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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한국영화, 새로운 작가 전략

2010~2011 한국 장편 데뷔작들이 도달한 신세계

2008년 부산국제영화제 당시 만난 이상용 프로그래머는 한국영화를 주목해서 볼 것을 주문했다. 특히 “장편 데뷔작 중에서 발견의 희열을 제공하는 작품이 많다.”고 전했다. 그의 말처럼 양익준의 <똥파리>, 손영성의 <약탈자들>, 백승빈의 <장례식의 멤버>, 노경태의 <허수아비들의 땅> 등 신인감독들의 작품이 두드러진 주목을 받았다.
2009년 부산에서도 이 프로그래머는 비슷한 뉘앙스의 말을 꺼냈다. “한국영화 중에서 새로운 경향의 작품이 많다.” 홍상수 영화를 연상케 하는 찌질한 연애담에 우디 알렌의 입담이 더해진 것 같은 소상민의 <나는 곤경에 처했다!>, 형부와 처제의 금지된 사랑을 다양한 회화적 묘사를 통해 풍요롭게 만드는 임우성의 <채식주의자>, 영화평론가로 유명한 정성일 ‘감독’의 데뷔작 <카페 느와르> 등 이들 영화는 한국영화사에서 보기 드문 종류와 시도의 것이었다.
그리고 2010년과 2011년, 주류의 한국영화가 철저히 계산된 연출과 규모의 경제학 속에 고만고만해진 사이, 고전적인 연출에 안주하지 않는 창의적인 영화문법, 사회가 처한 현실에 한눈팔지 않는 의식적인 이야기, 주류에 손 벌리지 않고(?) 자신만의 제작방식으로 개봉에 이르는 전략까지, 눈길을 끄는 한국영화의 목록은 주류 바깥에서 신투차세대(新偸次世代), 즉 장편 데뷔작을 발표한 ‘신진작가’들에 의해 다시 쓰이는 중이다.

참신한 재능이 일군 낯선 이야기

2010년과 2011년의 주목할 만한 데뷔작 중 <빗자루, 금붕어 되다> <이파네마 소년> <반드시 크게 들을 것> <혜화, 동> <파수꾼> 등등, 제목만 봐서는 도무지 무슨 이야기의 영화인지 감이 오지 않는다. 모르긴 몰라도, 주류에서였다면 이중 상당수의 영화가 아마도 원 제목을 고수하기가 쉽지 않았을 터. 극중 이야기를 쉽게 함축하는 제목이야말로 관객이 영화를 선택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믿음이 주류영화계에 팽배한 까닭이다. 바꿔 말해, 대부분의 주류영화가 예상 가능한 이야기 속에 연출을 운용하는 것에 반해 앞서 언급한 작품들은 가늠하기 힘든 제목과 설정 속에서 예측 불가능한 전개를 펼쳐가며 관객의 흥미를 돋운다.
예컨대, <빗자루, 금붕어 되다>는 신림동 고시원을 무대로 주인공 장필(유순웅)의 일상을 리얼한 필체로 묘사한다. 얼핏 제목과 극중 이야기가 전혀 연관되지 않지만 김동주의 말에 따르면, “빗자루는 고시원 총무의 상징이다. 빗자루로 늘 복도를 쓸기 때문에 장필의 처지를 빗댄 말이다. 금붕어는 그가 키우는 생명체다. 어항에 담겨있고, 갇혀 있다. 그 두 단어를 조합해서 만들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빗자루, 금붕어 되다>가 현실에 발을 디딘 이야기지만 고시원 속에 갇힌 장필의 처지는 초현실에 육박할 만큼 고난에 처한 상황임을 영화를 보면서 깨닫게 된다.
사실 <빗자루, 금붕어 되다>가 보여주는 배경과 말하는 내용은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이지만 그렇기에 또한 외면 받는 현실이다. 그것은 곧 상업성이 없다는 이유로 주류영화계가 꺼리는 소재로 작용해왔다. 하여 2010년과 2011년의 신투차세대들이 보여주는 영화는 무심히 지나칠 뿐 아니라 마주보기 꺼려하는 현실의 이면을 정면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참신한 종류의 재능이라 할만하다. 지금 한창 호평을 받고 있는 민용근의 <혜화, 동>은 18세에 낳은 아이가 살아있는지 모른 채 생활해온 23세의 ‘혜화’(유다인)를 전면에 내세운다. 어린 나이에 낳았다는 이유로 미혼모인 그녀가 ‘아이’(童) 때문에 이 땅에서 겪을 법한 고통과 절망을 ‘겨울’(冬)동안의 사랑이야기로 풀어간다. (이 작품은 또한 미스터리라는 장르적 요소를 취함으로써 끝까지 관객의 흥미를 붙들어 맨다.) 2010년의 가장 충격적인 데뷔작으로 평가받는 장철수의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은 여성을 착취하는 폭력적인 시스템에 대한 사회구성원의 방관을 비판한다. 동시에 이를 향한 복남(서영희)의 잔혹한 복수를 하이라이트처럼 전시하며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들이 스크린을 통해 새로운 이야기를 길어 올린다는 사실은 오랫동안 한국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서술의 시도내지는 장르의 부활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백승화의 <반드시 크게 들을 것>, 장건재의 <회오리 바람>, 홍영근, 장윤정, 오영두, 류훈의 <이웃집 좀비>, 이응일의 <불청객> 등이 속할 텐데 비슷한 구석 하나 없이 그들 각자의 장르와 이야기를 택하고 있어 흥미롭다. 인디밴드 ‘타바코 쥬스’의 드러머 백승화가 연출한 <반드시 크게 들을 것>은 인디밴드를 다룬 음악다큐멘터리다. 흔히 음악다큐멘터리라고 하면 연상되는 공연 영상 대신 극중 밴드 멤버들의 일상에 더욱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관객과의 정서적인 교감에 더욱 집중한다. 장건재의 <회오리 바람>은 2000년대 초반 귀여니로 대표되는 인터넷 소설의 영화화가 붐을 이뤘다가 빠르게 관객의 외면을 받은 이후 맥이 끊긴 한국 청춘영화의 계보를 잇는다. 당대 청소년의 심리를 반영한 영화는 고등학교 2학년생인 태훈(서준영)과 미정(이민지)의 사랑과 헤어짐을 묘사하되 감독의 섣부른 의견 개입 없이 방황하는 사춘기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며 청춘을 정의하는 것이다. 
<이웃집 좀비>와 <불청객>은 요 몇 년 새 주류영화의 한 축이 된 장르물을 따른다. 다르다면, 두 영화는 흥행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한국인의 정서와 괴리됐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무시당했던 좀비물과 SF를 과감히 차용했다. 물론 <이웃집 좀비>의 경우, 한국에서 처음 시도되는 좀비물은 아니다. 다만 이전의 작품들이 장르의 속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이벤트성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면 <이웃집 좀비>는 장르의 재미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사회적 메시지를 녹아내며 관객의 거부감을 최소화하는 전략을 취한다. 좀비바이러스가 퍼진 이후 소수자로써 고통 받고 차별받는 우리 이웃의 ‘좀비’를 다루며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을 날카롭게 세운다는 점에서 재미와 메시지 사이의 균형 잡힌 연출력이 돋보이는 것이다.

낯선 이야기에 적합한 화용론

 

<불청객>은 <이웃집 좀비>와 장르적 감성을 공유하지만 화용론 자체는 완전히 다른 영화에 속한다. 은하계 저 너머 안드로메다에서 뚝 떨어진 듯한 이응일의 B급감수성과 막장(?)상상력은 그동안 경직된 한국의 토양 위에서 불가능하게만 여겨졌다. 그러니까 <불청객>의 출현은 <고무인간의 최후>와 같은 유의 영화가 나올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일종의 사건에 다름 아니다. 자취방에서 고시공부에 열중하던 진식(김진식)과 그의 동생들이 외계로 납치된 후 지구로 돌아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는 내용의 <불청객>은 빈약한 제작환경을 의도적인 조잡함과 유치찬란함으로 극복한 말 그대로의 독립영화다. ‘고작’ 2천만 원의 제작비와 ‘무려’ 5년의 제작기간이 대변하듯 상영시간 67분에 불과한 <불청객>은 별다른 투자와 지원 없는 각개전투 식 영화 만들기의 지난함과 고통을 능히 짐작케 한다.
그런 감독 이하 배우, 스태프들의 노고 여하에 상관없이 <불청객>에는 험난한 현실을 유희로써 극복하는 지금 세대의 특징적인 정서가 잘 담겨 있다. 영화 시작과 함께 ‘호환마마’ 운운하는 과거 비디오 영상물과 ‘이 영화를 디시인사이드에 바칩니다.’라는 문구만 보더라도 <불청객>의 감성이 맞닿아있는 지점은 분명하다. 청년백수가 양산되는 작금의 현실을 비관으로 일관하기보다 가벼운 유머의 소재삼아 툭툭 털고 일어서자는 젊은 세대만의 일종의 결기가 느껴지는 것이다. 그것은 이 세대가 인터넷과 게임으로 세대만의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그들의 사연과 이야기를 공유했기에 가능한 결과다. 그래서 종합예술매체로써 영화 역시 게임과 인터넷에 능한 감독들에 의해 기존의 화용론과 안녕을 고한 작품들이 눈에 띄게 늘고 있는 추세다.
이미 2009년 장르의 경계가 모호했던 중편 <남매의 방>으로 새로운 영상언어의 출현을 알렸던 조성희는 장편 데뷔작 <짐승의 끝>에서도 예의 특징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모든 기기가 동작을 멈춘 시골마을에서 탈출하기 위해 안간힘 쓰는 소녀를 내세운 이 영화에서 조성희는 조이스틱을 다루는 것처럼 인물을 조종하고 단계를 넘어가듯 이야기를 작동시킨다. 게임과 다르다면, <짐승의 끝>은 유희를 목적으로 삼은 영화가 아니다. 단지 게임의 작동 방식을 극에 끌어들였을 뿐이다. 여기에는 감독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녹아들어있다. 그가 보건데, 이 세상은 사공이 많은 배가 아니다. 소수의 절대자에 의해 조작되고 은폐되고 은밀하게 운영되는 게임과 같은 곳이다. 다시 말해, <짐승의 끝>은 게이머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진정 ‘게임 세대’만이 만들 수 있는 영화인 것이다.


조성희와 함께 한국영화아카데미 제작연구과정 3기생인 윤성현의 <파수꾼>은 올 상반기 한국영화 화제작이라고 불릴 만큼 정의하기 힘든 청춘의 모순된 이미지를 신인답지 않게 노련한 형태로 구현한다. 특히 한 고등학생의 자살 이유를 파헤치는, 어찌 보면 뻔해 보일 수도 있는 이야기를 윤성현은 인물별, 시기별로 장면을 교차하며 복잡한 양태 속에 가려진 진실에 최대한 다가가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이처럼 진실은 개인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기 마련이라서 <파수꾼>의 교차 서술은 극중 인물들의 복잡 미묘한 감정의 파장을 잡아내는 가장 적합한 이야기 형태라 할만하다.
이처럼 신인들의 영화에서 유독 두드러진 화용론의 운용은 한편으론 주류영화의 도식화된 서술법에 대한 반발로도 읽힌다. 그리고 이 부분이야말로 이들 영화에게서 한국영화의 새로운 기운을 감지해내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늘 아래 새로운 이야기는 없어서 결국 어떻게 말하는지 그 형식이 중요하게 영화의 만듦새를 결정하는 법인데 주류영화는 흥행에 성공한 작품을 그대로 답습하거나 약간의 변용을 통해 재생산하기 일쑤였다. 그에 반해, 좀 더 독립적인 방식으로 제작이 이뤄지는 작품들의 경우, 해당 이야기에 적합한 형식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끌어와 영화라는 매체의 본질을 추구하는데 거리낌이 없다. 관객의 취향과 타협하기보다는 스스로의 개성을 밀어붙이는 모습에서 작가주의적인 면모가 강하게 풍기는 것이다.
영화감독을 꿈꾸는 주부와 음악 하는 중학생 아들의 희망과 용기를 다룬 <레인보우>는 소위 클리셰(Cliché)라고 부르는 뻔한 장면이나 기승전결의 서술을 따르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이야기의 자유로움을 획득한 경우다. 정호현의 <쿠바의 연인>은 원래 쿠바의 사회주의와 춤과 노래가 궁금했던 감독이 이를 다큐멘터리로 구성할 요량이었다. 그런데 현지에서 연하의 남자친구 오리엘비스를 만나 결혼에까지 이르면서 갑작스럽게 한국여자와 쿠바남자의 결합에 따른 사회적 편견에 대항한 인생 도전기로 개비되었다. 만약 주류에서 기획된 작품이었다면 촬영 중간 영화의 콘셉트가 바뀐다는 건 불가능했을 터. 애초 영화에 대한 계획 없이 달랑 카메라만 들고 쿠바에 왔던 정호현은 무서운 흡수력으로 촬영 과정에서 발생한 변수와 일탈을 끌어들여 다큐멘터리 특유의 재미로 치환, 희귀한 작품을 완성했다.

한국영화, 새로운 작가 전략


앞서 언급한 작품들의 배경을 살펴본 바, 그 특징을 일러 ‘새로운 작가 전략’이라고 이름 붙여도 괜찮을 듯싶다. 과거와는 다른 한국영화의 신(新)풍경을 연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미처 언급하지 못했지만 박진성의 <마녀의 관>, 김기훈의 <이파네마 소년>, 김종관의 <조금만 더 가까이>가 보여주는 영화적 전략도 자신만의 길을 가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배경으로 뒷받침된 결과다. 러시아 작가 고골의 <비이 VIY>를 각색한 <마녀의 관>은 원작을 가진 여느 영화와 달리 세 가지 에피소드 구성을 통해 다채로운 변형을 가한다. 배우 오디션 현장이 배경인 1막 ‘이상한 여자’는 영화에 대한 영화로, 연극무대를 끌어들인 2막 ‘마녀의 관’은 (3D로 촬영된) 무대극으로, 장님음악가의 환상을 그린 3막 ‘커튼콜’은 기담으로 구성한 것. 공통된 원작에 속하되 각기 다른 장르로 펼쳐 보이는 박진성은 <마녀의 관>을 통해 서사와 형식에 관한 일종의 영화적 실험을 시도한다.
<이파네마 소년>과 <조금만 더 가까이>는 두 편 모두 사랑을 소재로 하지만 서술법이나 표현하는 방식은 특색 있는 제목만큼이나 상이하다. <조금만 더 가까이>가 설레는 첫사랑부터 감정의 앙금이 남은 이별 커플까지, 사랑과 우정 사이에 놓은 이성커플부터 권태를 느끼는 게이커플까지, 네 커플의 에피소드식 구성을 통해 무수한 관계의 교류에서 벌어지는 미세한 감정변화의 줄 잇기를 시도하는 현대적인 서술법을 선보인다면 <이파네마 소년>은 첫 사랑의 아픈 기억을 안고 있는 이들의 ‘두 번째 사랑’을 고도로 이미지화한다. 한국과 계절 주기가 정반대인 브라질의 이파네마 해변을 제목으로 차용한데 착안, 주인공 소년과 소녀의 경우를 둘로 나눠 현실과 공상을 오가고,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며 첫 번째 사랑과 두 번째 사랑의 경계에서 서성이는 이들의 미묘한 심리를 이미지와 형식으로 전달하는데 주력하는 것이다.
사실 새로운 작가 전략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최근의 주목할 만한 장편데뷔작들은 이미지를 우선한 서사 전달과 형식 자체로 이야기와의 통일을 꾀하는 영화 만들기로 거칠게 요약이 가능하다. 다만 전략이라고 붙여도 무관한 이유는 주류영화계에서 잊어버린 영화의 본질을 적극적으로 추구할 뿐 아니라 그 결과로 새로운 영화보기의 즐거움을 제공하는 까닭이다. 이와 관련,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3월 22일부터 4월 6일까지, 2010년과 2011년에 데뷔한 주요한 장편 14편을 모아 ‘한국영화, 새로운 작가 전략’이라는 프로그램을 선보인다. 거창하게 ‘코리아 뉴 웨이브 Korean New Wave'라고 명명할 정도는 아니지만 적어도 한국영화계의 기저에서 활발히 모색되고 있는 변화의 바람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글/ 허남웅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