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특별전/청춘이 말하고 카메라가 듣다: 한국 다큐멘터리 특별전

[Feature] 기성세대의 훈수에 대한 청년세대의 응답

 

2007년 출간된 『88만원 세대』는 한국사회에 파란을 일으키며 비로소 엄연히 실존하나 제대로 이야기되지는 못했던 ‘청년’ 문제를 사회 전면에 부각시켰다. 비판도 한계도 숱하게 제기됐지만, 청년노동의 문제가 중요한 사회적 담론으로 제기되는 데에 이 책이 세운 공을 부정할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세대론은 계급론을 반동적으로 대체하려는 퇴행’이라는 근본주의적 비판도 있지만, 이는 세대론의 유의미한 부분 모두를 부정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다소 과한 비판이 아닌가 싶다. 다만, 이후 형성되고 확장된 세대 담론에서 유독 ‘청춘’, ‘청년’이라는 말이 부각되는 데에 다분히 ‘노동’과 ‘계급’이라는 개념에 대한 거부감이나 배제가 전제되고 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는 없다. 사회의 양극화가 극심해진 상황에서 빈곤과 계급의 고착이 이미 청년기부터 심각한 정도로 드러난다는 현실에 대한 성찰이, 유독 ‘특정 세대의 고난’으로 부각되면서 그로 인해 ‘아프고 고통스러운’ 청춘들에 대한 소위 ‘힐링’이 대안으로 대두되는 현실이 분명히 존재한다. 청년 노동뿐 아니라 근래 국내에서 발생한 모든 노동 관련 이슈들 역시 사정은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는 “『88만원 세대』는 사실 계급론에 ‘세대’라는 당의정을 입힌 것”이라는 공저자 중 한 명의 고백처럼 원래 책의 의도와도 거리가 멀다. 그러나, 어쩌면 이러한 고백 자체가 그런 식의 ‘노동이라는 개념을 거부하는 분위기’에 대한 반응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88만원 세대』이 발간된 지 5년이 지난 최근에 완성된 영화 <청춘유예>는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애초에 책이 청년들에게 건넨 ‘짱돌을 들자’라는 제안이 일각에서 ‘여전히 나이브한 현실 파악에서 나온 ‘꼰대들의 훈계’’로 받아들여진 면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본다면 더욱 그러하다. <청춘유예>는 말하자면 ‘바리케이트를 치자, 짱돌을 들자’라는 제안에 대한 청년세대의 응답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청춘유예>에서 인터뷰이로 등장하는 청년들의 다양한 사연은 현재 한국의 일반적인 청년들이 겪는 모습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학자금 대출이자를 갚지 못해 신용불량자가 되고 신용불량자이기 때문에 다시 비정규직과 불안정 노동을 전전할 수밖에 없거나, 좋아하는 영화 일을 하기 위해 알바를 하면서 ‘프리랜서’가 아닌 ‘호출노동자’로 자신을 정의하거나, 운 좋게 공기업에서 직접 뽑는 ‘마지막 인턴’으로 입사했지만(이후 ‘인턴’들은 모두 파견직이나 계약직으로 대체되었다) 일을 배우기는커녕 온갖 잡심부름에만 치이거나, 콜센터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면서 자신을 ‘자동화된 기계’로밖에 인식하지 못하거나… 부모의 지원 하에 스펙 쌓기에만 골몰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나마 형편이 나은 건지도 모르겠다. 흔히 미래를 모색하며 방황과 도전, 시행착오가 허락되는 ‘책임 유예’ 기간이었던 ‘청년기’의 특권이 ‘정신나간 배부른 짓’이 돼버린 듯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는다’는 한숨과 단 한 번의 실수와 실패로 평생의 계급이 갈려 고착돼 버릴지 모른다는 공포를 품은 채 분투하는 청년들에게, ‘고통은 청춘의 필연적 특권’이라는 식의 낭만적인 명제는 일고의 가치가 없는 비아냥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청춘유예>가 인터뷰하고 있는 이들, 그리고 이들 앞에서 카메라를 든 감독은, 그러나 혼자서 고립돼 좌절하다 절망하는 대신 ‘청년유니온’, 즉 청년 비정규직들의 노조에서 함께 활동을 하는 데에서 비로소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거나 돌파구를 찾는다.

 

아르바이트와 비정규직, 즉 불안정 노동으로 구직과 실직을 반복하는 이들은 ‘노동자’로 제대로 인정을 받기도 힘들다. 이들을 포괄하는 청년유니온은 법적 노조로 인정받는 것조차 지난한 과정을 겪는다. 구직자, 실업자가 포함돼 있다 하여 노조로서의 요건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노조설립 신고가 반려되기를 몇 번째, 이들은 행정소송을 내고 두 명씩 짝을 지어 노조설립 신고 ‘투쟁’을 계속함으로써 결국 법원에서 신고 반려 무효 판결을 받고 비로소 노조 필증을 받기에 이른다. 이와 별개로 기본소득 보장, 시간당 최저임금 인상, 미지급된 주휴수당을 받기 위한 법적투쟁, 30분 배달제 폐지 등, 이들이 그간 활발하게 활동해온 이슈들은 이른바 ‘알바 인생’들에게 절대적인 생존 조건들이다. 힘을 합쳐 함께 싸우고 이겨본 경험은 사람을 더욱 풍요롭게 만든다. 고용노동부의 계속된 노조설립 신고 반려에서 승소했던 경험, 카페베네를 상대로 ‘미지급 주휴수당 지급’을 위해 문제를 제기하고 법적 고발을 했다가 ‘교섭’으로 이어진 경험은 이들에게 중요한 승리이자 자산으로 남았다. 그 결과 영화의 주인공 중 한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이들은 “혼자라는 외로움에서 벗어나 위안을 얻었”고, “구조적인 문제라는 사실을 인식하며 이전보다 자신을 덜 탓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말하는 ‘출세’와 ‘사회적 성공’은 아닐지라도, 이들이 다시 미래를 꿈꾸고 길을 발견하려는 힘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각각의 인터뷰이들이 이후 어떻게 자신의 새로운 길을 찾았는지 보여주는 희망찬 에필로그를 보면서도, <아무도 꾸지 않은 꿈>과 <나의 교실>에 나왔던 또 다른 청춘들의 모습이 계속 눈에 어른거려 쉽게 웃을 수가 없다. <나의 교실>에서 “얼탱이가 없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며 주변 친구들과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내내 에너지와 웃음을 주었던 이는, 결국 취업에는 성공했지만 몇 달 뒤 “똑같이 입사했으나 대졸 신입들과 차별 대우를 받는다”며 눈물을 지었다. <아무도 꾸지 않은 꿈>에서 인터뷰에 응했던 20대 중반의 여성들은 “‘한번 공순이는 영원한 공순이’라는 말의 뜻을 스무 살 적엔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 내가 공장밖에 갈 수 있는 곳이 없더라”라고 고백한다. 공장에서 겪었던 온갖 부당한 일들과 ‘미래 없음’에 우울한 마음을 토로하는 이들에게 출구는 없어 보인다. 30대 초반의 나이로 <청춘유예>의 인물들과 비슷한 또래였던 <아무도 꾸지 않은 꿈>의 또 다른 여성은 정규직으로 11년을 일했지만 정리해고를 당하고 천막에서 농성투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결국 공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들은 노조를 만날 수 없었거나 개인적인 해결책을 찾았거나, 노조와 함께 싸웠지만 결국 패배했다. 하지만 이들에게 ‘구조적인 모순에 함께 힘을 모아 싸워야 한다’는 말을 던지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다. 청년이든 중년이든, 영화를 보는 우리들 누구나 마찬가지다. 이보다 앞서 만들어진 2009년 영화 <개청춘>에서 이 ‘쉽지 않음’이 이미 그려진 바 있다.

 

다만 한 가지 희망이 있다면, (이번 상영작 중 <간지들의 하루>를 제외하면) 다르면서도 비슷한 이 청춘들의 모습들을 담은 이들이 역시나 비슷한 나이 또래의 청춘들이란 사실이다. 누군가는 분노로, 누군가는 희망으로, 또 누군가는 연민과 공감으로 영화를 만들었지만, 직접 자신들의 삶과 주변 친구들의 모습을 스스로 카메라에 담고, 직접 말을 하고 듣는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이를 통해 스스로 위로를, 나아가 해결책을 모색하고 조직하고 있는 것이다. 함께 말을 하고 듣고 삶을 나누고 영화를 만듦으로써, 즉 기록함으로써 연대가 만들어지고 있는 과정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우리 시대의 청춘들은 부당한 폄하와 비난과 성마른 재촉에 시달리면서도 이미 그들만의 방식으로 분투하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우리의 예상보다도 훌쩍 더 앞에서.

 

글/ 김숙현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코디네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