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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전/마누엘 드 올리베이라 회고전

[특집2]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 : 토킹 픽쳐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 토킹 픽쳐


포르투갈의 영화감독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는 1908년에 태어나 지금까지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현역 최고령 감독으로서, 포르투갈은 물론 세계 영화사에서 굵직한 위치를 차지한다. 알고도 믿기 힘든 그의 나이 때문일까, 변치 않는 왕성한 창작력 때문일까, 혹은 단순히 영화 자체가 너무 어렵기 때문일까? 어쩐지 올리베이라의 세계는 너무나 심오하고 신비한 까닭에 쉽사리 접근할 수 없는 것처럼 여겨지곤 한다. 이번 올리베이라 회고전은 그간 전혀 볼 수 없거나 이곳저곳에서 산발적으로밖에 볼 수 없었던 올리베이라의 작품들을 한 번에 모아서 봄으로써 그 신비의 베일을 벗겨 심층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올리베이라 영화의 외면적 특징 중 하나는 인물들의 대사의 양이 매우 많다는 점이다. 이 말들은 단순히 내러티브를 이루는 도구로 소용되지 않으며 그 고유의 ‘역량(puissance)’을 갖는다. 이는 다양한 장르, 주제, 소재를 아우르는 올리베이라 영화들의 형식적·방법론적 뿌리를 이룬다. 인물의 대사 형태로 발화된 말과 인물들이 모여 대화를 나누며 형성되는 담론, 혹은 연극의 내적 독백에 가까운 내면의 발화나 문학적 텍스트 그 자체의 낭독에 이르기까지. 올리베이라 영화에는 다량의 말들이 내러티브 속에 산재하게 되는데, 이때 이러한 말들의 자율적인 역량이 돌출되는 순간은 내러티브의 진행이 어떤 이유로든 지연될 때 나타난다. 이 순간, 말과 사운드 효과를 비롯한 음향 이미지와 풍경이나 어떤 장소성과 관련된 시각 이미지 고유의 역량이 다양한 방식으로 연쇄, 충돌, 해체, 재-연쇄를 이루는 상호작용이 발생한다. 이때 각각의 이미지 간에는 힘의 위계가 없고, 설사 위계가 발생한다 하더라도 그 효과는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올리베이라 영화의 근간을 이와 같은 이미지 구성 방식을 두고 그의 영화의 제목을 빌려와 ‘토킹 픽쳐(A Talking Picture)’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이름에는 말과 시각 이미지 간의 동등한 지위와 자율적 관계가 내포되어 있다.


내용적 측면에서 볼 때, 광범위하기 그지없는 올리베이라의 영화 세계는 크게 세 가지 관점으로 맥락화가 가능하다. 첫째는 영화라는 매체 그 자체에 대한 성찰이다. 올리베이라는 문학, 연극, 회화, 음악, 조각, 건축을 아우르는 예술 전반을 영화에 전면적으로 기입하고 그것을 영화의 내러티브에 완전히 종속시키지 않음으로써 영화의 상호매체성을 강조한다. 둘째, 올리베이라는 과거의 역사를 표상하거나 그에 대한 기억의 심층을 탐구함으로써 현재적 관점에서 과거를 재구성하고자 시도한다. 셋째, 올리베이라 영화의 다수를 이루는 멜로드라마 장르에서는 문학이 영화 속에 전면적으로 기입된다. 일반적인 각색과는 달리, 문학의 주제의식이나 정신성 그 자체가 영화 구성의 근간을 이룬다는 점이 독특하다. 이러한 다채로운 요소들을 작동시키는 핵심적인 동력은 ‘토킹 픽쳐’라 명명한 이미지 구성 방식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때 말들의 역량이 모여 어떠한 담론의 장이 생성됨으로써 다양한 주제의식과 정신적 특질이 구현될 수 있게 된다.


<나의 경우>


말의 역량과 담론의 구성

올리베이라 영화에서 말의 역량이 어떻게 발현되는가를 파악하기 위해 우선 텍스트와 말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올리베이라의 다수의 영화는 직간접적으로 문학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지며, 따라서 문학적 텍스트는 그의 영화의 기본을 이룬다. 문학적 텍스트는 대사화된 후 발화되거나 혹은 그 자체로 덩어리째 낭독된다. 영화 내부의 논리에서 볼 때, 발화된 말은 텍스트 그 자체와는 달리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어떠한 잠재적 힘을 이끌어낼 수 있는 ‘역량’을 갖게 된다. 질 들뢰즈는 시각 이미지에 종속되지 않는 음향 이미지 고유의 역량에 대해 강조한 바 있다. 이를 위해서는 “순수한 발화 행위, 영화적으로 고유한 언표 혹은 음향 이미지를 추출해내야 하며, 이 행위는 자신의 가독적 기초, 즉 텍스트, 책, 편지 혹은 자료에서 뿌리 뽑혀야” 한다. 텍스트에서 뿌리 뽑혀 발화된 말 자체가 자유롭고 도취적으로 자신의 음을 내는 것과 같은 어떤 고유한 역량을 가진다고 한다면, 이는 말 중심적인 영화들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즉 문자(텍스트)와 음성(발화, 낭독)의 관계를 통해 문학과 연극, 그리고 영화의 관계를 논해볼 수 있다. 이때 말을 중심으로 하는 영화인 ‘토킹 픽쳐’만의 가치를 찾는다면, 그것은 오직 영화만이 세계를 기록하는 시각적 이미지의 현전과 일상적·연극적 언어의 현전 ― 배우가 문자를 소리 내어 낭독하는 것과 대사화된 발성 언어의 역량, 이때 운율과 격정이 표출되는 것 ― 을 동시에 작동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발화된 말이 가로지르는 것은 시각 이미지의 지층, 즉 어떠한 역사나 개인적 기억을 가진 장소 혹은 자연의 심원한 풍경들이다. 올리베이라의 영화적 장소에는 그곳만의 지질학적 역량이 스며 있다. 따라서 장-마리 스트라우브와 다니엘 위예에 대한 들뢰즈의 다음과 같은 분석은 올리베이라에게도 더없이 유용하다. “말은 이미지로부터 퇴각하여 토대를 정초하는 행위가 되고, 반면 이미지는 그 자신, 공간의 정초화, ‘지층들(assises)’, 즉 말 이전 혹은 이후, 인간 이전 혹은 이후의 무언의 역량들을 융기시킨다. 시각 이미지는 이제 고고학적, 지층적, 구조 지질학적인 것이 된다.” 그 고고학적 이미지에는 대지에 스며든 흔적으로서의 역사가 잠재해 있다. 이때 말의 역량과 풍경 혹은 장소의 역량이 변증법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순수한 음향적 이미지와 시각적 이미지가 온전히 동등한 관계에서 서로 충돌하고 해체되고 조화를 이루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올리베이라의 영화는 어디까지나 내러티브 영화이고 영화 내에서 어떠한 의미를 생산해내기 때문에 충돌이나 해체 자체보다는 재-연쇄의 순간에 조금 더 방점이 놓인다는 점을 주지해야 한다.


<토킹 픽쳐>


올리베이라가 말과 풍경 혹은 장소의 관계성을 통해 이끌어내고자 하는 것은 영화 내부에 담론의 장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역사적 기억이 배어 있거나 동시대적 정치적 의미를 지니는 실제 장소를 촬영하거나, 혹은 연극적 세트를 통해 그와 유사한 지위를 지닌 공간을 구축한다. 디에게시스 세계에 속한 인물들은 이러한 공간에 위치하여 마치 연극배우처럼 연기하고 자유로운 토론을 통해 어떠한 담론을 형성한다. 이러한 담론의 성질을 파악하는 데 미셸 푸코의 논의를 참조할 수 있다. 푸코에 따르면, “어떤 사회에서든 담론의 생산을 통제하고, 선별하고, 조직화하고, 나아가 재분배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존재하는데, 이때 새로운 담론들을 (무한히) 구성하는 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주석이라고 부르는 것을 통해 일차적인 텍스트와 이차적인 텍스트 사이의 어긋남을 만들어내야만 한다.” 올리베이라는 영화 내부에 매우 상이한 성향을 지닌 인물들을 풀어놓고 그들이 자유롭게 토론하게끔 함으로써 이러한 어긋남을 만들어낸다. 올리베이라의 인물들이 내뱉는 말들의 역량과 그 충돌이 만들어내는 어긋남은 곧 새로운 담론의 형성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 담론의 특징은 다소간 모호한데, 기본적으로 어떤 인물에게도 특권적 지위가 부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분히 비위계적이지만, 한편으로는 디에게시스 내외부의 경계에 위치하면서 인물의 입장과 작가의 입장의 중간에 속해 있는 듯한 논평자(주로 이 역할은 루이스 미구엘 친트라가 맡는다)가 영화 속에 기입되어 있다는 점에서 다소간 위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성격을 가진 담론의 장을 창출하는 효과는 예술, 문화, 역사, 정치 등에 대한 문제의식을 영화 내부에 위계를 두지 않고 자유롭게 풀어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올리베이라 영화는 영화 자체의 매체성은 물론이고 다른 상호매체적 요소들에 대한 논평이 담긴 메타적 성격을 갖게 된다. 이를테면 <토킹 픽쳐>(2003)에서 유적지에서 벌어지는 역사교육적 담론과 선내 레스토랑에서 벌어지는 예술, 문명, 언어, 정치 등에 대한 논평들을 떠올릴 수 있다. 이러한 성격은 올리베이라 영화에서 연극을 비롯한 타 예술의 요소들이 영화 속에 전면적으로 기입됨으로써 발생하는 영화의 매체성 자체에 대한 성찰과 함께 작동하기도 한다. 가령 세 파트로 이뤄진 <불안>(1998)의 구조를 떠올려보자. 연극이 덩어리째 기입되고, 그것을 관람했던 인물들이 펼치는 영화 속 현실 차원의 내러티브가 펼쳐지며, 그리고 인물이 집필하는 소설의 내용이 그의 발화와 함께 이미지로 재현된다. 또한 <나의 경우>(1986)는 연극의 퍼포먼스적인 성질과 그것을 영화로 촬영하는 행위를 통해 연극과 영화의 매체적 관계를 드러낸다. 여기에서 카메라로 촬영함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으로 여겨지는 이미지의 반복과 변용들 ― 무성영화로의 이행과 덧붙여지는 내레이션, 필름 릴을 빨리 감는 것 같은 이미지 등 ― 이 발생하며, 이를 통해 허구와 현실의 대립, 매체 내부와 외부의 경계 이행의 문제에 대한 성찰이 이뤄진다.


<토킹 픽쳐>


역사 혹은 기억으로서의 과거와 현재

올리베이라는 과거를 현재의 관점에서 재구성하는 데 관심이 많다. 그 과거가 포르투갈의 역사이든 개인의 기억과 관련된 것이든 간에, 여기에는 노스텔지어와 비판 의식이 모순적으로 공존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영화가 역사나 기억을 시각적 이미지로 재현할 때에는 분명히 여러 한계가 존재하는데, 올리베이라는 이 한계를 다른 방식으로 빗겨가기 위해 ‘토킹 픽쳐’라 명명한 이미지 구성방식을 활용한다는 것이다.


역사적 차원에서 그의 주된 관심사는 제국주의 포르투갈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17세기 ‘제5제국’의 역사를 표상하는 것이다. 특히 <말과 유토피아>(2000)와 <제5제국>(2004)에서 올리베이라는 그 시대를 직접 시각적으로 재현하는데, 여기에는 결코 일반적인 역사영화처럼 장엄한 풍경과 서사나 위대한 인물이 있는 것이 아니라 벗어나기 힘든 족쇄 같은 실내공간과 모호한 성격을 지닌 인물들의 끝없는 대화의 향연만이 있을 뿐이다. 역사란 역사적 인물들로 가정된 인물들의 대화를 통한 담론적 구성물에 다름 아니며, 이는 로베르토 로셀리니적인 이미지 교육법으로서의 역사와 유사한 것이기도 하다. 이 두 영화 외에도 다수의 영화에 제5제국의 역사에 대한 인식이 그림자처럼 스며들어 있는데, 이때 흥미로운 점은 제국주의 역사와 그것들의 상실(탈식민)에 대한 올리베이라의 관점에 모호함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기본적으로는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 의식을 담고 있다. 올리베이라가 패배한 전쟁에 주목한다는 점, 역사 속 인물을 광인에 가깝게 그리고 영화 속에 시인이나 광대 같은 논평자를 기입시켜 사태를 풍자한다는 점, 장엄한 규모를 자랑하며 화려한 장식으로 꾸며진 실제 성과 궁전, 성당의 내부 공간조차도 굉장히 음침하게 촬영한다는 점이 이를 입증한다. 하지만 이뿐만 아니라, 찬란했던 과거의 영광을 애도하는 듯한 멜랑콜리의 정서 또한 없지 않다. 역사를 다룬 영화들에서 어김없이 등장하는 포르투갈 민속음악 ‘파두’의 선율과 이와 함께 보이는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들이 그런 정서를 드러낸다. 더불어 <지배의 공허한 영광>(1990)에서는 아프리카 식민지를 잃지 않기 위해 전투를 벌이는 군인들이 그 전쟁의 당위성에 대해 토론하는 장면에서 그런 모순적 의식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런 모순적 요소들은 영광스러운 과거에 대해 예외적 사례들을 제공한다. 따라서 제국주의 포르투갈은 과연 영광의 시대였는가에 대한 질문은 계속해서 다시 던져지게 된다. 이러한 질문은 <토킹 픽쳐>의 선상 레스토랑 장면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올리베이라의 관심은 구체적 역사뿐만 아니라 보다 근원적이고 지극히 개인적인 기억의 심층으로 향한다. 이를 찾아가는 것은 특정한 장소로의 지리적 여정의 형태로 나타나며, 이때 영화는 외면적으로 로드무비의 형태가 된다. 인물들은 길 위에서, 혹은 어떤 유적지에 가서 대화를 나눈다. 이러한 장소를 중심으로 구성되는 시퀀스들은 영화 전체의 내러티브와도 관련되지만, 그 자체로 독자적으로 존재하기도 한다. 이는 내러티브 진행을 느리게 만들며 또한 이 순간 카메라의 움직임이나 인물들의 움직임도 매우 느리게 이루어진다. 이로써 장소로서의 풍경의 역량과 말의 역량이 더욱 강조될 수 있게 된다. 장소성과 말, 혹은 말과 말의 화학작용은 어떤 근원적 기억을 환기하거나 동시대와 관련된 담론을 형성한다.


이런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영화인 <세계의 시초로의 여행>(1997)은 외견상 ‘아폰수’라는 프랑스 배우가 포르투갈에 와서 아버지의 생가를 찾아가는 여정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 도중에 ‘마누엘’이라는 인물의 개인적 기억과 관련된 장소들을 경유하게 되고, 그럴 때마다 여정은 지연된다. 이때 각 장소에 배어 있던 기억이 말을 통해 환기된다. 가령 ‘페조 호텔’ 시퀀스에서 올리베이라는 평소에 자주 쓰지 않던 이색적인 트래블링 쇼트로 호텔 건물의 낡고 쇠락한 벽을 보여준다. 이와 함께 마누엘은 그의 유년의 기억에 대해 말하면서 ‘병든 시간’이었다는 표현을 쓴다. 이 말은 또한 동시대의 신체, 사회, 시대의 부패를 반영하며, 이런 맥락에서 상대적으로 영광스러웠던 과거의 기억 ― 포르투갈의 영광 혹은 사적인 영광 ― 을 환기하는 것이다. 이는 인물들의 대화로 만들어지는 담론을 통해 동시대의 정치적 맥락을 역사화하는 차원으로까지 확장된다. ‘세계는 병들었는가? 세계의 붕괴 혹은 폐허는 무엇을 제시하는가?’와 같은 질문들. 여기에는 과거의 영광을 갈구하는 노스텔지어(혹은 포르투갈 고유의 그리움의 정서인 '사우다드')와 동시대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근심이 모순처럼 공존한다.


<불안>


이 여정의 끝에는 근원적 장소가 있다. 그곳은 어디이며 무엇에 대한 근원인가? <세계의 시초로의 여행>의 경우, 그곳은 포르투갈 북쪽 끝에 위치하며 지리적으로 고립된, 그리하여 오랜 원칙이 보존되고 마치 시간이 멈춰진 것처럼 여겨지는 세상의 기원이자 태곳적 공간과 같은 곳이다. 아폰수에게 아버지가 유년시절을 보낸 집은 자신의 뿌리가 되는 장소이자 말로만 듣던 과거의 흔적과 물질적으로 접촉하는 곳이다. 마누엘에게 그곳은 자신의 상징적 죽음을 확인하는 곳이다. 이 장소는 어떠한 근원적인 장소이며, 들뢰즈적 의미에서 배아를 품고 있는 결정체로 존재한다. 이 장소가 품고 있는 지질학적, 지층적 기억은 구체적이거나 실증적인 역사를 넘어 보다 근본적인 것, 즉 잠재적인 것으로서의 기억이다. 따라서 이 여정은 기억의 심층으로 수렴하는 정신적인 여정에 다름 아니다.


마찬가지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 수수께끼>(2007)는 ‘마누엘 루시아노’라는 남자가 평생에 걸쳐 콜럼버스의 생가를 찾아다니는 기나긴 여정의 기록이다. 젊은 시절의 신혼여행에서부터 올리베이라 본인이 직접 연기한 노년의 여행에 이르기까지, 마누엘은 아내와 함께 포르투갈 알렌테주 지역은 물론이고 뉴욕의 빌딩숲에 위치한 콜럼버스의 기념비와 박물관까지 찾아다닌다. 마누엘은 아내에게 끊임없이 역사적 지식들을 쏟아낸다. 그는 콜럼버스의 생가를 찾아감으로써 콜럼버스의 기원이 포르투갈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 하며, 이를 통해 자기 자신의 근원(나아가 올리베이라 감독 본인의 근원까지)을 찾고 싶어 한다. 평생에 걸친 탐구 과정에서 어느덧 마누엘 본인의 기억은 콜럼버스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 된 것이다. 그의 여정을 쫓는 과정에서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들이 카메라에 담긴다. 단순히 아름다움을 넘어 심원하고 숭고한 풍경의 역량은 그 풍경 자체가 콜럼버스라는 인물의 역사적 차원을 넘어서는, 보다 더 근원적인 것임을 느끼게 한다. 그것은 인류의 기억 혹은 대지의 기억과 관계된 것이다.

문학의 영화로서의 멜로드라마

올리베이라의 영화 세계는 방대하고 다양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다수를 이루는 것은 멜로드라마 계열의 영화들이다. 이 영화들은 외견상 일반적인 내러티브 영화에 더 가까워 보이지만, 실상 올리베이라의 영화 중에서도 가장 신비하고 내밀한 영역을 구축한다. 이러한 영화들은 문학의 전면적 기입을 통해 더 풍부해지는데, 이는 문학에 대한 일반적인 각색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그것은 문학을 하나의 모티프로 삼아서 다른 요소(다른 문학작품을 포함)들과 자유롭게 뒤섞는다거나 혹은 문학작품의 정신성이나 주제의식을 완전히 다른 이야기나 인물에 영화적으로 변용하여 녹여내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처럼 문학적 정신성을 영화에 기입하는 과정은 역시 말의 역량을 강조하는 것 ― 문학적 언어가 발화되면서 발생하는 감정, 정서, 정동 ― 으로 시작된다. 올리베이라의 멜로드라마의 내러티브적인 특징은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핵심적인 순간들이 덩어리째 병렬적으로 배치되고 이 순간 말의 역량이 강조되는 한편, 그 사건의 전후를 구성하는 인과 관계들이 삭제되거나 함축적으로 드러난다는 점이다. 여기에 연극, 회화, 음악을 비롯한 다른 예술적 요소들은 영화에 풍부함을 더한다. 요컨대 올리베이라에게 문학은 삶과 예술의 총체로서 어떤 초월적인 정신성을 구현하는 것이며, 나아가 신학적 정신을 포괄하는 것이기도 하다.


가령 <신곡>(1991)에서는 단테의 『신곡』을 기본 틀로 삼아 정신병자들의 카오스의 세계가 펼쳐지는데, 그 속에서 도스또예프스키의 『죄와 벌』에 빠진 남녀가 하나의 연극처럼 소설의 남녀 주인공 역할을 연기하면서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가 하면, 다른 모든 인물들도 각자의 역할놀이를 즐긴다. 또한 영화 중간에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의 ‘대심문관 이야기’ 부분이 덩어리째 직접 삽입됨으로써 신학적 세계관을 더하기도 한다. 이곳은 지옥인지 연옥인지 천국인지 알 수 없는 세계이다. 한편 <수도원>(1995)에서는 괴테의 『파우스트』의 메피스토펠레스를 체현하는 듯한 악마적인 인물을 만날 수 있다. 더구나 <수도원>의 악마성은 이중의 구조를 띤다. 수도원에 연구 목적으로 찾아온 박사 부부를 악마적 세계로 유혹하려는 ‘발타(루이스 미구엘 친트라)’라는 인물은 본인이 악마적인 존재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조차도 악마의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또한 영화에는 그 외에도 더 넓은 차원에서 모든 인물들을 유혹에 빠뜨리며 비웃음을 던지는 또 다른 메피스토펠레스인 ‘발타자르(주앙 베나르 다 코스타)’가 있다.

한편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을 각색한 <아브라함 계곡>(1993)이나 라파예트 부인의 『클레브 공작부인』을 각색한 <편지>(1999)처럼 보다 일반적인 각색에 가까운 영화들도 있는데, 여기에도 올리베이라만의 특징은 여전히 남아 있다. 특히 <편지>는 17세기 궁정소설을 완전히 현대적인 배경으로 끌어와 창조적으로 변형한 작품이다. 원작의 복잡하기 그지없는 인물들의 관계망들이 극도로 미니멀하게 축소되었으며, 중심적인 사건들의 덩어리를 병렬적으로 펼쳐놓을 뿐 인과 관계를 설명하는 소설의 내용들이 완전히 삭제된 것이 특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작의 정신성은 전혀 훼손되지 않은 채 영화에 녹아들어 있다. 무감각한 결혼 생활, 치명적으로 타오르는 사랑의 발견, 그리고 충절과 욕망 사이의 고통스러운 선택의 문제는 온전히 올리베이라의 비극적 멜로드라마들의 일부를 이룬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 수수께끼>


이렇듯 올리베이라의 멜로드라마들은 비극에 매혹되어 있다. 그것은 밤의 영화이자, 어둠의 멜랑콜리가 깃든 영화이다. ‘좌절된 사랑 4부작’으로 불리는 <과거와 현재>(1971), <베닐드 혹은 성모>(1975), <불운의 사랑>(1978), <프란시스카>(1981)가 대표적이다. 올리베이라의 인물들은 대부분 신을 믿음에도 불구하고, 신에게서 떨어져 나와 어떤 악마성에 이끌린다. 거기에는 타락 혹은 파멸에의 유혹, 혹은 죽음의 신비에 대한 매혹이 자연스레 포함되어 있다. <카니발>(1988)에서, 고급 예술이 우아하게 수놓아져 있는 귀족들의 사교계에서 꽃핀 불꽃같던 사랑은 그로테스크한 기계의 이미지로 대표되는 죽음 충동과 인육을 먹는 카니발리즘의 악마적 축제로 전락한다. 이 모든 것을 비웃으며 지켜보는 바이올리니스트와 논평자의 존재는 이 영화를 더욱 섬뜩하게 만든다. 한편 <불확실성의 원칙>(2002)에도 여러 인물들의 어긋난 사랑과 욕망의 그물망이 펼쳐진다. 도박, 그리고 돈을 바라고 한 결혼이라는 악덕은 영화를 거치며 점차 승계되고 확장되어 인물의 심적 붕괴를 일으키며, 결국에는 잔다르크의 화형과도 같은 방화와 죽음으로 이어지게 된다. <앙젤리카의 이상한 사례>(2010)에도 죽음에 이끌리는 남자가 있다. 여기에서 앙젤리카의 유령은 시각적 이미지로 표현되며 이는 이색적인 효과를 낳는다. 죽음은 치명적 비극이라기보다는 신비로운 동화의 세계로의 여정과도 같은 매혹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문학적 정신성과 비극에 대한 매혹은 다수의 멜로드라마들의 특징을 이루며 올리베이라 영화 세계 전반을 포괄한다. 그러나 각각의 영화에 존재하는 미세한 결들의 차이를 읽어내는 것, 그 과정에서 ‘토킹 픽쳐’로서의 올리베이라의 형식적 방법론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분명히 의미 있는 일이다.

박영석중앙대 영화학과 박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