양의 어원이 안양사에 기원한다는 것이 향토사학자들의 의견이다. 안양사 옛 터는 당시 실제로 발굴되었다. 3개월 동안 안양에서 실제로 일어난 중요한 일들, 선거나 안양사 발굴 같은 일들을 따라다니면서 카메라에 담았다. 3개월이라는 단시간에 최대한 담아내야 했다. 짐승 같은 태도로 덤볐다.

김성욱: ()이라는 한자어에 대한 뜻풀이를 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여성이 머리에 갓을 쓴 형상인 안()을 포함해서 88년의 여공 이야기 등 전체적으로 여성을 중심으로 하는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처음 프로젝트 제안을 받았을 때부터 염두에 둔 것인지 궁금하다.

박찬경: 첫 장편 다큐멘터리였고 의도적으로 남자에서 벗어나고자 한 것은 사실이다. 여공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도시를 여성적 시각으로 만들고 싶었다. 우연히 안양의 안()자가 재미있는 글자이기도 했다.


김성욱: 영화 <시민 케인>이 떠오르기도 했다. <시민 케인>의 로즈버드처럼 기원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할머니나무다. 영화 속에서 몇 번 등장하는 할머니나무를 영화 속 스태프들은 결국 찾지 못했다. 영화에서 강조되는 것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불확실성이 영화에 등장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찬경: 파라다이스를 찾아가는 과정을 염두에 두기도 했다. 교통건축 영화, 도시의 이모저모를 입체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전체를 관통하는 줄거리상의 목표는 찾아 다니는 것이다. 어떤 것은 찾기도 하고 어떤 것은 못 찾는다. 마지막에 나타나는 나무는 실제의 할머니 나무다. 극중 인물들이 찾았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그러한 게 있다는 것을 나름 보여준다. ()자가 새겨진 기와 역시 실제로 발굴되었다.

김성욱: 산행 장면이 재미있다. 갑자기 지팡이가 날라와 꽂힌다던가, 술에 취한 상태, 산속에서 보게 되는 마네의 풀밭 위의 오찬 같은 구도 등. 산에 올라가는 설정 자체가 특이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박찬경: 산이 안양에 기원한 장소이기도 하고 무속에 관한 게 많이 나오니까 지리적으로도 중요했다. 산을 보여주는 방식에 대해서 생각했다. 한국의 산이라는 것은 중년의 남녀들이 소주와 삼겹살을 먹으면서 불륜을 저지르는 퇴폐적 장소이자 한편으로는 성스러운 장소다. 성과 속이 급격하게 연결되는 구조를 만들고 싶었다. 누드가 나오는 장면은 마네의 그림에서 차용한 것이다. 당대 마네의 그림이 동시대 문화에 대한 자신감인 것처럼 산 위에서 이루어지는 중년의 만남 또한 한국에 있는 일종의 속된 파라다이스가 아닌가 싶다.

관객1: 감독님의 기존 작품도 그렇고 이번 작품에서도 생로병사나 무•불가적 코드, 전통적 코드가 많다. 아무래도 그런 소재로 작업을 하려면 특별한 영적인 경험이나 계기가 있을 것 같다.

박찬경: 특별히 관심을 가지게 된 시기는 있다. 겨울 눈 덮인 계룡산에 간 적이 있었는데 충격을 받았다. 그 감정이 뭔지 고민하고 찾아보았다. 숭고라는 경외심이 굉장히 보편적인 감정이고 미술, 문학, 영화 등에 많이 퍼져 있다는 것을 공부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흥미롭고 넓은 영역이라서 관심을 키워왔다. 경외나 숭고 중에서도 하필 왜 무•불가적이냐고 묻는다면 공부를 하다가 이렇게 된 것 같다. 지역적이고 토착적 체험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근대성을 설명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요소가 억압을 받은 민간신앙, 무속이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관심을 가질 만한 가치에 비해서 현실이 따라주지 못하고 있다고 느꼈다.

김성욱: 인터뷰나 픽션 장면과는 다른 방식의 카메라 워크가 보인다. 미술관에서 여성들을 따라다니는 장면이나 처음 안양사가 나오는 장면에서 인간적인 시선 같지 않은 느낌의 카메라 움직임 장면이 몇 개 있었다.

박찬경: 카메라 워크가 자유로워지길 바랐다. 영화 전체가 강박에 시달리지 않기를, 스토리 중심이기보다는 보는 사람을 관찰자 입장에 두고 싶었다. 마지막에서 미술관을 훑는 것은 그림 속 그들이 우리 사이에 섞여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또한 미술관에서 좀 벗어나고 싶다는 개인적인 뜻도 있다.

관객2: 아트시네마에서 있었던 지난 번 감독님 GV 때도 그렇고 이번 역시 봉제 공장 여공들에 대한 추모 같다고 생각이 든다. 영화 속 소설가의 대사, 끔찍한 부분을 생생하게 재현하지 않는 게 좋다는 생각에 감동을 받았다. 감독님의 끔찍한 사건의 영화적 재현과 추모에 대한 생각이 궁금하다.

박찬경: 리얼리즘 영화는 아니다. 세세하게 보여주기보다 생각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당시 화재 사건의 자료를 구했다. 끔찍한 장면들이 많았다. 소설 속에서도 끔찍한 묘사가 있다. 그런 것들이 현재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정적 리얼리즘과는 거리를 두는 게 좋겠다 생각했다. 영화의 형식 속에서 질문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관객3: 배우들이 머리를 감겨주는 장면이 두 번 나온다. 앞서 사무실에서 한 번, 그린힐 화재를 재현한 뒤에 또 한 번 있었다. 무슨 의미인지 궁금하다.

박찬경: 자매애를 표현하고 싶었다. 머리를 감겨주는 일은 사람과 사람이 친근해졌을 때 할 수 있는 몇 가지 안 되는 행동 중의 하나, 인간과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앞과 뒤가 좀 다르다. 뒤는 산사람이 죽은 사람의 머리를 감겨주는 일종의 제의적 행동이다. 어떤 형식으로 애도할 수 있느냐가 항상 개인적 질문이다. 가장 해야만 하는 일은 과거에 대한 좋은 애도라고 본다. 두 번째 머리를 감겨 주는 행동이 귀신처럼 보였으면 했다.


김성욱: 88년의 사건이 포토 몽타주처럼 재현되었다. 영화 초반에 영화는 정지된 것을 움직이면 된다는 대사가 나오는데 정지된 사진과 재현된 움직임의 색깔 톤이 바뀐다. 전체적으로 볼 때 영화 제작 과정을 보여주는데 스토리상에서 볼 때 이 영화가 과연 만들어졌을지 아닌지 궁금하다. 전체적으로 영화에 대한 감독님의 생각이 많이 투영된 듯 하다.

박찬경: 3개월이라는 짧은 시간에 안양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야 했다. 안양에 살지도 않고, 많이 알지도 못했기 때문에 제작의 과정을 정직하게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큐멘터리도 아니고 픽션도 아닌 영화 형식은 평소에 가지고 있던 생각이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관객들에게 과정상의 변화 같은 것들을 그대로 노출하겠다는 의지가 있었다. 실제로 영화가 진행되면서 스텝들이 찾아가는 것과 실제 스텝들의 진행이 거의 같다.

관객4: 일반적으로 점집이나 무당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파란만장을 봤을 때 깜짝 놀라면서도 이해하고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 영화도 그런 것 같다. 이 시대에 대한 어떤 치유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영화를 찍으시는지 궁금하다.

박찬경: 치유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 상처가 더 벌어지고 심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치유라는 말은 너무 쉽다. 상처를 정확히 이해하고 볼 수 있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애도는 상처를 바라보게 하는 형식이라고 생각한다. 무속이 무섭다고 하셨는데 종교는 모두 무서운 것이다. 무서움이란 대부분의 종교에서 가지고 있고 보편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성욱: 두 명의 소설가가 등장한다. 한 명은 실제 소설가이고 한 명은 소설가를 연기하는 배우다. 두 명을 등장시킨 것이 특이하다. 각각의 여성들을 더블화하고 있다. 머리를 감겨주거나 비디오를 보는 장면, 산에서 둘이 마주하는 장면 등 한 사람에서 둘로 같이 존재하게 되는 장면이 많다.

박찬경: 명확하게 나타난 장면은 산에서 불상을 볼 때, 마지막에 미술관에서 주인공과 죽은 여자의 얼굴이 번갈아 나타날 때이다. 그 두 장면에서 더블 이미지들을 많이 생각해놓았다. 주어진 환경 안에서 되도록 많은, 다양한 여성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여성의 정체성이라는 구조가 정형화되어 있는 것을 흐트러뜨리려 했다.

관객5: 왜 미술관을 벗어나고 싶어하시는지 듣고 싶다.

박찬경: 실은 어디나 벗어나고 싶다. 그 당시에 특히 그랬던 것 같다. 미술관 장면에서 실제로 보여주려고 했던 것은 영화 전체의 형식에 대한 요약이다. 도시의 유랑하는 형식을 미술관에서 작품을 보는 것처럼, 흩어진 사방을 따라가면서 본다는 이 영화의 형식을 미술관을 관람하는 식으로 보여주고자 했다. 현대적인 미술에서 전통적인 그림으로, 행렬도로 갔다가 다시 네비게이션으로 간다. 이리 저리 옮겨가면서 익명의 여성들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죽은 자들이 우리 사회 어딘가에 있다는 상상을 할 수 있게 하고 싶었다.

정리 손소담(관객에디터) 사진 이호규(자원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