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특별전/한국영화, 새로운 작가 전략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이 중요한 영화다”

[시네토크] 민용근 감독의 <혜화, 동>

‘한국영화, 새로운 작가 전략’ 기획전이 닷새째를 맞이한 26일 오후, 찾아가는 GV를 통해 관객 일만 명 돌파라는 괄목한만한 성과를 거두고 있는 <혜화, 동>이 상영되었고, 예외 없이 민용근 감독이 함께 하는 관객과의 대화 시간이 마련되었다. 영화에 대한 세심하면서도 풍성한 생각들을 나눴던 시간의 일부를 전한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영화가 개봉하고 나서 빨리 묻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혜화, 동>은 감독이 관객을 찾아가는 활동을 하면서 지금 같은 좋은 결과를 내고 있다. 하지만 감독이 나섰다고 해서 그 결과가 있었던 것만은 아닐 것이다. 작품 자체가 그만한 힘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어떤 점을 주로 염두에 두고 영화를 만들었는지?
민용근(영화감독): 회사를 다니다가 그만두고 영화를 계속 하려고 하는데 장편 시나리오를 쓸 능력이 될까 이런 것을 시험해보려고 처음 시나리오를 썼다. 그때 썼던 시나리오가 <혜화, 동>이었고 연이 돼서 제작까지 하게 됐다. 시나리오를 쓸 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거나 큰 테두리가 있는 상태에서 시나리오를 쓴 게 아니라 사회 초년생일 때 유기견을 구조하는 여자분 얘기를 다룬 TV 다큐에 조연출로 참여한 적이 있었는데 그걸 아이디어 삼아 시나리오 작업에 착수하게 된 거다. 탈장된 개를 잡으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잡지 못하고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그 모습이 머릿속에 오래 남았던 것 같다. 2002년이었던 것 같은데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가 어떤 마음에서 눈물을 흘렸을까 생각해보다가 이야기를 하나둘씩 덧붙여서 만든 것이 지금 보신 <혜화, 동>의 이야기이다.

김성욱:
유기견의 이야기와 비밀스러운 느낌을 주는 아기의 죽음이 연결되어있는 게 영화의 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기의 죽음은 굉장히 미스터리한 플롯으로 전개되고 있다. 혜화의 감정적인 이야기 전개와 아기의 죽음의 미스터리 플롯이 연결된 것이 흥미로웠다. 다른 한편으로는 ‘도대체 아이를 둘러싼 이 문제가 어떻게 된 거지?’라는 생각도 드는데, 두 가지 연결점들을 만들 때 어떤 점을 염두에 두었나?
민용근: 미스터리한 요소는 장르적으로 끌고 가고 싶다고 한 건 아니었고 자연스럽게 나온 것 같다. 일상생활을 하다가 눈길을 끄는 사람을 보게 되고 그 사람에 대해서 궁금증을 품고 그 사람이 하는 행동 하나하나를 관찰하는 것 자체가 미스터리인 것 같다. 영화에서도 이야기를 진행시킬 때 ‘아이가 살아있는 것일까? 혜화의 아이가 맞는 것일까?’ 이런 궁금증들이 한 번에 해결되는 게 아니라 단서를 조금씩 전해주는 방식으로 진행되다보니까 미스터리한 느낌이 있었던 것 같다. 탈장된 개가 나오지만 혜화가 키우던 혜수의 딸인지 꼬리만 노란 공통점이 있는 개인지 그게 중요하진 않다. 개를 봄으로 인해서 혜화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이 중요했던 것처럼 아기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나연이가 실제 혜화의 아이인가 아닌가가 중요하게 느껴지긴 하지만 누군지 밝혀지고 나서는 누구의 딸이고 어떻게 키워지고는 중요하지 않다. 혜화의 마음속에 있던 아이가 굉장히 중요했던 것 같다. 목욕을 시켜주는 장면에서 혜화는 나연이와 작별을 한다. 결과적으로 딸은 아니었지만 혜화가 용기를 잃고 작별 인사를 하지 못하고 보냈었던 아이와 마지막으로 작별을 하는, 일종의 마음의 치유 같은 과정이다. 중요한 건 마음속에 있던 아이의 존재였던 것 같다. 그것을 극복하고 치유해가는 혜화에 중심을 맞췄던 것 같다.

김성욱:
영화의 결말에 이르게 될 때 아이를 떠나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두 남녀가 만나게 된다. 물론, 그렇게 느끼지 않은 분도 있었던 것 같다. 영화의 매듭을 짓는 부분에서 어떤 점을 염두에 두었는지?
민용근: 같은 관객도 처음 볼 때 두 번째 볼 때 다르게 느끼셨던 분들이 많았다. 혜화가 후진을 할 때, 한수에 대한 미움이 극에 달하신 분들은, 후진해서... (좌중 웃음) 혹은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는... (좌중 웃음) 물론 혜화가 한수를 쉽게 용서한다거나 흔히 말하는 화해의 느낌은 아니었던 같다. 마지막에 혜화의 표정도 약간 불안했던 느낌도 있고, 한수에 대한 연민도 분명히 있기도 하고. 그 후에 혜화가 한수를 차에 태워서 버스 타는 데까지만 태워주든 어떻게 하든 그건 사실 어떻게 될지 모르겠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혜화가 한수에게 가는 얼굴로 끝을 맺었던 이유는 두 사람이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보고 얘기하는 시작 같은 느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수도 똑같이 상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고 똑같이 상처를 지니고 있는 사람을 혜화가 뭔가 풀지 않은 상태로 그냥 지나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떤 결과가 나건 중요한 건 아이를 매개로 하는 게 아니라 서로 마주보고 얘기할 수 있는 시작의 느낌이다. 그 시작도 큰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한수에게든 혜화에게든.

김성욱: 혜화가 나연이를 납치하려다가 차가 견인되어 실패하는 장면을 인상적으로 기억한다. 이 때 전봇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순간의 느낌이 특이했다. 전체적으로 혜화는 끊임없이 자기 주변의 어떤 것으로부터 소원한 경험을 얻는다. 강도는 약하지만 원장과 무언가가 있을 법하다가도 원장이 어느 순간 결혼을 하겠다고 하고. 그런 느낌이 영화에 반복해서 드러나고 있다. 
민용근: 혜화가 ‘왜 난 아니에요’라고 수의사한테 말을 하는데 그 말이 작게 보면 사랑까지는 아니지만 수의사에 대한 작은 호감, 농담으로 던진 말일 수도 있을 테고 약간 크게 본다면 수의사와 아이와 비어있는 자리를 계속 혜화가 했었던 건데, 거기서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누군가가 들어옴으로 인해서 밀려난 상황에 대해서 ‘왜 난 아니에요’가 될 수도 있고. 좀더 크게 보면 과거부터 계속 반복돼 왔었던, 한수와의 관계에서나 아이와의 관계에서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밀려나는 자기의 상황에 대한 ‘왜 난 아니에요’일 수도 있다. 개장수가 나오고 그 개장수와 마주쳤을 때 개장수에게 저항하고 항변하지 못 하는 상황과도 연관이 된다고 생각했다. 개장수의 느낌 자체도 혜화에게 가혹하게 돌아가는 운명 같은 것이 됐으면 하는 느낌이 있었다.


관객1: 촬영 들어가기 전에 배우와 신뢰를 구축해간 과정이 궁금하다.
민용근: 다인씨 같은 경우도 드라마나 영화를 하기는 했었지만 전작들을 보고 캐스팅했던 것은 아니었다. 만나기 전에도 큰 기대 안 하고 만났는데 말도 별로 없고 대신 말을 한 마디 한 마디 하는 게 굉장히 진심처럼 박혔다. 혜화와 닮은 사람이구나 하고 느꼈었던 것 같다. 계속 만나다보니까 그게 크게 느껴져서 다인씨가 혜화가 되기 위해서 뭔가를 해야 한다거나 그런 고민은 안 했다. 사람 자체가 조용조용하다보니까 뭔가 확 깰 수 있는 부분이 부족할 것 같은 느낌은 있었다. 학교 다닐 때 기초 연기 수업을 들었는데 좋은 배우를 떠나서 좋은 사람이 되려면 자기 자신에게 있는 어떤 것을 깨야 한다고 배웠다. 교수님이 모으신 독백집에 있는 독백을 한사람씩 외워 와서 한명씩 독백을 나가서 하고 집중 인물 탐구를 받았다. 감정이 터지지 않으면 때리기도 하고. 그런 것을 한번 해보고 싶었다. 촬영 들어가기 전에 뭔가를 깨보자, 독백집에서 하나를 외워오고 준비되면 언제 날 잡아서 해보자. 눈물도 줄줄 흐르고 의외로 잘했는데 감정이 목까지 밖에 안 오더라. 보는 사람도 아슬아슬한 느낌들이 있었다. 학교 선생님은 점쟁이 기질이 있어서 확 끄집어내고 그랬는데 여러 방법들을 동원해도 결국 그 선생님처럼 끌어내지 못했다. 서로 답답해서 밖으로 나와서 산책을 하면서 무언가 마음이 풀어지는 느낌들이 있었던 것 같다. 비결을 알지 못해서 서로 발악했던 것이었는데, 의도치 않은 부분에서 통하는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 촬영하면서 답답한 게 있으면 다인씨가 말을 안 한다. 그런 부분을 콕콕 찔러서 물어보기도 하고. 영화와 별개로 그 사람의 뭔가를 깨주고 싶다거나 이런 의도로 접근하고 관계를 가졌던 것들이 영화에 약간 잘 반영된 것 같다.


관객2: <혜화. 동> 제목의 의미가 궁금하다.
민용근: 중학교 때 혜화에 자주 놀러왔었다. ‘혜화’라는 느낌도 좋았고 글자 자체도 이뻐서 딸을 낳으면 민혜화로 해야지 하고 생각했다. 십몇 년 간직하고 있다가 <혜화, 동> 시나리오를 쓰면서 그 어감이 주는 느낌이 인물과 맞지 않나 생각이 들었다. 쉼표 동 같은 경우는 처음 시나리오 쓸 때 장난 반으로 썼었다. 대신 아이가 중요한 모티브고 해서 아이 동 자로 한자를 썼었다. 그런데 편집 모니터링 하러 와서 보신 분이 겨울의 느낌이 많이 난다고 혹시 겨울 동이냐고 해서 생각해보니까 그런 것도 같았고, 다른 분이 영화 보고 나서는 혜화 마음이 계속 움직여서 움직일 동이냐고 했다. (좌중 웃음) 그것도 맞는 것 같았다. 그래서 최종으로는 한자를 뺐다. (웃음) 세 가지 모두가 영화와 각각의 위치에서 중요한 느낌이 있는 것 같았다. 관객과의 대화를 하다 보니 여러 설들이 나오더라. 혜화와 한수의 마음이 같이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같은 동 (좌중 웃음), 철거촌 같은 동네의 느낌이 강해서 동네 동이냐고 하시는 분도 있고. 어느 게 딱 맞다 보단 느낌 가는대로 느껴도 될 것 같다.

김성욱: 감독에게도 특별한 경험이 된 영화일 텐데 개봉 이후의 소회를 들려 달라.
민용근: 처음부터 GV를 많이 할 생각은 아니었고 개봉하고 나서 우연하게 아는 분이 회사 동호회 삼십분을 데리고 와서 볼 테니 술자리에 잠깐 얼굴 비춰질 수 있냐고 한 말에서 시작했던 것 같다. 갔었고 얘기하다보니까 꼭 극장이 아니더라고 뒷풀이 자리나 찻집에서 관객과의 대화를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극장에 네 분 남아계실 때는 네 분이랑 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굉장히 민망했는데 막상 이야기를 해보니까 이야기하는 게 굉장히 재밌었다. 저도 얻는 게 굉장히 많았다. 질문을 하면 대답을 하는 형식이 아니라 이야기를 하는 방식이니까 저한테 얘기해주시는 분들도 많고. 특히 독립 영화 안 보셨던 분들, 연령대 있는 아주머니 분들이 해주셨던 말씀들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영화를 많이 보는 눈으로 말씀하시는 부분이 아니라 자기가 겪어온 삶을 통해서, 자기 딸과의 관계를 통해서 영화를 봐주시고 저에 대해서도 얘기해주시니까, 이렇게 하지 않았으면 못 만났을 인연이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횟수로 많이 했다가 중요한 건 아닌 것 같고, 그렇게 가깝게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게 나중에도 잊히지 않을 것 같다. (정리: 최용혁 시네마테크 관객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