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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2019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친구들이 들려준 영화 이야기: <사울의 아들> 상영 후 김일란 감독

[2019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친구들이 들려준 영화 이야기

올해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는 모두 여덟 명의 친구들이 참여해 주었다. 친구들은 자신이 추천한 영화를 함께 본 뒤 관객들과 친밀한 대화를 나누었다. 이들이 들려준 영화와 극장 이야기들을 일부 옮겨보았다.


◆2월 16일(토), <사울의 아들> 상영 후 김일란 감독

김보년(프로그래머) <사울의 아들>을 극장에서 보니 좀 더 ‘생생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서 이 영화가 제기하는 문제들이 저절로 더 날카롭게 다가왔다. 

김일란(감독) <사울의 아들>은 2016년에 개봉했는데 그때는 개인적인 일이 있어서 극장에서 보지 못했다. 이번에 극장 스크린으로 보고 싶어 추천을 했다. 보셨다시피 이 영화의 화면 비율이 1.37:1이다. 이 비율의 영화를 극장에서 볼 일이 별로 없고, 상영한다고 해도 마스킹을 잘 해주는 극장은 찾기 힘들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텔레비전이나 컴퓨터의 작은 화면으로 볼 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더 잘 보이는 경험도 했다.

다른 작품 이야기를 먼저 하고 싶다. 이 영화를 보기 전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읽었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진짜 영화적이라고 생각했다. 다들 아시겠지만 이 소설은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의 참혹했던 상황을 재현한다. 그중 한 챕터의 인칭이 “너”이다. ‘너는 ~한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진행한다. 소설에서 인칭의 문제는 굉장히 예민한 문제이고 2인칭, 즉 ‘너’라는 인칭은 그리 많이 사용하지 않는 걸로 알고 있다. 『소년이 온다』에서 만난 ‘너’라는 인칭이 영화적이라는 것은 ‘영화의 시선’이 많은 경우 ‘너는’에 가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카메라는 현재진행형으로 ‘너는 ~을 하고 있다’를 보여준다. 『소년이 온다』를 읽으면서도 카메라의 워킹으로 주인공을 따라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러다 다음 챕터에서 인칭이 ‘나는’으로 바뀐다. 그때는 다시 한 번 화자의 감각을 내가 생생하게 느끼며 책을 읽게 되더라. <공동정범>을 끝낸 다음 이 소설을 읽었는데 그때 내가 만들고 싶었던 영화도 이런 감각의 영화가 아니었을까 생각을 잠시 했었다. 1인칭과 2인칭의 차이. 고통의 감각을 다른 방식으로 느끼게 만드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걸까, 자문하기도 했었다.

그 뒤 <사울의 아들>을 봤다. 나는 이 영화의 오프닝 장면을 보며 『소년이 온다』의 첫 번째 챕터를 읽는 것 같았다. 카메라는 끊임없이 사울이란 인물에 집중한다. 그리고 사울을 바라보는 카메라가 나, 혹은 우리라고 느끼기 시작하자 이 영화가 어느 순간 현재형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너는 지금 시체를 처리하고 있다.” 같은 문장을 읽는 것 같았다.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끊임없이 ‘너(사울)’를 쫓고 있지만 관객인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이 속에서 매우 강렬한 공포와 답답함을 느꼈다. 내가 왜 이 폐쇄적인 상황을 견뎌야 하냐고 자문했다. 고통을 다르게 감각하게 만드는 이 영화를 극장에서 관객들과 같이 보고 싶었다.

김보년 감독님이 『소년이 온다』 얘기를 미리 하셔서 나도 읽어 보았다. 광주를 다룬 소설이란 것만 알고 있었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폭력을 묘사하는 방식이 굉장히 강했다. 내가 직접 경험하지 못한 타인의 고통이 생생하게 그려졌을 때 내가 과연 이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도 되는지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소년이 온다』는 소설이라서, 즉 문자를 통해 전달하기 때문에 작가가 쓴 만큼만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사울의 아들> 같은 극영화는 이미지를 재료로 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과잉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영화를 만드는 창작자로서 이 영화의 어떤 장면들이 인상적이었는지 궁금하다.

김일란 어디까지 보여줄 것인지의 원칙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사운드를 어떻게 쓸 것인지 결정하고, 후경에 등장하는 시체를 어떻게 얼마만큼 보여줄 것인지에 대한 원칙을 정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문제다. 자료를 찾아봤더니 감독은 촬영감독과 논의하면서 사울이 볼 수 있는 것만 찍겠다는 원칙을 두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전지적 시점의 숏, 또는 소위 ‘설정 숏’이 등장하지 않는다. 오로지 사울이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으로만 영화를 구성하는 게 첫 번째 원칙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영화의 가장 핵심적인 연출 중 하나는 ‘포커스 아웃’이다. 아마 주인공이 느끼는 실제 감각을 포커스 아웃을 통해 구현한 게 아닌가 한다. 

나도 용산 참사를 다큐로 만들면서 많이 조심스러웠다. 어떤 컷을 선택할지 고민하며 혹시나 이 장면이 ‘선정적’으로 보이지는 않을까 무척 많이 고민했다. <알제리 전투>(1966)를 만든 질로 폰테코르보 감독이 <카포>(1960)라는 홀로코스트 소재 영화를 만들었었다. 이 영화에서 수용소에 갇힌 소녀가 철조망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는 장면이 등장한다. 감독은 이 장면을 트래킹숏으로 연출했다. 평론가이자 감독인 자크 리베트는 이 장면을 ‘천박하다’고 평가했다. 한 인간의 고통을 어떻게 스펙타클한 대상으로 만들 수 있는지 질문하며 강하게 비판했다. 아무리 실재했던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다루더라도 폭력적인 상황을 재현하며 누군가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건드릴 때 감독은 늘 고민할 수밖에 없다. <사울의 아들> 역시 그런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