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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시네바캉스 서울

[2016 시네바캉스 서울] 러시아 야쿠티아 영화에 대한 소고

러시아 야쿠티아 영화에 대한 소고


<길 잃은 사람들>


 러시아는 소비에트 연방(이하 ‘소연방’으로 칭함)이 해체된 현재도 여전히 다민족 국가이다. 따라서 이 나라의 영화 역시 슬라브 문화, 혹은 러시아 문화만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러시아’라는 나라 전체는 에이젠슈테인, 도브젠코, 푸도프킨, 그리고 쿨레쇼프 같은 무성영화 시기 거장들의 영향을 받고 있으면서도 그 내부에는 러시아 문화와 구별되는 자기 지역만의 독특한 정서를 담아내는 자치 공화국이 존재한다는, 영화 역사에서 보기 드문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최근 러시아 지역 영화가 주목받게 되는 상황은 역설적이다. 이 현상은 오히려 소연방 붕괴의 덕택으로 가능했다. 소연방 시기 당국은 15개 연방 공화국 중의 하나였던 러시아 영화뿐 아니라 다른 연방 공화국들, 즉 중앙아시아 5개국, 그루지야, 우크라이나 등의 영화에도 신경을 써야 했다. 그래서 러시아는 자신들의 영화 역사를 ‘러시아 영화사’ 혹은 ‘소비에트-러시아 영화사’라고 부르지 않고, ‘자국自國 영화 역사(Istoriya Otchechestvennogo kino)’라는 나름 절묘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연방 공화국 중의 하나였던 (러시아 영화의 주변부 중의 주변부에 불과한) 자치 공화국의 영화까지 당국이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따라서 러시아의 자치 공화국의 영화 역사가 본격적으로 언급된 시기는 소연방 붕괴 이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러시아 자치 공화국 영화 역사가 이 시기부터 시작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러시아 자치 공화국 영화 역사는 엄연히 러시아 영화사의 일부로서 무성영화 시기부터 시작되었다. 최근에는 1930년대에 추바쉬 공화국에서 제작했던 영화가 발굴되었고, 필자를 포함한 몇몇 영화학자들은 이미 이 작품들을 보았다. 러시아-소비에트 영화사의 알려지지 않았던 부분인 이러한 작품들은 영화 역사의 일부로서 조만간 복원될 것이다.

러시아의 일부 자치 공화국은 자체 스튜디오도 설립하였는데, 대표적인 예가 사하와 타타르스탄 자치 공화국이다. ‘사하 필름’ 혹은 ‘타타르 필름’에서 제작되는 영화들은 야쿠티아국제영화제와 카잔국제영화제 등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이 지역 영화들은 대부분 디지털로만 제작되고 있기 때문에 권위 있는 국제영화제에 진출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디지털 제작이 대세가 되면서 작품의 질만 보장된다면 이 지역의 영화도 국제 평단의 본격적인 조명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악마들>


학술 연구 측면에서 주목할 점은 러시아 지역 영화가 이미 수준 높은 작품들을 발표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젊은 영화인들이 열정적으로 영화를 만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러시아 국내외 평단의 본격적인 주목을 받고 있지 못했다는 점이다. 역으로 보자면, 한국 학계 혹은 영화제에서 이 지역 영화를 조명하고 소개한다면, 그럼으로써 이 지역 영화가 해외 영화제에서 의미 있는 평가를 받게 되고 유능한 작가가 등장하게 된다면, 그 ‘발견자’는 한국 학계 혹은 한국 영화제가 될 것이다.

특정 지역의 영화, 특히 미지의 지역 영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선 취약한 점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사하 공화국 출신 젊은 감독들은 주로 야쿠티아에서 영화를 제작하고 있는데, 이 작품들의 대사는 민족어이며 러시아어 자막으로 소개되고 있다. 이러한 언어 문제는 러시아 국내에서도 일종의 장벽이 된다. 공용어인 러시아어에 익숙한 관객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러시아 배급업자들이 전국 개봉을 꺼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장벽은 국제 영화제 진출과 관련해서도 동일하다. 왜냐하면 러시아어가 아닌 민족어 대사에 러시아어 자막으로 소개되는 영화들을 의욕적으로 해외에 소개하려는 모스크바 프로그래머들은 드물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랑>


또한 영화가 공용어인 러시아어가 아니라 민족어로 제작된다는 것은 작품이 러시아 전체 혹은 세계적인 보편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치 공화국 주민들을 우선적으로 대상으로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즉 20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야쿠티아 영화는 외부로부터의 시선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영화는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장르였으며 2005년만 하더라도 이 지역에서만 7편의 장편 영화가 제작되었다. 이 작품들 대부분은 저예산 영화였지만 지역 내에서 상당한 흥행을 거두었다. 흥행의 가장 큰 이유는 이 지역 주민들이 자신들의 언어로 된 영화를 원했기 때문이다.


이 무렵부터 사하 공화국에서는 국영 스튜디오인 ‘사하 필름’과 몇몇 독립 제작사들 간의 경쟁이 시작되었다. 초기 사하 공화국의 영화는 예술 영화가 프로듀서가 중심 역할을 하는 상업 영화와 경쟁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단순한 구분은 너무 안이한 접근법일 것이다. 예를 들어 사하 필름에서 제작되는 영화들은 표면적으로는 단순한 구도의 상업 영화처럼 보이지만 내부적으로는 다층적인 의미 구조가 교차하는 성찰적인 측면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사하 필름’의 영화 제작에는 전략적으로 독립 제작사들의 영화 못지않게 프로듀서의 역할이 강조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영화의 계몽적인 기능도 수행하는 것인데, 예를 들자면, 이런 종류의 영화에서는 도덕성의 붕괴가 지적되거나 공화국의 긍정적인 이미지가 강조되었다. 그러니까 사하 공화국은 범죄, 즉 매춘 혹은 알콜 중독자들의 온상이 될 필요가 없다는 점을 영화에서 지적하는 것이다.

야쿠티아 영화의 또 다른 특징은 지역 문학 작품의 영상화이다. 이런 경향은 학생들이 더 이상 지역의 고전을 잘 읽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이번에 소개되는 야쿠티아 영화들이 가장 완성도 높은 영화들은 아니다. 비교적 최신작들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가장 우수한 작품들 일부가 영화제 출품 관계로 소개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개되는 작품들에서 흥미로운 부분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현재 야쿠티아 영화계에서 가장 재능 있는 감독으로 평가받고 있는 세르게이 포타포프 감독의 <신(神)의 말(馬)>에 대해서 간략하게 언급해 보고자 한다.


<신의 말>


이 작품은 2015년도 야쿠티아국제영화제에서 야쿠티아 영화로는 처음으로 대상을 받았다. 작품은 지역의 축제 기간 중의 하루를 그리고 있는데, 지역 축제를 홀로 방문한 한 소년이 사랑에 빠지고 지역 청년들에게 폭행을 당한다는 단순한 이야기이다. 영화는 형식적으로 다큐멘터리와 극 영화를 혼합하고 있으며, 사랑과 폭력이라는 보편적인 주제와 지역의 고유한 민속과 그것을 배반하는 젊은이들의 폭력성을 흑백으로 빼어나게 묘사하고 있다. 또한 영화는 민속 음악과 록 음악, 폭력에 물든 젊은이들과 순수한 영혼을 유지하고 있는 주인공, 축제와 가혹한 현실, 신과 인간의 문제들을 유기적으로 조화시켜서 다루고 있다.

이렇듯 야쿠티아 영화를 비롯한 러시아 자치 공화국들의 영화가 일종의 돌파구를 찾기 위해서는 민족의 고유한 정서를 화면에 구현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러시아어가 아닌 민족어 사용이라는 국내외적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신들만의 고유한 정서에 보편성을 획득하는 슈제트(syuzhet : 체계)를 실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 지점에서 다시 에이젠슈테인의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는 영화가 “개별적인 묘사에 전념하되, 그러한 ‘개별성’이 ‘보편성’의 수준에 도달해야 한다.”고 자신의 저서 『몽타주』에서 언급한 바 있다. 러시아 자치 공화국의 영화가 유념해야 할 점은 바로 이 지점에 있을 것이다.


홍상우 경상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