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야화>(미구엘 고메스, 2015)의 엔딩 크레딧을 보며 한 생각



미구엘 고메스의 <천일야화>를 보았다. 상영 시간이 6시간 21분인 이 영화는 그만큼 많은 이야깃거리를 갖고 있다. 이 글에서는 <천일야화>의 엔딩 크레딧을 보며 했던 생각을 짧게 정리하고 싶다.

영화를 감상할 때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조건 중 하나는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한 장면도 빠뜨리지 않고 전부 보는 것이다. 어떤 영화를 ‘봤다’고 자신있게 말하기 위해서는 영화의 제목이 등장하는 오프닝부터 엔딩 크레딧까지 한 번에 다 보아야 한다. 조는 것은 당연히 허용되지 않는다. 극장에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앞 장면을 놓쳤다가 다음 날 놓친 장면만 따로 보아도 영화를 제대로 감상했다고 할 수 없다. 한 편의 작품이 갖고 있는 고유한 상영 시간을 자신의 몸으로 직접 경험하는 것 자체가 영화 감상의 핵심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작자의 의도에 따른 인터미션이 따로 없다면, 또는 몇몇 실험 영화처럼 상영 시간이 극단적으로 길지  않다면 한 편의 영화는 한 호흡으로 쭉 보아야 한다. 이야기의 감정과 편집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지켜야 할 태도이다.

이런 특징은 소설책을 읽는 방식과 비교하면 더욱 도드라진다. 물론 소설 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차례대로 읽는 게 기본이지만 세세한 조건은 영화보다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편이다. 책은 읽다가 잠시 쉬어도 괜찮고, 그 쉬는 시간이 좀 길어지더라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자기가 마음에 드는 부분만 반복해서 읽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독서라는 행위의 고유한 성격을 크게 해치지는 않는다. 하지만 유독 영화라는 매체에서는 전체를 한 번에 보는 행위가 감상의 유일하고 제대로 된 방법으로 여겨진다.

이런 태도에 대해서 몇몇 시네필들의 지나친 강박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나 역시 이 강박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또는 디지털 기술의 발전과 함께 ‘주요 장면 골라 보기’나 ‘스킵 skip’하면서 보기가 쉬워진 지금 이런 태도는 시대착오적인 생각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사 매체이자 시간을 다루는 매체인 영화의 경우에는 어떤 ‘바른 감상법’이 분명히 존재한다. 이는 필름을 영사기에 걸어서 ‘돌리는’ 영화 매체 고유의 작동 방식에 기댄 것이기도 하다. 일단 지나간 필름과 그 필름에 속해 있던 이미지는 처음부터 한 번 더 시작하지 않는 이상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어쩌면 필름 영사 시스템이 사라지고 디지털 상영이 압도적인 주류가 된 지금 영화 감상의 올바른 방식에 대한 고민은 역설적으로 더욱 깊어질지도 모른다). 관객은 이미지들이 1초에 24 프레임씩 사라지는 과정을 수동적으로 지켜보아야 하고, 이 과정은 결과적으로 관객에게 상실감을 안겨준다. 이 멜랑콜리한 감정을 느껴본 적이 있는 관객이라면 영화를 볼 때 조금은 더 긴장을 하고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이를 사라지는 이미지들에 대한 씁쓸한 집착이라 불러도 어쩔 수 없다. 영화는 필연적으로 어떤 특정한 감상 태도를 관객에게 강제한다.



그런데 <천일야화>의 엔딩 크레딧은 영화 보기에 대해 갖고 있던 기존의 내 생각을 기분 좋게 다시 재고하게 만들었다. 물론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호흡으로 보아야 한다’는 기본적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미구엘 고메스는 영화의 특정 장면만 따로 보는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유롭게 자기가 보고 싶은 부분만 보아도 별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천일야화>의 경우에는 나도 이 생각에 동의하는 편이다.

『천일야화』의 형식을 느슨하게 빌리고 있는 영화 <천일야화>는 총 11개의 에피소드, 에피소드 안의 작은 에피소드까지 포함하면 총 16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적인 단편 영화로 보아도 무방하다. 하지만 영화 전체의 구조를 파악하고 각 챕터별로 미묘하게 다른 고유한 뉘앙스를 비교할 때 이 작품의 의미를 더 잘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미구엘 고메스는 엔딩 크레딧에 각 챕터의 제목을 정리해 놓은 뒤 천연덕스럽게 각 챕터가 시작하는 타임코드를 적어 놓았다. “The Tears of the Judge - Minute 161”, “Hot Forest - Minute 339”와 같은 식이다(사진 참조). 심지어 노골적으로 소설책의 형식을 빌어 “INDEX”라고 써놓기까지 했다. 이 ‘목차’를 보고 있으면 자기가 원하는 챕터를 찾아 리모콘의 빨리 감기 버튼을 누르거나 동영상 플레이어 하단의 타임라인을 마우스로 클릭하는 관객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책에 끼워뒀던 책갈피를 찾듯이 영화의 원하는 부분만 쉽게 찾아보는 것이다. 물론 비디오 플레이어의 보급 이후 이런 모습이 그 자체로 새로운 건 아니지만 영화가 직접 이런 시도를 했다는 건 분명 흥미로운 일이다.

이는 지나친 해석이며, 여러 개의 이야기로 이루어진 『천일야화』라는 책을 영화화하는 과정에서 감독이 가볍게 시도한 장난일 뿐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영화와 ‘목차’라는 아이디어의 결합은 영화를 보는 새로운 방법에 대한 가능성을 살짝 내비친다. 아마 <천일야화>는 극장에서 보는 관객보다 DVD나 블루레이, 또는 컴퓨터에서 동영상 파일로 보는 관객의 수가 더 많을 것이다. 이들은 <천일야화>를 재생시킨 다음 감독의 친절한 안내와 함께 자신이 원하는 챕터만 바로 감상할 수 있다. 내 생각에 이건 <천일야화>를 ‘제대로’ 감상했느냐 안 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천일야화>를 ‘어떻게’ 감상했느냐에 대한 문제에 더 가깝다. 단적으로 말해 하루 종일 <천일야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는 관객도 있겠지만 <천일야화> 3부의 ‘되새 노래 컨테스트’ 에피소드만 보는 관객도 있을 것이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따지자면 전자의 관객만이 ‘영화를 봤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나는 후자의 관람 방식도 존중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천일야화』의 신밧드 이야기만 따로 읽어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닌 것처럼 영화 <천일야화>의 특정 에피소드만 따로 감상하는 것 역시 ‘잘못됐다’고 말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되새 노래 컨테스트’는 매우 아름다운 한 편의 다큐멘터리이며, 그 에피소드를 보며 받은 감동은 그 자체로 고유한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어떤 관객은 ‘판사의 눈물’ 에피소드를, 어떤 관객은 시망에 대한 이야기를 좋아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오늘 <천일야화> 1부를 본 뒤 한 달 뒤에 <천일야화> 2부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때 <천일야화>는 단일한 한 편의 영화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편의 다른 영화로 늘어날 가능성을 얻는다.

결과적으로 <천일야화>는 단순하고 유쾌한 방식으로 영화 보기의 다양한 방식에 대해 상상하게 만든다. 더 나아가, 어쩌면 미구엘 고메스는 <천일야화>를 통해 ‘영화-책’의 개념을 야심차게 기획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 기획을 통해 우리는 언젠가 지금과는 다른 태도로 영화와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 새로운 경험이 가져다 줄 (아직은 정확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즐거움을 <천일야화>를 통해 잠깐 상상해 보았다.


김보년 프로그램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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