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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또 하나의 약속>,<탐욕의 제국> 특별상영

“노동자들의 삶을 기록하고, 관객들이 이 사람들을 기억하게 하고 싶었다.” - <탐욕의 제국> 홍리경 감독

<탐욕의 제국> 홍리경 감독과의 대화


“노동자들의 삶을 기록하고, 관객들이 이 사람들을 기억하게 하고 싶었다.”



지난 3월 8일,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직업병을 얻은 노동자들의 삶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탐욕의 제국>을 상영하고 이 영화를 연출한 홍리경 감독과 대화를 나누었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개봉을 3월 6일로 잡았는데 고 황윤미씨 기일에 맞춘 것인가.


홍리경(<탐욕의 제국> 감독)│그렇다.


김성욱│영화가 개봉했는데 소감이 어떤가.


홍리경│독립영화가, 그것도 다큐멘터리가 개봉까지 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영화를 만들어놓고 영화제 몇 군데서 상영하고 말겠거니 생각했는데 이 소재가 가지는 사회적 의미가 커서 개봉까지 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개봉을 했으니 이 작품을 통해서 영화가 다루는 문제와 다른 문제들까지 함께 고민하며 그 해결 방법을 생각하는 역할을 해야 할 것 같다.


김성욱│이 영화를 처음 시작했을 때의 상황이 궁금하다.


홍리경│ 2011년 4월부터 촬영을 시작했다. 그때는 삼성전자 LCD 공장의 노동자가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와 우울증으로 자살을 했었다. 그런데 그 분이 기숙사에서 두 번이나 자살시도를 했었는데 회사에서 알고도 방치를 했다. 그 분의 가족들이 삼성전자 공장 앞에서 진상규명과 사과를 요구하기 위해 1인 시위를 하던 무렵이었는데, 상도 치르지 않은 상태였다. 그때 처음 카메라를 들고 현장에 나갔다. 그런데 그분들은 촬영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회사와 합의를 하셨고 촬영한 영상은 쓰지 않으면 좋겠다고 해서 그분들의 이야기는 영상 속에 없다. 단지 병에 걸리는 문제 뿐만이 아니라 그 안의 노동환경에 대한 문제제기가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영화를 시작했다.


김성욱│영화의 첫 이미지가 방진복을 입은 분들의 사진이다. 그 분들은 어떤 분들인가.


홍리경│고등학교 3학년, 그리고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어린 친구들이다.


김성욱│그 이미지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이미지만 보면 수의 같기도 하고, 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어떤 상태에서, 어떤 조건 속에서 일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이 이미지에서 시작한 이유가 무엇인가.


홍리경│방진복을 입고 있으면 우리가 보기에는 다 같아 보이는데, 그분들은 누군지 다 구분할 뿐 아니라 그 중에서도 예쁜 옷과 그렇지 않은 옷을 구분한다. 그들 사이에서는 그 방진복이 자신을 돋보이게 하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수단이었던 것이다. 현장 노동자들은 자신을 방진복, 방진마스크로 가리고 끊임없이 자신을 지우는 노동현장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있고 그 욕망들을 어떻게든 채워가기 위해 삶을 영위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 안은 자신을 꾸미고자 하는 어린 여자들의 욕망조차도 밖으로 드러낼 수 없는 그런 공간, 최소한의 것도 욕망할 수 없는 공간이었다. 누가 누군지도 알 수 없이 사람을 지우는, 그 사람의 개성이나 모든 걸 지워버리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이 작업을 삼성 직업병이라는 소재에 빠지지 않고 여성 노동자의 이야기로 키워나가는 데 중요한 키워드가 되었다.


김성욱│실제로 공장 내부를 촬영할 수는 없었을텐데 영화에는 그런 장면들이 있다. 어떻게 촐영한 것인가.


홍리경│다른 방송사가 촬영한 후 자신들이 사용하지 않은 소스를 사용할 수 있게 허락해주셨다.


김성욱│출연자 중 이윤정씨는 조금씩 말을 잃어가다가 나중에는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고, 결국 세상을 떠난다. 영화를 보면서도 충격을 받았는데 촬영하는 입장에서도 충격이 컸을 것 같다. 한 사람의 삶과 죽음을 다큐멘터리에 담을 때 촬영하는 사람의 충격이나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다.


홍리경│윤정씨를 처음 만난 때가 2011년 늦봄 무렵이었던 것 같다. 1년 전 뇌종양 진단을 받으시고 수술했는데 종양도 제거하지 못했다. 결국 1년 시한부 선고를 받으셨다. 그래서 어찌 보면 이 분이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죽을 것 같지는 않아서, 기적처럼 이 사람이 다시 건강해지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상황이 악화돼서 끝내 돌아가셨을 때 충격이라기보다는 이 모든 걸 회피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그때 작업을 잠깐 중단하기도 했었는데, 그냥 알던 사람이 죽은 것과는 다른 경험이었다. 카메라를 들고 뷰파인더로 그 사람만을 온전히 바라보는 그런 시간 동안 일상적인 관계 외의 상대에 대한 감정이 형성되는 것 같다. 그 부재로 인한 상실감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게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사람들이 감내해야 할 가장 큰 어려움이라고들 말하더라.


김성욱│다큐멘터리에 노동자들이 지내는 기숙사 건물 외관이 많이 등장하는데, 건물 각 동에 붙은 이름들이 신경 쓰였다. “라일락”, “개나리” 말이다. 그래서 꽃말을 찾아봤는데 라일락의 꽃말이 “젊은 날의 추억”, 개나리의 꽃말은 “희망”이었다. 다들 젊은 나이에 그 기숙사에 들어가 꽃다운 시간들을 소진하고 나오게 되는데, 그 이름들이 아이러니하다. 그 건물들이 수용소 같은 느낌이기 때문이다. 들어가 찍을 수 없으니 멀리서 찍을 수밖에 없는 그런 미장센 말이다.


홍리경│기숙사 장면을 여러 번 넣은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 안에서 어떻게 생활하는지 너무 찍고 싶고, 알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으니 그냥 상상하게 하고 싶었다. 나도 그 창문마다 누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상상하게 되더라. 관객들도 그렇게 생각해주면 좋겠다.


김성욱│영화에 소리가 안 들어가는 부분이 있다. 무슨 의도 때문에 그랬을까 궁금했다. 그런데 두 번째 봤을 땐 이 영화가 어떻게 보면 소리를 잃어가는 영화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이윤정씨는 시간이 갈수록 말을 못하게 되고, 한혜경씨는 처음 등장할 때부터 말을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한다. 그리고 정혜정씨는 세상을 떠난 남편의 목소리가 아직도 들리는 것 같다고 말한다. 이렇게 사라져가는 소리에 대한 감각과 영화에서 소리가 빠진 장면들이 묘하게 맞닿았다. 소리에 대해 어떤 생각이 있으셨는지 궁금하다.


홍리경│소리가 이미지에 담긴 이야기를 과장할 수도 있고, 이미지가 가진 본래의 것을 왜곡시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리없이 이미지만 보면 그 안의 상황들을 조금 더 현실과 가깝게 느낄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으로 그렇게 했다. 특히 삼성전자 앞에서 실랑이하는 장면이 그랬다. 이 비극적인 상황에서 다른 소리들, 어떤 잡음도 듣지 말고 지금 어떤 사람이 죽었고 이 죽은 이의 행렬을 막아서는 우스꽝스러운 장면들을 그냥 있는 그대로 사람들이 보았으면 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 노동자들, 아프거나 죽어가는 노동자들의 목소리는 사실 아무리 큰 소리를 내도 이 사회에 잘 전달되는 것 같지 않다.


김성욱│영화에 부감촬영이 많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바라보는 느낌이다.


홍리경│큰 공간, 넓은 공간, 거대한 것을 찍기 위해서는 멀리 떨어져 찍어야 했고, 그 거대한 공간 안에서 무수한 익명으로 존재하는 사람들을 개미처럼 작게 표현하고 싶었다.


김성욱│반도체 칩을 보는 느낌과 비슷하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홍리경│사람들이 일을 하고 있는데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다. 그들의 노동이 거댛나 공간 안에서 작은 부품처럼 존재하는 것 같다.


김성욱│클레르 드니의 <트러블 에브리 데이>에서 첫 장면이 비행기에서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보는데, 그 이미지가 반도체칩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이걸 볼 때도 그런 느낌이 있었다. 공장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상황에서 바깥에서 그 공간을 보여주는데, 사실 ‘삼성 공화국’은 공장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깥에도 존재한다. 밖에 있지만 공장의 내부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관객 1│삼성 말고 LG 같은 다른 반도체 공장에서 피해를 입은 노동자도 있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회사는 왜 보호장치를 제대로 준비하지 않는 것인지 궁금하다.


홍리경│ 반도체 산업 직업병 피해자들의 문제를 해결하려 애쓰는 단체인 ‘반올림’에 의하면 여기에 대한 200여 건이 넘는 제보가 있었다. 전체 한국의 반도체 제조 산업 중 87%가 삼성 계열사에서 들어온 제보였다고 한다. 다른 업체들에서 일하다 병에 걸리신 분들도 있는데 삼성이 규모가 워낙 크다보니 많은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것이고 그래서 더 많은 피해자가 나오는 것 같다. 왜 삼성에 대해서만 말하냐고 물어보면 삼성에서 발생한 피해자가 훨씬 많고 이 사안에 대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들이 지금까지는 삼성 출신의 노동자들이 많아서 그렇다고 답하겠다.

그리고 위험한 화학물질을 직접 다루는 곳에서 완벽하게 안전 장비를 갖춰도 그 외의 곳에서 노출이 된 화학물질의 경우는 작업장 전체의 공조 시스템 때문에 다른 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김성욱│반도체 산업 자체가 안전성이 보장되기 어려운 산업인건가?


홍리경│화학집약산업이기 때문에 화학물질을 써야 하고, 그걸 더 안전한 물질로 대체할 수 없다고 한다. 시스템 자동화를 도입하면 좀 더 안전할 수는 있는데, 자동화한다 해도 수리하고 관리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누군가는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설비들이 굉장히 비싸 한꺼번에 자동화 설비로 바꾸는 것도 쉽지가 않다고 들었다.


관객 2│영상 보니 삼성전자 최우수 부사장이 나오는데 그도 마음에 걸리는 게 있으나 회사에서 내린 지시도 있고 해서 가만히 있는 것 같다. 피해자 분들께는 죄송한 이야기인데 회사에서는 이 사안을 자기들의 이익을 크게 위협할 만한 사안으로 보는 것 같지가 않다. 그래서 이렇게 입을 싹 닫고 있는 것이다. 베트남에서도 공장을 운영하다 사고가 났다고 들었는데 거기서도 비슷한 대처를 한 것 같다.

이 영화를 해외 영화제에 출품하실 생각이 있는지 궁금하다. 대규모 불매운동이 벌어져야 회사의 대응이 바뀔 것 같다.


홍리경│기회가 닿는 대로 해외 영화제들에 출품하고 있다. 4월에 스위스 리옹에서 열리는  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상영이 확정됐다.


관객 3│감독님은 <또 하나의 약속>을 어떻게 보셨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왜 다큐멘터리란 장르를 선택했는지 궁금하다. 마지막으로 여고생들이 이 영화를 많이 봤으면 좋겠다.


홍리경│다큐멘터리로 작업을 한 건 내가 다큐멘터리를 업으로 삼는 사람이라서 그렇다(웃음). 나는 다큐멘터리 제작 공동체인 푸른영상에서 일하고 있는데 첫 장편 작업을 하려할 때 선배가 이 소재를 제안했다.

<또 하나의 약속>도 물론 봤다. 다큐멘터리는 어떤 문제에 대해 설명을 하는 역할을 하는데 내 영화는 그렇지 않다. 그런데 <또 하나의 약속>은 극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런 역할을 잘 해주었다. 이것이 왜 산재이고, 산재 인정을 받는 게 왜 어려운지, 산재 인정을 받는 게 왜 국가 기관이 아니라 삼성과의 싸움이 되고 있는지 훨씬 더 쉽고 정확하게 이야기해주었다. 이것이 극영화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다양한 말하기의 방식이 사회의 거대한 폭력과 맞서 싸우는 힘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작은 목소리들이 모여서 큰 힘을 만드는 거니까. 내 영화도 그 목소리 중 하나가 되면 좋겠다.

그리고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공동체 상영을 추진하고 있다. 학생들이 이런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면 좋겠다.


관객 4│삼성과 합의한 피해자들이 있다고 했다. 감독님이 보셨을 때 피해자들이 계속 투쟁을 할 수 있는 힘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홍리경│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소수일 수 있는데, 그 소수가 비슷한 처지의 다른 사람들을  만나서 서로 어루만져주고 이해하고 공감해주는 것이 이 싸움이다. 연대하는 힘이 그들을 외롭고 지치지 않게 하는 것 같다. 한편으로는 배신감도 크다. 너무나 자랑스러웠던 회사가 나에게 이런 고통을 줄 거라고 상상도 못했었는데 알고 보니 내가 아픈 이유가 회사 때문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회사는 발뺌을 하니 배신감을 크게 느낀다. 그런 분노의 힘이 싸움을 계속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직접 여쭤본 적은 없지만 아마 연대의 힘과 분노이지 않을까.


관객 5│러닝 타임이 길지 않은데 편집할 때 들어낸 부분이 있는지, 촬영 분량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다.


홍리경│촬영 분량은 정확히 잘 모르겠다(웃음). 만 2년 정도 촬영했고 한 달에 적어도 열 번은 촬영을 나갔다. 편집을 하면서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이 영화에는 도드라지는 주인공이 없다는 것이었다. 많은 피해자들이 있으니 어떤 한 사람만 부각시키지 않으려 했다. 그들을 섭섭하게 하고 싶지 않았고 누군가가 그들을 기억하기를 바랐다.

또 하나는 영화의 감정을 최대한 누르려 했다. 사실 현장에서는 감정 과잉 상태였다. 너무 많이 울고 분노하고, 또 행복했다. 그런데 현장에서 그렇게 감정을 다 해소해버리는 것처럼 관객들이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감정을 다 해소해버리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편집할 때 최대한 가족들이 분노하거나 울부짖는 장면들으 뺐다.

또 멀리서 긴 시간 동안 찍은 장면들은 노동자들이 싸우면서 보낸 그 긴 시간을 관객들도 조금이나마 같이 느낄 수 있게 하고 싶어서였다. 숏의 크기 속에 시간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관객 6│다큐멘터리를 처음 선택한 이유가 궁금하다. 그리고 시작부터 개봉하기까지 그 긴 기간 동안 이 영화를 만들게 한 힘이 궁금하다.


홍리경│처음부터 다큐멘터리에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다. 중학교 때 처음 영화에 관심을 가진 뒤 영화 만드는 사람이 되자고 생각을 했다. 그때 본 영화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올리브나무 사이로>였다. 나는 당연히 극영화를 만들 거라고 생각했다. 극영화를 더 많이 봤고 시나리오도 썼다. 그러다가 알렉산더 소쿠로프의 <마리아>라는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집단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짧은 이야긴데, 그 영화를 보고 내가 영화를 통해 말하고 싶은 게 뭔지를 생각해봤다. 그게 결국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어떤 삶, 작다고 말하는 어떤 삶, 영화나 책으로 기록하지 않으면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삶에 기록하고 기억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나에게는 다큐멘터리가 극영화보다 적합한 장르였다. 극영화를 보고 그 영화 속 인물의 삶을 두 시간 동안 사는데, 영화가 끝난 뒤 내가 울고 웃은 모든 게 허구라는 게 드러나면 허탈하기도 했다. 다큐멘터리는 어쨌든 내가 보고 사랑한 인물이 살아있는 거니까, 이런 것이 나에게 더 매력적이었다. 이 영화를 계속 만들게 한 힘은 , 무엇보다 현장이 너무 즐거웠다. 아픈 사람들과 함께 하는 현장이라 너무 무거울 것 같았지만 막상 웃는 시간이 더 많았다. 웃음 속에서 만든 관계가 더 애틋했다. 나를 행복하게 해준 사람들이 어느 순간 울고 아파하는데 뭘 해주고 싶었고 책임감도 들었다.


김성욱│<탐욕의 제국>은 죽음을 다루지만 사실은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마지막에 고등학생들이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홍리경│처음 영화를 시작할 때는 삼성 자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싶었다. 그런데 촬영을 계속 하다보니 고발해야 할 대상에 대해서만 말하는 게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업병 피해자 분들의 말씀을 직접 들어보니 삼성의 문제로만 국한하기에는 반도체 전자 산업 자체의 문제, 아픈 사람들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구조의 문제가 크더라. 영화를 만들 때 이 문제가 단지 삼성만의 문제로 받아들여지지 않도록 신경을 많이 썼다. 내가 만난 피해자들이 거의 삼성 노동자들이라 이를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지만 이 영화를 얘기할 때 다들 ‘삼성’만 얘기하는 것이 좀 씁쓸했다. 나는 그렇게 노력을 했는데 사람들은 이 영화를 통해 노동자들의 작은 삶을 기억하는 게 아니라 삼성을 비판하기 위한 도구로 소모하는 것 같아 속이 상하기도 했다.


그런데 영화를 상영하고 피해자 분들과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하는데 다들 말씀을 너무 잘 하셨다.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던 것이다. 이제 영화는 내 손을 떠났고, 내가 이 영화를 어떤 의도로 만들었든 이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소모품이 되어도 상관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말할 기회를 조금 더 만들어 주는 것이 이 영화의 역할이 아닐까 한다.



정리│백지원 자원활동가

사진ㅣ장혜진 자원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