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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아키 카우리스마키 특별전

[특집]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우주 - 척박한 땅에도 꽃은 피어난다

[특집 : 아키 카우리스마키 특별전]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우주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작품은 개개의 작품이 완결적 세계를 이루면서도 동시에 모든 작품이 하나의 세계, 하나의 긴 이야기의 세계를 구축한다. 그는 오즈나 자크 타티처럼 카우리스마키 패밀리라 불리는 스태프들, 배우들과 지속적인 영화 작업을 했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는 또한 영화적 기억을 더듬어가는 듯한 다양한 스타일을 인용해왔다. 필름 누아르의 비정함, 극적 드라마를 배제한 브레송적인 스타일, 무성영화적인 코미디, 정서와 애환에 찬 르네 클레르적인 드라마 등. 그의 스타일은 실로 다양하다. 하지만 그 어떤 스타일도 그의 작품에 이르면 결국 카우리스마키적인 것이 된다.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독특한 영화 세계를 살펴본다. (편집장)



척박한 땅에도 꽃은 피어난다 

-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루저들의 세계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에서 우리는 핀란드의 차디찬 기후만큼이나 차가운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의 영화의 주된 공간인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는 인간의 감정이 메마른 듯한 차가운 공장지대나 컨테이너 박스가 가득 쌓여 있는 더러운 항구의 풍경으로 보여진다. 그곳에는 자본의 유입과 산업화의 가속, 그에 따른 인간의 소외라는 새로울 것 없는 동시대의 현실이 있다. 카우리스마키의 인물들은 언제나 하층민들인데, 그들은 척박한 세상으로부터 받는 상처를 무표정한 얼굴로 받아들인다. 그들을 담아내는 카메라는 미니멀리즘에 기반하여 작동하며 매우 평면적이고 정적이다. 내러티브는 최소한요소만으로 매우 경제적으로 축조된다.


이러한 표면과는 달리 실제로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는 그렇게 음울하고 차갑지만은 않다. 그의 영화는 생각보다 다양한 드라마적 재미를 제공하며, 우리는 그의 인물들을 보며 충분한 교감과 연민을 느낀다. 그의 영화에 숨겨진 희망에 빛을 비추는 일은 그의 미니멀리즘 스타일에 내재한 풍부한 영화적 요소들을 밝혀내는 일과 밀접히 연관된다. 기본적으로 그의 영화는 극작술 면에서 고전영화의 장르적 체계를 상당 부분 따른다. 가령 <황혼의 빛 Lights in the Dusk>(2006)은 팜므파탈이 주인공을 유혹하는 필름 누아르에 가까우며, <과거가 없는 남자 The Man Without a Past>(2002)는 설레는 사랑이 싹트는 멜로드라마이고, <르 아브르 Le Havre>(2011)는 프랭크 카프라의 <멋진 인생>에 비견할 만한 아름다운 우화이다. 또한 그의 영화에는 영화사의 거장들에 대한 오마주적 요소들이 산재한다. 이를테면 카우리스마키는 오즈 야스지로만큼이나 인물의 정면 얼굴을 좋아하며 풍경과 정물을 많이 담아낸다. 


인물들의 얼굴은 브레송의 ‘모델’들의 얼굴만큼이나 무표정하지만 실상 그만큼 무감각하지는 않다. 즉 무표정한 얼굴(덧붙여 풍경과 정물)은 척박한 현실이나 참을 수 없는 사태에 반응하는 인물들의 감정을 억눌러 담은 그릇인데, 이 그릇 덕택에 우리는 타자에 대해 적당선의 거리를 둔 채 연민의 시선을 던질 수 있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의 미쟝센과 영화적 공간은 매우 정밀하게 꾸며져 내러티브와 긴밀히 연동된다. 회색톤의 무채색 위주로 꾸며진 공간에 빨강과 노랑 등의 따스한 색깔들이 숨어있는데, 이는 희망의 빛깔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색의 활용은 <과거가 없는 남자>와 

<르 아브르>에서 특히 도드라진다. 한편 빈번히 등장하는 음악은 단순히 배경으로 머무르는 게 아니라 연주 장면을 통해 전면화되면서 감정적 치유의 순간들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요소들은 미니멀리즘 스타일 내에서 드라마적 감정이 발현되고 관객과 소통하는 근거로 작동한다.


궁극적으로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는 척박한 현실 속에서 인간성을 회복하고 삶의 희망을 찾는 여정이 된다. 더구나 그 희망의 빛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강해지고 있는 중이다. 예컨대 최근작 <르 아브르>는 희망의 빛으로 충만한 동화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척박한 현실 속 어디에서 희망이 솟아오르는가? 그 희망을 찾기 위해서는 일단 저 밑바닥까지 내려가 심연을 치고 올라와야 한다. ‘루저(loser) 삼부작’으로 알려진 <어둠은 걷히고 Drifting Clouds>(1996), 

<과거가 없는 남자>, <황혼의 빛>은 무언가를 잃어버린 자들이 겪는 처참한 삶의 현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새로운 희망의 빛을 발견하는 사람들의 노력을 보여준다. <어둠은 걷히고>의 부부 일로나와 로리는 직장을 잃고 방황하며, <황혼의 빛>의 카이스티넨은 자신을 유혹하는 여성에게 속아 직장도 잃고 집도 잃으며 범죄자로 몰려 감옥에 간다. 심지어 <과거가 없는 남자>의 ’남자’는 갑작스런 퍽치기의 희생양이 되어 죽었다가 살아나지만 자신이 누구인지도 기억하지 못한다. 과거가 없다는 말 그대로 그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들을 바닥으로 내몰며, 또한 바닥에 떨어진 인물들을 계속 나아가게 하는 동력은 어디에 있는가?



우선 그들을 억압하는 것이 국가 그 자체는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두고 싶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는 그런 식의 정치적 요소에 의해 작동하지 않는다. 국가는 최소한의 틀로서만 존재한다. 예컨대 컨테이너 박스에서 사는 하층민들에게 돋을 뜯어내는 <과거가 없는 남자>의 경찰은 사실 그다지 위협적이지도 비정하지도 않은 존재로 밝혀진다. <르 아브르>에 등장하는 수사관 앙리도 결국에는 하층민들의 편을 들어준다. 반면 하층민들을 억압하고 소외시키는 것은 사회 어느 곳에나 내재된 자본이라는 요소이며 그것은 은행으로 실체화된다. ’루저 삼부작’의 인물들은 모두 한 차례씩 은행으로부터 대출 거부를 당한다. 그런데 이러한 실체화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서 표출되는 힘의 역학에 자본이 내재되어 있다는 점이다. <황혼의 빛>에서 금품 절도를 위해 카이스티넨을 철저하게 이용하고 버리는 조직폭력단은 물론이고, <어둠은 걷히고>에서 일로나의 임금을 지불하지 않으려 하는 폭력배들, <과거가 없는 남자>에서 주인공을 죽음으로 내몰 뻔한 폭력배들을 떠올릴 수 있다.


이처럼 자본의 논리는 인물들을 바닥으로 내몰지만, 그들은 그 논리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행동을 보여준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핀란드는 그 어느 나라 못지않게 복지제도가 잘 갖춰진 나라이다. 그런데 카우리스마키의 인물들은 이상하리만치 그 혜택으로부터 제외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령 <어둠은 걷히고>의 부부는 실업수당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버리고 끊임없이 새로운 직업을 찾아다닌다. 그들이 실업수당을 거부하는 이유는 그것이 자신의 존엄을 해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오직 스스로 돈을 벌 수 있는 일자리가 필요한 것이다. 존엄성을 갖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희망을 향한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는 추진력이며 행동의 원리이다. 한편 <과거가 없는 남자>의 남자는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르 아브르>의 마르셀은 자신보다 더 불행하고 유약한 소년을 지키기 위해 힘을 발휘한다. <황혼의 빛>의 카이스티넨에게 꿈은 삶의 조건 그 자체이다. 꿈이 있기에 죽지 않을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이 영화의 엔딩 장면을 희망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이유이다.


카우리스마키의 인물들은 개인성과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한 고단한 여정을 거친다. <과거가 없는 남자>의 남자는 심지어 죽음으로부터 부활하기까지 하면서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 나간다. 이때 이들의 개인성 회복 과정이 궁극적으로 집단으로 향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하층민들은 자신보다 더 힘든 사람들을 도울 줄 안다. 그들은 삶의 소소한 행복이라는 그다지 커다란 목적 없는 소박한 연대의식을 지닌 공동체를 만든다. <어둠은 걷히고>의 레스토랑 직원들은 결국 행복하게 다시 만난다. <과거가 없는 남자>에서 콘테이너 박스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서로 돕고 응원한다. 이러한 연대는 <르 아브르>에서 전면화된다. 처음 보는 소년을 돕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마르셀과 그를 돕는 이웃들, 모르는 척 지켜봐 주는 경찰, 소년의 탈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자선공연까지. 이 무조건적이며 따스한 연민과 연대의식의 결과는 다시 개인의 행복으로, 마르셀의 아내의 불치병이 치료되는 기적으로 되돌아온다. 마르셀이 아내에게 문병갈 때 가져가던 빨간색과 노란색 꽃이 전해주던 희망의 씨앗은 엔딩 장면의 하얗게 빛나는 체리나무 꽃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행복한 꽃이 또 있을까.



박영석 / 중앙대학교 영화학과 박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