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치다 도무田吐夢의 인생극장

 

 

 

 

 

영화감독은 작품으로 모든 것을 보여준다지만 그럼에도 한 작가의 작품에 우리는 다른 것들을 덧붙일 수 있다. 이를테면 작품을 넘어 기억되는 작가의 이미지라는 게 있다. 종종 그것이 작품보다 더 거대해 보일 때가 있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일본을 넘어 전 세계인들에게 영화 천황의 풍모를 남겼다. 오즈 야스지로나 미조구치 겐지도 규모는 다르지만, 고유의 이미지를 남겼다. 작가는 고사하고 작품이라도 제대로 남길 수 있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가장 안타까운 경우는 작가도 작품도 무명의 상태에 놓이는 경우다. 일본의 영화감독 우치다 도무가 그런 경우라 할 수 있다.

 


우치다 도무의 무명세는 다음과 같은 사례가 증명해준다. 한 평자는 1970년, 우치다 도무가 세상을 떠났을 때 영국의 유명 영화잡지 ‘사이트 앤 사운드’에서 ‘서구에는 아직 덜 알려진 일본의 베테랑 감독이 사망했다’라는 짤막한 부고기사를 내보냈던 일화를 지적한다. 그 만큼 세계의 영화계가 우치다 도무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그 후 40년이 지났지만 달라진 것은 없다. 한국에서도 그의 영화가 소개되는 일은 드믄 일이다.

 

일본에서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는 않다고 한다. 우치다 도무는 1898년에 태어나 일본영화의 창세기에 활동을 개시했고, 1920년대 무성영화를 거쳐 1930년대에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오른 이였다. 하지만 그의 초기시절 걸작들은 일본에서도 좀처럼 상영되지 못했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전주국제영화에서 처음으로 소개하는 무성영화 2편(<땀>(1929), <경찰관>(1933)은 여전히 미지의 작가인 우치다 도무의 영화경력을 조금이나마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우치다 도무의 상대적인 무명성은 그의 격렬한 삶에 따란 경력의 부침과 무관하지 않다. 인생역정이 작업의 단절과 공백을 초래했다. 우치다 도무의 영화경력은 크게 세 가지 시기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번 째 시기는 1920-30년대의 청춘의 유랑시절이다. 그는 1920년에 영화사에 입사해 영화경력을 시작했지만,회사의 파산으로 배우들과 지방 순회의 유랑생활을 해야만 했다. 이어 니카츠 영화사에 입사해 감독의 길을 걸었지만 회사의 방침과 맞지 않아 새로 회사를 설립을 하는 시도를 하다 파산해, 영화작업의 려움을 겪었다. 부유한 사내가 지루한 일상을 탈출해 하층민의 고된 생활을 체험하는 이야기를 그린 무성영화 <땀>(1929), 경찰관과 친구의 긴장감 있는 이야기를 그린 <경찰관>(1933), 소작농의 빈곤한 삶을 사실적으로 그리며 봉건제와 자본주의 경제를 비판한 <흙>(1939)이 시기 주요작이다.

 


두 번째 시기는, 전쟁의 발발로 영화작업이 중단되었던 시기다. 당시 우치다 도무는 만주로 건너가 만주영화협회에서 영화제작을 시도했는데, 일본이 패전하면서 이러한 시도도 무위로 끝나게 된다. 그는 종전후에도 8년간 중국에 머물러 있었다. 작가로서는 공백기라 할 수 있는 단절의 시기였다. 하지만 전쟁의 비참과 방황의 시간이 이후의 작품에 깊은 영향을 주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창조를 위한 대기의 시간이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이후 그의 영화에서 보이는 다소 시니컬한 태도가 이 시기의 영향이다. 그는 모택동이 주창한 모순론을 드라마의 극적 구조에 시도하기도 했는데, 가령 드라마는 다른 인간의 감정, 성격, 사상, 입장, 이해관계가 뒤엉키고 상극과 모순으로 충돌이 발생하면서 최대의 모순점에서 대폭발이 발생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 우치다 도무의 영화는 그런 격렬한 대폭발의 지점을 언제는 영화의 후반에 지니고 있다. 대중적인 장르영화에서 이는 이점이 있다.

 

1953년 우치다 도무는 10년 만에 일본으로 돌아왔다. 그의 세 번째 시기이자 새로운 전성기가 이때부터 시작한다. 대부분 시대극과 장르성 영화들을 주로 만들었는데, 전후 복귀 제 일작인 <후지산의 혈창>(1955)은 전편에 감도는 살기로 가득한 뛰어난 사무라이극이다. 그의 사무라이 영화는 활극의 장쾌함과 격렬함이 특징이지만, 주로 약자에게 시선을 향하고 지배계급, 빈부의 차이에 분노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활극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배우나 스태프에게 엄격하고 무서운 감독으로도 유명한데, 그래서인지 그의 사무라이 영화에서 뼈 굵은 인물들의 결기가 언제나 기억난다. 우치다 도무는 이 영화외에도 1950-60년대 시대극 왕국을 자랑하던 도에이 영화사에서 ‘대보살 고개’ 3부작(1957∼59)과 ‘미야모토 무사시’ 5부작(1961∼65) 등의 스펙터클한 시대극을 연출했다. 

 

 

전후 일본사회에 대한 우치다 도무의 비전은 두 편의 영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패전 후 미군 점령기의 일본사회를 그린 <내면의 굴레>(1955)와 일본 하층계급의 원한의 감정을 소설로 썼던 미즈카미 쓰도무의 원작을 각색한 <기아해협>(1964)이 그것이다. 특히 <기아해협>은 우치다 도무의 절정의 작품아다. 전후 혼란의 시기. 극단적인 빈곤에서 작은 범죄로 전과자가 된 한 남자가 있다. 그는 방화, 절도, 살인이라는 범죄에 우연히 가담하면서 점점 더 큰 범죄자가 된다. 그리고 그를 추적하는 노형사가 있다. 범죄자인 남자는 시골의 창녀에게서 마음의 평안을 얻는데, 영화에서 이 둘의 사랑은 그 어떤 낭만적인 사랑 장면보다 훨씬 더 절실한 마음의 접촉을 느끼게 한다. 현장검증을 위해 북해도로 압송되는 순간에 갑자기 발생하는 마지막 사건이 보는 이들에게 충격을 더한다. 일본의 영화평론가인 사토 다다오가 지적하듯이 전편에 패전 후의 일본의 황량한 세상이 사실적으로 그려진다. 다른 한편 그렇기 때문에 따뜻한 구원을 바라는 처참한 염원이 작품전체에 아름다운 비애감으로 흐르고 있다.  

 

우치다 도무는 일흔 둘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앞으로 10년은 더 살고 싶다. 이렇게 머릿속에 만들고 싶은 것이 많이 있는데’라며 한탄했다고 한다. 1970년은 일본영화의 황금기가 이미 끝나던 시기였다. 그의 특별한 삶이 더 많은 작품들을 필요로 했었지만, 그는 더 이상 영화를 만들지 못했다. 말년에 그는 일생의 대작 ‘도슈사이 사라쿠’에 끝까지 집념을 불태웠지만 결국 영화를 만들 수는 없었다. 이번 특별전이 미지의 거장을 만나는 첫 번째 특별한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 '우치다 도무 특별전'이 서울아트시네마와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동시에 열리고 있다. 상영작이 동일한 것은 아니기에, 전주국제영화제에서만 상영되는 초기 시절의 영화들을 필히 볼 필요가 있다. 후기작 을 보아야 제대로 이 작가의 진면목을 살펴볼 수 있다.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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