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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2016 스페인 영화제

[2016 스페인 영화제] 아름다움이 주인공인 영화 - 알베르 세라의 <내 죽음의 이야기>

[2016 스페인 영화제]


아름다움이 주인공인 영화

- 알베르 세라의 <내 죽음의 이야기>



자기 영화와 딴판으로 알베르 세라는 말이 많은 감독이다. 질문을 하나 던지면 대답이 끝도 없이 흘러나온다. 2012년 전주에서 그를 만났을 때, 그는 한가한 일정으로 인해 심심하다고 했다. 그래서 오전 오후 내내 그와 길고 긴 이야기를 나누었고, 나중에는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였다. 그의 열정을 감안하면 한국 관객은 그에게 박한 편이다. 어지간한 외국 영화들이 수입돼 상영되는 요즘, 해외 유수의 영화제에서 소개된 7편의 세라 영화 가운데 국내에서 개봉한 작품은 한 편도 없다. 2013년 작품 <내 죽음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전주에서 만났을 당시, 그는 막 영화 한 편의 촬영을 마쳤으며 곧 편집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했다. 카사노바와 드라큘라가 만나는 이야기라는 말에 솔직히 기가 막혔다. 돈키호테, 동방박사도 모자라 아예 소설을 쓴다고 생각했다. <내 죽음의 이야기>는 이듬해 로카르노영화제에 출품돼 황금표범상을 받았고, 그해 부산영화제에서 상영됐다. 그게 끝이었다.


<기사에게 경배를>(2006)에서 돈키호테와 산초를, <새들의 노래>(2008)에서 성경의 인물을 불러내 특유의 로드무비를 만들어냈던 세라이기에 <내 죽음의 이야기>의 소재는 그리 새로울 게 없다. 실존했던 인물이 허구의 존재와 조우한다는 것, 여성들이 주요 배역으로 등장한다는 것 정도가 다르다. 눈에 띄는 차이점은 형식적인 면에서 찾아야 한다. 처음으로 시네마스코프 프레임을 사용했고(촬영은 4:3 비율로 했다), 길을 떠돌던 그의 영화에 실내 장면이 대폭 들어왔으며, 무뚝뚝하던 인물들이 수많은 대사를 쏟아낸다. 여러 음악들을 삽입한 것도 이채로운데, 그중 놀라운 건 필리프 헤레베헤가 지휘한 포레의 “빌레르빌 어부의 미사”가 나오는 부분이다. 마치 곁에서 연주가 벌어지는 듯 인물들이 음악에 직접 반응하도록 만들었다.



그럼에도 <내 죽음의 이야기>는 여전히 세라의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디지털 시네마는 편집 과정에서 비로소 완성된다고 믿는 그는 이번에도 440여 시간의 촬영분에서 148분짜리 영화를 건져냈다. 비전문 배우를 기용하는 것도 변함없다. 이제는 세라 영화의 인장이 된 유이스 세라는 카사노바의 하인 폼페우 역으로 다시 출연했고, 카사노바 역으로는 바르셀로나에서 아트 큐레이터로 활동 중인 비센크 알타이오를 배우로 데뷔시켰다. 장난기도 죽지 않았다. 80여 분께에 나오는 드라큘라와 카르멘의 대화 장면이 대표적인 예다. 두 배우는 장시간에 걸쳐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고, 세라는 그중에서 무작위로 질문과 대답을 골라 이어 붙였다. 앞과 뒤가 맞지 않아 어긋난 대화의 느낌이 나는 건 당연하지만 바로 그게 세라의 의도다.


<내 죽음의 이야기>라는 제목은 카사노바의 자서전 『내 삶의 이야기』를 뒤집어놓은 것이다. 『내 삶의 이야기』의 도입부에 카사노바는 1797년이라는 연도와 72세라는 나이를 밝히고 있으므로 <내 죽음의 이야기>라는 가상의 이야기는 늦어도 1790년대 이전의 어느 시점이 배경이다. 문학과 역사 등을 공부한 세라가 18세기에 대해 어떤 코멘트를 하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그는 영화의 메시지를 경계하는 사람이다. 여기에서 섣불리 주제를 읽느니 그의 농담에 크게 웃어주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른다. 그는 자기 영화가 비평 너머에 존재한다며 평론가에게 ‘unfuckable’이라고 격하게 일러준 바 있다. 쉽게 가지고 놀지 말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내 죽음의 이야기>를 봐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성, 쾌락, 욕망 등의 빤한 주제를 말하는 대신 다른 길을 찾는 게 낫다. 자서전을 쓰기 전 카사노바가 단어 자체에 관심을 쏟는 것처럼, 세라는 디지털의 언어와 표현 방식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문득 드러난 이미지를 빌려 시간과 공간 너머로 말을 건네고, 여정 속에서 인물의 미묘한 변화에 주목한다. 카사노바가 여자의 엉덩이에 파묻혀 노는 장면이 한 예다. 카메라는 인물보다 치마 뒤로 흩날리는 먼지를 집중적으로 포착한다. 끊임없이 먹어대던 카사노바가 변비의 고통과 배변의 희열을 동시에 표현하는 얼굴을 드물게 클로즈업으로 담기도 한다. 어쩌면 도구에 집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게 세라가 (만약 그런 게 있다면) 영화의 본질에 접근하는 방식이다.


다 떠나서 <내 죽음의 이야기>는 디지털로 찍은 아름다운 영화 중 한 편이다. 세라는 인터뷰에서 종종 이 영화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곤 한다. 아름다움? 특히 스위스에서 루마니아로 넘어가는 2부의 도입부가 그러하다. 카사노바는 폼페우와 마부가 이끄는 마차에 실려 이동한다. 숲에 들어서자 마차는 좁고 험한 길 때문에 심하게 흔들리고, 시간의 경과에 따라 빛은 미묘하게 반응하며 카사노바의 심리를 전달한다. 가히 디지털이 그린 진경 중 한 장면이다. 그 밖에도 <내 죽음의 이야기>의 많은 장면은 어둡거나 실내를 배경으로 찍혔으며 광량은 극도로 절제되어 있다. 스크린으로 보지 않고는 진면목을 느끼기 힘든 작품이다. 아마도 이번 서울아트시네마에서의 상영이 스크린으로 접하는 거의 마지막 기회가 아닐까 싶다. 그게 절대로 놓치면 안 되는 이유다.


이용철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