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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다큐멘터리 특별전 : 일상적 슬픔

‘낮은 목소리’ 3부작이 지닌 현재적 의미에 대해서


‘낮은 목소리’ 3부작이 지닌 현재적 의미에 대해서


“<낮은 목소리>를 배급하고 상영하는 과정에서 가장 슬펐던 일은, 사람들이 이미 다 아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는 거예요.” 변영주 감독은 2007년 <낮은 목소리> DVD 출시를 앞두고 조영각 프로듀서와 나눈 대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위안부에 대해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제대로’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낮은 목소리> 3부작은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이 무엇이고, 왜 아는 것에서 그치면 안 되는가를 말하는 다큐멘터리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건 단순히 ‘전쟁 당시 여성들이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학대를 당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그보다는 현재 할머니들이 어떻게 살고 있고, 할머니들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알게 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낮은 목소리>(1995)는 1993년 12월 23일, 100회를 맞은 ‘수요집회’로부터 시작한다. 1992년 1월부터 일본 대사관 앞에서 일본 정부의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며 시작된 집회는 현재 1,224회(2016년 3월 30일 기준)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위안부 피해자의 아픔에 응답하지 않는 한, 집회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위안부 문제는 서슬 퍼런 눈으로 여전히 살아 있는 현재다. 위안부 문제를 재현하는 데 신중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위안부 문제를 과거의 이야기로 묘사하는 것은 위안부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에서 가장 멀어지는 일이다. 농촌에서 부모님과 평화롭게 살던 순진한 소녀가 어느 날 갑자기 알 수 없는 곳으로 끌려가 일본군으로부터 육체적, 정신적 학대를 견디다가 돌아오거나 돌아오지 못한 이야기.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고 아무리 관객에게 주지시켜 봐도 이런 이야기의 재현 자체는 관객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어딘가에서 이미 보았거나 들은 듯한 익숙한 서사의 일부일 뿐이다. 이런 이야기에 그친다면 관객의 소임은 그저 할머니의 사연에 안타까워하고, 일본에 대해 공분하는 것에 머무르고 말 것이다.

그러나 할머니들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가 아니다. <낮은 목소리>에 나온 할머니들의 말씀을 되새겨 보자. 할머니들은 위로가 아닌 공식적인 사과와 배상을 원했다. 그건 단지 일본 정부나 일본 국민에게 요구한 것이 아니다. 우리 정부와 우리 국민에게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할머니들의 이야기에 함께 공감하고 우는 것도 좋다. 그러나 아직은 울 때가 아니다. 우리는 어떻게든 사건을 마무리하려는 일본 정부와 그에 동조해 그저 외교 성과로 치장하기에 급급한 우리 정부를 마주하는 중이다. 변영주 감독이 영화를 완성한 후 7년간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가 “영화는 못 봤지만, 훌륭한 일을 하셨습니다.”였다고 한다. 그러나 단지 위안부 문제를 다뤘다는 것에 만족하기는 이르다. 부끄럽지만, 이는 ‘낮은 목소리’ 3부작이 완성된 지 16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위안부 문제를 화석화하지 않고 그것이 현재의 문제임을 끊임없이 주지시키는 ‘낮은 목소리’ 연작의 방식은 어쩌면 최소한의 윤리적 선택이다. 재현되어야 할 것은 할머니들의 꽃다운 과거가 아니다. 그들이 꽃다울수록 그들이 겪었던 폭력의 강도가 더 세지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늙고 병 들었다고 폭력의 강도가 약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재현되어야 할 것은 수난당하는 젊은 몸이 아니다. 늙고 병든 채로 살아남은 현재의 몸이다. 이제는 남아 있지 않은 젊은 몸을 허구의 방식으로 불러와 재현한다면, 그 즉시 몸은 자신에게로 떨어져 타인의 시선에 복속되고 만다. 엄밀히 말해 수난당하는 젊은 몸의 재현은 보지 못한 것을 보려는 관객의 욕망에 동조하는 포르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이미지가 고통을 더 실감하게 만든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차라리 당신은 그 고통을 느끼지 않는 편이 낫다고 말하겠다. <낮은 목소리>는 위안부 할머니의 벗은 몸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맺는다. 카메라의 시선은 명백한 증거로서의 몸을 조용히 어루만진다. 그녀들의 몸은 강요에 의해서가 아닌 자신의 선택으로 드러난 것일 때만 어렵게 의미를 지닌다. 극영화 역시 이런 윤리적 잣대를 비껴갈 수 없다.

세 편의 시리즈로 이뤄진 ‘낮은 목소리’는 각각의 작품을 떨어뜨려 놓고 봐도 의미를 지니지만, 3부작을 함께 놓고 봤을 때 생성되는 의미가 남다른 작품이다. 변영주 감독은 3부작을 거치면서 드러난 “할머니의 변화 과정이 이 영화의 모든 것”이라고 단언한다. 이를 바꿔 말하면 할머니와 제작진의 관계 변화가 이 영화의 모든 것이다. 이 말은 어쩌면 당연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내다 보면 관계가 친밀해지는 것은 당연할 테니 말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변화된 관계의 출발점과 도착점은 어쩔 수 없이 제작진에 있다. 일견 쌍방향적인 관계의 변화처럼 보이지만, 제작진의 진심을 몰라 경계하던 대상이 비로소 경계심을 풀고 이들을 받아들이는 구조 하에서는 관계 변화는 결국 제작진의 힘으로 환원되고 마는 것이다.

<낮은 목소리> 역시 1편만 놓고 본다면 환원적인 관계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낮은 목소리 2>(1997)와 <숨결>(1999)을 거치면서 제작의 주체가 변화하는 양상을 띤다. 알려진 바대로 <낮은 목소리>는 원래 3부작으로 기획된 것이 아니다. <낮은 목소리>는 독립영화로서는 기적과도 같은 극장배급에 성공하면서 주목할 만한 반응을 얻었는데 그중 하나가 시민의 기증으로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쉼터인 ‘나눔의 집’이 광주에 터전을 잡게 된 것이다. 이와 함께 할머니들은 직접 일굴 수 있는 조그마한 땅을 갖게 되었다. 이런 반응에 힘입은 할머니들이 이번에는 제작진에게 촬영을 제안하기 시작했다. 고사하던 제작진은 폐암 말기 판정을 받은 강덕경 할머니의 부탁에 어렵게 제안을 수락한다. 그래서 <낮은 목소리 2>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들의 새로운 에너지가 느껴지는 작품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이후 <숨결>에서 감독은 할머니들의 역할을 더욱 중요하게 끌어올린다. 이용수 할머니가 위안부 피해 여성들을 찾아다니며 그들과 대화하는 방식을 채택한 것이다. 이용수 할머니는 다른 할머니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연출자의 역할을 하는 동시에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증언자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 흥미로운 것은 감독이 할머니들의 대화로 극을 끝맺지 않고 다시 기존의 방식과 만나게 한 점이다. 이를 통해 감독과 할머니의 관계는 좀 더 다채로워진다. 관계의 변화를 제작 형식의 변화로 그대로 끌어온 것은 <낮은 목소리>의 간과해서는 안 될 미덕이다. 2부에서 뿜어져 나온 할머니들의 자발적인 음성이 제작진의 노력에 대한 응답의 성격을 띠었다면 <숨결>에 이르러 그것의 영향이 위안부 할머니들로부터 시작해 다시 감독 그리고 관객에게로 옮겨오는 과정이 담겨 있다. <낮은 목소리> 3부작을 함께 생각해 볼 때, 이 작품은 감독(관객)에게서 할머니에게로, 할머니에게서 다시 감독(관객)에게로 향하는 과정이 반복되며 마치 끊임없이 스스로 생성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반복되는 동시에 생성되는 관계의 변화망은 <낮은 목소리>의 시간이 영원한 현재일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위안부 문제를 하나의 사건이 아닌, 우리의 것으로 가져와야 한다. ‘낮은 목소리’ 연작은 관객이 할머니의 이야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자기화할 수 있는 지표를 곳곳에 제시한다. 그중 하나는 할머니의 후손으로서의 여성의 자리다. 이를테면 <낮은 목소리>에서 중국 길림성에 체류 중인 김 할머니의 증언을 대신 전하는 딸이다. 그녀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그것을 똑똑히 바라본다. 카메라는 그녀가 이야기하는 내내 단단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잡는다. 그때 갑자기 곁에서 울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옆에서 딸의 이야기를 듣던 김 할머니가 낸 소리였다. 그 울음소리는 사실을 재현한 폭력적인 이미지보다 더 많은 말을 한다.

또 다른 모녀관계가 있다. 김윤심 할머니는 위안부 생활을 하면서 얻은 후유증으로 선천적으로 말을 할 수 없는 딸을 낳았다. 김윤심 할머니는 자신이 겪은 일을 차마 딸에게 말하지 못하고 그녀에 대한 미안함을 일기장에만 적어 오셨다. 제작진이 모녀와 함께 둘러앉은 자리에서 할머니와 제작진은 딸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아야 할지를 고민한다. 그러던 와중 딸이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말하면서 분위기는 반전된다. 모두가 놀란 와중에 딸의 얼굴은 어떤 변화도 없이 평온하다. 어머니가 놀랄까 봐 알고 있다고 말하지 못했다는 딸. 할머니는 어느 순간 등을 보인 채 갑자기 재봉틀을 돌리신다. 그때 공간에 서린 공기 같은 것. 이것이 그 어떤 증언보다 더 많은 말을 한다.

‘낮은 목소리’ 3부작에서 변영주는 역사적이고 민족적인 사건으로 위안부 문제를 보는 것이 아니라 대물림되는 여성의 역사에 더 깊이 촉수를 댄다. <낮은 목소리>의 부제는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 2”다. 제주도 기생관광의 실태를 담은 데뷔작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을 찍으며 알게 된 여성이 어느 날 이런 사실을 털어 놓았다고 한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일본군 위안부였으며 그녀의 수술비 마련을 위해 매춘에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감독이 <낮은 목소리>를 제작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낮은 목소리’ 3부작은 성노동자를 포함한 여성의 문제와 태초부터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던 것이다.



<낮은 목소리> 3부작은 여성의 몸에 대한 수난사라는 광의의 의미를 지니며, 이것은 지금까지도 명백하게 지속하는 현재의 문제다. 여성의 몸에 대한 수난사를 영속시키는 것은 어쩌면 부끄러움의 정치학인지도 모른다. <낮은 목소리>에서 가장 뼈아픈 말은 할머니들의 입에서 내뱉어진 ‘부끄럽다’라는 단어였다. 할머니들은 시위에 나서는 것이 어려웠던 건 당신들이 겪은 일을 말하는 것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 부끄러움은 대체 누가 만든 것일까. 왜 부끄러움은 늘 피해자의 몫이 되는 걸까. 정작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은 그들을 부끄럽게 만든 시선에 있는데도 말이다. 우리가 일본 식민지의 역사를 ‘우리의 부끄러운 역사’라고 말할 때, 거기에는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니 어느 정도는 덮어두어야 한다’는 은폐에 대한 강요가 숨겨져 있지는 않나. 부끄러운 역사는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였으며 한국 여성들이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다는 데 있지 않다. 부끄러운 것은 아직도 일본 식민지의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데 있다. 위안부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일본은 피해 보상은커녕 제대로 된 사과조차 하지 않고 있다. 할머니들이 그렇게 믿는다고 힘주어 말한 한국 정부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이 부끄럽다.

경순 감독의 <레드 마리아 2>(2015)는 어쩌면 이 부끄러움을 파생시킨 근본으로 좀 더 들어간 결과물일 것이다. 그 부끄러움은 강제에 의한 것이든 자발적인 것이든 여성이 자신의 성경험을 드러내는 것을 금기시하는 문화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 위안부의 ‘소녀’ 이미지를 강조할 때 종종 느끼게 되는 불편함은 소녀를 통해 그것이 강제에 의한 것이었음을 강조할 때야만 부끄럽다는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다. 우리는 당신들이 순진한 소녀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지 않았어도 당신들이 당한 일은 부당하다고 말해야 한다. ‘낮은 목소리’ 3부작은 늙고 병든 소녀의 현재를 우리가 사유해야 할 ‘소녀’의 이미지라고 여긴다. <레드 마리아 2>는 ‘낮은 목소리’ 3부작 내에서 숨어있던 맥락을 크게 증폭시켜 성노동자로 사는 현재의 젊은 여성들을 ‘소녀’ 이미지에 새롭게 편입시키려고 한다. 소녀와 할머니가 자연스럽게 연관성을 가진 <낮은 목소리>와는 달리 <레드 마리아2>의 경우는 할머니-소녀 대 성노동자-소녀의 구도 역시 녹아 있어 좀 더 복잡한 양상을 띤다. 이에 대한 논의를 위해서는 또 다른 자리가 필요할 것 같다.



끝으로 <낮은 목소리>의 마지막 무렵에 등장한 ‘수요집회’ 장면을 언급하면서 이야기를 마무리하려 한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할머니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있다. 카메라와 집회하는 할머니들 사이로 차들이 무심히 지나다닌다. 카메라가 느리게 패닝을 하면 할머니들 맞은편에 대사관 건물을 에워싼 한국 경찰의 모습이 보인다. 이 장면은 우리가 선 위치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할머니들 곁에 서고 싶어 하지만 실제로는 반대편에 있거나, 그저 무심히 지나치거나, 멀리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은 아닐까. 과연 나의 자리는 어디일까. 한국 대 일본의 프레임만으로 접근할 수 없는 복잡한 정치학이 이 한 컷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김소희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