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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Review

[Review] 빌 어거스트의 <정복자 펠레>

덴마크 출신 감독 빌 어거스트가 연출하여 그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정복자 펠레>는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이다. 19세기 말 덴마크의 한 시골 농장으로 배경으로 한 영화는 노년의 스웨덴 노동자 라세(막스 폰 시도)와 그의 어린 아들 펠레(펠레 베네가르)가 일자리를 얻기 위해 덴마크로 건너오면서 시작된다. 브랜디가 물보다 싸고 건포도가 들어간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곳, 아이들이 일하지 않고 하루 종일 놀 수 있는 곳이라고, 라세는 덴마크로 향하는 배 안에서 어린 아들 펠레에게 희망을 불어넣는다. 그러나 정작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마구간이나 다름없는 거처,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일상이 된 가혹한 농장의 노동과 인간이기보다 짐승에 가까운 취급을 받는 농노나 다름없는 삶이었다.


덴마크의 저명한 사회주의 작가 마르틴 안데르센 넥쇠의 동명소설 중 1부에 해당하는 주인공 펠레의 어린 시절을 그린 <정복자 펠레>는 19세기 말 농장을 소유한 부르주아와 노동자 간의 불평등한 관계, 그로부터 파생한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에 주목하고 있다. 한 폭의 회화처럼 쓸쓸하면서도 아름다운 북구의 시골 풍광은 인물들이 처한 상황과 정서를 반영하는 심리적 배경으로 존재한다. 탁월한 촬영이 돋보이는 영화는 펠레의 시선으로 농장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준다. 지주의 아들과 사랑을 한 대가로 갓 태어난 자신의 아이를 살해하고 감옥에 가야했던 젊은 처녀 노동자, 끊임없이 바람을 피워대는 남편이 마침내 자신의 어린 조카까지 손을 대자 광기에 휩싸여 남편의 성기를 잘라버린 지주의 아내. 라세와 펠레가 머물고 있는 농장은 초기 자본주의 시대를 감싼 모순과 분노, 새로운 시대를 향한 희망과 좌절이 어지러이 섞인 용광로로 묘사된다. 미래에 대한 희망과 현재의 삶에 대한 분노를 생생하게 뿜어내는 펠레와 달리 아버지인 라세는 펠레 앞에서는 대담한 척 하지만 현재의 비루한 삶에 대항할 의지나 용기가 없는 평범한 하층민이다.


악랄한 농장 감독관에게 가장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노동자 에릭은 펠레에게 희망의 단초를 제공하는 인물이다. 2년 후 품삯을 받으면 미국으로 가는 배에 올라 세계를 돌아다니겠다는 그의 희망은 어린 펠레에게 그대로 전이된다. 감독관의 불공정한 태도를 참다못해 쿠데타를 일으키던 에릭이 그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불의의 사고로 머리를 다치면서 그의 원대한 꿈은 사라진다. 노동자들의 리더였던 에릭이 바보가 되고, 은밀히 감독관에 의해 어디론가 끌려가는 모습을 본 펠레는 안주할 수도 있었던 농장에서의 삶을 뒤로 한 채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 반항적이면서도 유약한 펠레의 여윈 얼굴 위에는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에서 보았던 소년 장 피에르 레오가 겹쳐진다. 그러나 <400번의 구타>의 마지막 장면에서 레오가 절망적으로 얼어붙었던 것과는 달리 펠레는 차가운 바닷가를 부지런히 걸어 어디론가 사라진다. 세상을 정복하고 전진하리라는 소년의 의지가 고스란히 영화의 의지로 표출되는 순간이다.

(by 장병원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