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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ECM 영화제: ECM과 장 뤽 고다르

“사람들과 교감하는 것이 예술을 감상하는 방식이다” - ECM 대표 만프레드 아이허와의 만남

[ECM 영화제 : ECM과 장 뤽 고다르]



“사람들과 교감하는 것이 예술을 감상하는 방식이다”

- ECM 대표 만프레드 아이허와의 만남


ECM의 대표 만프레드 아이허가 서울아트시네마를 방문했다. 그의 영화 <홀로세>와 ECM의 작업을 다룬 <사운즈 앤 사일런스>를 상영하고 ECM과 영화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즐거운 기회였다. 그는 1960년대 베를린에서 음악 공부를 하던 당시 영화관에서 누벨바그 영화들과 브레송, 베리만, 안토니오니의 영화에 빠져들었다며 날씨 좋은 일요일 오후,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 역설했다. 콘서트홀에서 공연을 보는 것처럼 영화관의 조명이 꺼지고 특별한 사운드 환경에서 영화를 함께 보는 행위가 예술을 감상하는 방식이라 말하던 그와의 각별했던 시간을 소개한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오늘 이 자리는 ECM의 대표인 만프레드 아이허와 함께 영화와 음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다. ECM, 그리고 만프레드 아이허와 영화가 맺고 있는 특별한 관계의 역사가 있다. 특히 ECM과 고다르의 관계는 주목할 만하다. 만프레드 아이허도 자신의 사운드 작업이 고다르의 영화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고, 고다르 또한 ECM과의 작업을 통해서 영화적 영감을 받았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이 둘은 사운드를 프로듀싱하는 방식에서 공유하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한다. 고다르는 스스로 자신이 영화의 작곡가라면 만프레드 아이허는 음악의 연출가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나도 90년대 이래 고다르의 음악작업이 ECM과 만프레드 아이허와의 관계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이는 비단 고다르뿐만이 아니다. ECM은 타르코프스키와 베리만과 관련한 음반들을 만들기도 했다.


만프레드 아이허(ECM 대표, 음반 프로듀서)│한국에 온 지 8시간 정도 됐다. 아직 서울이라는 도시에 대해 많은 것을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한국 사람들이 음악에 대해 가지고 있는 태도와 여러 가지 생각들을 나눌 수 있어 너무 좋다. 그리고 <홀로세>도 오늘 다시 봤는데 스크린과 사운드가 좋아서 만족했다.


김성욱│사실 우리 극장이 외부 노이즈가 심한 편이다. 그런데 만프레드 아이허 씨가 평소에 노이즈도 음악의 한 일부라고 말했기 때문에 그렇게 걱정을 많이 하지는 않았다(웃음).


만프레드 아이허 : 물론 단순히 ‘최고의 사운드’나 ‘최고의 시설’을 이야기하면 더 좋은 걸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다르의 영화에서 여러가지 이야기가 섞이는 것이라든지 <홀로센>에서 나오는 자연의 소리 등이 종합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사운드의 구조가 음향 기계 자체의 소리보다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오늘 여러분이 경험한 건 충분히 감상할 만한 사운드 상태라고 본다.


황덕호(음악평론가)│ECM이라는 레이블이 국내에서는 재즈만 레코딩하는 회사로 알려져 있겠지만 사실은 1980년대 이후 굉장히 폭넓은 음악을 다뤄온 회사이다. 이번 <사운즈 앤 사일런스>는 몇 명의 뮤지션들만 출연하지만 폭넓은 장르의 음악을 살펴볼 수 있었고, 무엇보다 음악에 푹 빠져들 수 있었던 영화였다.


김성욱│아이허 씨는 고다르의 <비브르 사 비>라는 작품에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고 학창시절에도 영화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알고 있다. 60년대에 브레송, 고다르, 베리만, 안토니오니의 영화들이 음악적 성향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고 들었다. 20대 시절에 어떻게 영화에 관심을 가졌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연배로 보면 뉴저먼시네마의 감독들과 비슷한데, 빔 벤더스나 파스빈더 감독과 공유하는 부분이 있는지도 궁금하다.

만프레드 아이허│1960년대 베를린에서 음악공부를 했다. 당시 베를린의 한 극장이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이상한 영화들을 많이 보여줬다. 누벨바그 영화나 브레송, 베리만, 안토니오니 등의 영화 말이다. 나는 콘트라베이스와 피아노, 그리고 작곡을 공부하고 있었지만 그런 영화들을 보며 음악과 영화 양쪽으로 많은 만족을 얻었다. 뉴저먼시네마와 관련해서는 파스빈더 감독을 뮌헨에서 몇 번 만난 적이 있다. 물론 그의 영화들을 좋아한다.

김성욱│그런 영화들을 보며 어떤 음악적 영감을 받았는지 궁금하다.


만프레드 아이허│영화를 볼 당시에는 음악과 영화의 관계에 대해 그렇게 많이 관심을 가졌던 때가 아니었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특히 고다르의 영화들을 보면서 영화의 편집과 움직임의 타이밍 같은 부분에 많이 주목했다. 또는 타르코프스키나 베리만 감독의 영화를 보며 카메라에 비친 사람들의 모습에 더 많이 주목을 했다. 음악적 측면에서는 고다르의 영화가 자연의 소리(natural sound)를 이용하는 것이 굉장히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황덕호│나는 개인적으로 80년대 초반, 내가 고등학생일 때 처음으로 ECM 음반을 들었다. 그때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느낌을 받았다. 음악을 들으며 시각적 영상을 느끼는 체험을 한 것이다. 그리고 다들 잘 알겠지만 ECM 음반은 커버에도 굉장히 신경을 쓰기 때문에 그 음악과 자켓 이미지가 분리되지 않고 머릿속에 같이 남는다. 아이허 씨에게 음악과 영상이 어떤 관련을 갖는지 알고 싶다.


만프레드 아이허│우선 음악은 그저 음악일 뿐이기 때문에 이미지가 없어도 음악을 들을 수 있다. 음악을 감상하는 것은 단지 듣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음악을 다 만들고 난 다음 어떤 이미지를 앨범 커버로 쓸지 얘기를 하는데, 그러다 보면 음악 자체가 담고 있는 느낌과 반대의 것이 나오기도 한다. 역설적인 표현을 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시적이고 여러 가지 느낌을 전달하는 이미지가 나오지만 어쨌든 우리가 음악을 들으며 생각나는 느낌과 이미지를 커버로 사용하려 한다.



김성욱│음악 작업과 영화 작업은 별개의 것인데 어떻게 음악을 하다가 영화감독들과의 협업까지 이어졌는지 궁금하다. 내가 알기로는 80년대 말에, 특히 고다르의 경우에는 직접 편지를 써서 음반을 보내면서 협력 작업이 시작된 걸로 알고 있다. 어떤 구체적인 경로를 통해 고다르의 영화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고 또 협력 작업을 시작했는지 궁금하다.


만프레드 아이허│고다르의 영화는 특유의 자연스러운 느낌들 때문에 좋게 생각하고 있었다. 80년대 후반에 고다르를 만나 여러 이야기를 나누다가 공동 작업에 대한 이야기까지 나왔다. 특히 ECM의 음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커버 이미지에 대한 작업도 같이 하며 고다르가 원하는 음악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하면서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했다. 다른 감독들의 경우는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과 잉마르 베리만 감독과 아주 오래된 인연을 갖고 있다. 앞에 상영했던 <홀로세>의 경우는 베리만 감독의 중요한 배우인 얼랜드 조셉슨과 작업을 같이 하기도 했다.


김성욱│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공동 작업을 하는지 궁금하다. 영화의 구상 단계에서부터 이야기를 서로 나누는 건가?


만프레드 아이허│고다르는 영화의 장인이라서 나의 충고나 자문은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그리고 다른 감독들과의 작업은 개인적인 차원의 협업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그 부분에 대해 자세하게 얘기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고다르의 경우는 90년대부터 계속 작업을 같이해 오며 최근 <필름 소셜리즘>까지 같이했으니, 그 작품들을 보면 우리의 작업이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김성욱│<누벨바그>나 <영화사> 같은 경우는 음반으로도 만들어져 있는데 이것은 일반적인 의미의 사운드트랙 앨범이 아니라 영화에 나오는 모든 소리들을 전부 녹음한, 사실상 이미지가 없는 한 편의 영화다. <누벨바그>의 음반은 맹인을 위한 영화라는 생각이 드는데, 실제로도 클레르 바르톨리Claire Bartoli라는 맹인이 영화에 관한 글을 쓰기도 했다.


만프레드 아이허│<누벨바그> 같은 경우는 오히려 사운드에 대한 영화라기보다는 내러티브를 갖고 있는 영화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예를 들어 영화에 보면 개 짖는 소리 등의 자연스런 사운드들이 나오는데 이 모든 소리들이 모두 앨범에 포함됐다. 그런데 이런 사운드들은 모두 통합을 이루어 일종의 내러티브를 전달한다. 고다르 감독의 편집의 천재적인 면이 잘 드러나 있는 것이다. 굉장히 시적이고 아름답게 완성된 작품이다. 그리고 맹인을 위한 영화라고 했는데, 당연히 들을 수만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보다 음악을 더 잘 듣는 면이 있다.


황덕호│<홀로세>의 경우 한 교수가 혼자 칩거하면서 자신의 기억을 계속 되살려보는 이야기를 통해 고독의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였다.


만프레드 아이허│막스 프리쉬가 쓴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고립된 특정 공간에서 자신이 기억을 잃고 있다는 두려움에 빠진 채 이를 막기 위해 지속적으로 주변의 기록을 모으는 과정을 담고 있다. 사운드적인 측면에서는 물소리라든지 자연의 소리를 많이 강조하려 했다.


황덕호│음악을 감상한다는 행위가 18세기에는 음악당이나 교회에서만 가능했는데 지금은 거실로 옮겨가고 이어폰으로 듣는 개인주의적 행위로 변했다. 이렇게 음악을 듣는 것이 개인주의적 행위가 된 상태에서 ECM의 음악이 주는 고독함, 쓸쓸함이 지금의 환경과 잘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가 ECM의 음악을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도 했다. 이런 고독감이 ECM에 중요하다는 생각을 <홀로세>를 보며 했다.



만프레드 아이허│음악은 음악 그 자체이고 제작자들은 음악을 만들 뿐이다. 음악을 듣는 취향 등이 개인적인 행위로 바뀌는 것은 물론 사실이지만 여전히 18세기처럼 콘서트홀에서 음악을 듣는 사람도 있다. 작업을 할 때에는 내가 좋아하는 음악가에게 가서 작업을 같이하자고 제안을 한다. 그 결과물이 나왔을 때 고독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자기 혼자 들을 것이고 다른 사람과 듣고 싶은 사람은 그에 맞는 방식으로 음악을 들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음악 자체와 그 음악을 듣는 방식이 굳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황덕호│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의 글씨체가 낯익었다. 70년대 ECM 음반에서 자주 본 글씨였는데.


만프레드 아이허│그런 것을 기억하다니 정말 반갑다(웃음). ECM의 초기부터 커버 작업을 한 아티스트가 있다. 영화에 나온 것도 그의 글씨체이다.


관객 1│ECM의 음반들은 장르가 매우 다양하다. 그런 다양한 음악을 만드는 음악가들을 어떻게 찾아내는지 궁금하다.


만프레드 아이허│어느 날은 낯선 나라에서 차를 운전하다가 음악을 들었는데 그 음악이 너무 좋아서 음악가를 찾아 보았다. 그 사람이 바로 아르보 패르트였고, 그 이후 비엔나에서 만나 작업을 진행했다. 이렇듯 음악을 발견하는 것은 특별한 형식이 있는 게 아니라 집의 뒤뜰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일을 45년째 하면서 나는 내가 하는 일을 어느 정도 잘 알고 있는 편이라 생각한다. 나의 직감이나 본능, 어떤 느낌을 믿는 편이다. 내가 음악가들을 찾아 가기도 하고 음악가들이 연락을 먼저 하기도 하는데, 그 과정에서 같이 이야기하고 작업을 해 보면서 발전해 가는 과정이 있다. 그런데 이 과정은 체계적인 유형을 갖춘 것이 아니라 자연발생적인 것이다.


관객 2│프로듀서이자 레이블의 운영자로서 이미 작곡이 된 음악을 청자에게 더 깊이 있게 전달하기 위해 무엇을 신경 쓰는지 궁금하다.


만프레드 아이허│작업을 할 때 기본적으로 청자를 염두에 두는 편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내가 그 음악을 좋아해야하고, 그리고 그 음악을 발전시키기 위해 뮤지션과 이야기하며 최대한 논의에 집중한다. 음악가와 프로듀서인 나 사이의 작업이 다 끝난 후에야 비로소 이를 어떻게 전달할지 이야기하는 것이지 그 과정에 청자를 염두에 두지는 않는다.


관객 3│음악을 들었을 때 끌리는 부분과 끔찍하게 느끼는 부분은 무엇인가.


만프레드 아이허│어머니가 성악을 했는데,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슈베르트와 베토벤을 좋아하셨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런 음악을 많이 들었다. 그리고 여섯 살 때 바이올린을 손에 처음 잡았고, 14살 때는 빌 에반스 등의 음악을 들었고, 대학에서는 콘트라베이스를 전공하면서 음악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졌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와 네 명의 자매들 때문에 지속적으로 음악에 노출돼 있었다. 그리고 독일의 국경 지역에 굉장히 아름다운 호수가 있다. 이곳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느낀 감정들이 음악적 영감을 주기도 했다. 어렸을 때부터 겪은 이런 과정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김성욱│마지막으로 ECM의 음악을 좋아하는 팬들과 ECM의 음악을 통해 영화에 접근하고 있는 분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만프레드 아이허│일요일 오후, 햇빛도 좋은 날에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게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특히 집에서 비디오를 보는 게 아니라 이렇게 극장에 나오는 것은 매우 특별한 순간이다. 이는 콘서트홀에서 공연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렇게 스크린이 있고 조명이 꺼지고 특별한 사운드가 있는 환경에서 영화를 본다는 것은 굉장히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나도 ‘리스닝 세션’이라고 해서 음악만을 듣기 위해 한두 시간씩 앉아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사람들과 음악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교감하는 것처럼 이렇게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영화에 대한 느낌을 옆 사람들과 공감하는 것이 예술을 감상하는 방식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이렇게 특별한 순간에 오신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앞으로도 극장에서 많은 영화들을 보기 바란다.



정리│김보희 자원활동가 / 사진│곽혜원 자원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