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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차이밍량 특별전

[차이밍량 특별전] “세계는 어떻게 균열되는가” - <하류> / 임대근 교수 시네토크

[차이밍량 특별전]


“세계는 어떻게 균열되는가”

- 차이밍량 <하류> / 임대근 교수 시네토크





임대근(한국외대 교수) 오늘은 차이밍량 영화를 보며 내가 생각한 것들에 대해 간단하게 이야기할까 한다. 차이밍량 감독의 영화를 많이 본 분도 있을 테고, 이번 기회에 처음 접한 분도 있을 것이다. 경험에 따라 다르겠지만 차이밍량의 영화를 대하는 입장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지 않나 싶다.

첫 번째는 차이밍량 영화를 ‘대만 영화’로 간주하는 것이다. 당연히 차이밍량은 대만에서 영화를 만들었지만, 이때 말하는 ‘대만 영화’는 학계에서 이야기하는 ‘내셔널 시네마’의 관점으로 보는 입장이다. 두 번째는 좀 더 보편적인 시선으로, 즉 인간의 문제를 다룬 영화로 보는 것이다. 차이밍량의 영화가 20세기 말을 살아간 현대 도시인의 문제에 집중하고 있다고 보는 관점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차이밍량의 독특한 영화 미학에 집중하는 관점이다. 이때 이 세 가지 관점이 분명하게 나누어진다거나, 어떤 하나의 관점이 다른 하나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디에 집중하느냐에 따라 방향이 달라질 수는 있다.


먼저 첫 번째 관점에 대해서만 잠깐 이야기하자면, 개인적으로, 내셔널 시네마란 관점으로 차이밍량을 해석하는 건 좀 회의적으로 생각하는 편이다. 일단 차이밍량의 영화를 통해 대만 사회의 모순과 갈등, 또는 대만의 역사적 문제를 읽어내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차이밍량이 말레이시아에서 태어나 나중에 대만으로 건너온 일종의 ‘화교’라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물론 현재 대만에서 차이밍량이 차지하는 위치는 그렇지 않지만 초창기에는 디아스포라로서 소외감을 겪었다고 감독이 직접 밝히기도 했었다. 대만 사회에서 제삼자로서 살았던 감독이기에 대만 사회의 내부적인 문제에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었던 게 아닌가 조심스레 가정해 본다.

허우 샤오시엔 감독과 비교해 볼 수도 있다. 대만 사회 내부의 큰 갈등 중 하나는 대륙에서 건너온 중국인들과 원래 대만에서 살고 있었던 사람들 간의 갈등, 즉 ‘외성인 - 본성인’ 문제다. 대만 사회를 이해하는 데 이 문제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2.28 사건(1947년, 정부에 항의하는 대만 시민들을 경찰이 무자비하게 진압한 사건이다)을 다룬 <비정성시>가 대표적이다. 허우 샤오시엔뿐 아니라 에드워드 양 같은 감독도 대만 내부의 사회적, 역사적 문제에 집중했는데 차이밍량은 이들과 대조적으로 매우 개인적인 문제에 집중했다. 오늘 <하류>를 봤으니 알겠지만 이 영화 속 사건들은 꼭 타이베이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서울에서도, 도쿄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내셔널 알레고리’란 말이 있는데, 즉 이 영화의 이야기를 대만 사회를 비추는 알레고리로 읽어낼 수 있을지에 대해서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물론 열심히 분석하면 그렇게 읽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과잉이라 생각하고, 결론적으로 차이밍량의 영화가 내셔널 시네마로서의 성격이 강하다고 보지 않는다.



오늘 시네토크의 제목은 “세계는 어떻게 균열되는가”이다. 균열이란 키워드를 가지고 차이밍량의 영화에 대해 설명해 볼까 한다. 균열이라고 하는 것은 세계의 공고한 질서와 체계에 금을 내는 일이다. 딱딱했던, 고정불변한 모양에 힘을 가해 쪼개질 수 있을 정도로 금을 내는 일이다. 그리고 균열의 과정은 그것이 파편화되는 것이며 나아가, 개인적으로는, 고체였던 것이 액체로 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균열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균열은 기존 시스템에 대한 불신과 회의에서 시작된다. 차이밍량 영화를 보면 우리가 옳다고 믿고 있던 것, 정상적이라 생각하던 것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하류>도 그렇고 데뷔작인 <청소년 나타> 같은 것도 그렇다. 오락실에서 돈 좀 훔치면 어때? 즉 이렇게도 살아갈 수 있다고 질문을 던지는 거다. <애정만세>의 경우, 주인 없는 집에서 살면 어때? 남자가 여자 옷을 입으면 어때? 이런 질문을 던진다. <하류>는 그런 질문의 어떤 극단을 보여준다. 남자가 남자와 자면 안 돼? 심지어 이 질문이 근친동성애의 문제로까지 나아간다. 차이밍량의 영화는 이런 질문들을 통해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해온 것, 세계는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고정된 시각과 고정불변한 본질적인 믿음에 의심을 품게 한다.

그런 측면에서 차이밍량은, 첫째, 대만 영화 전체에 대한 불신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차이밍량은 1992년에 장편 데뷔작 <청소년 나타>를 만들었는데, 이때는 이미 허우 샤오시엔이나 에드워드 양 같은 감독들이 한창 활동하고 있을 때다. 이 세 명으로 대표되는 대만 뉴웨이브의 이전에는 대만 영화사에 크게 세 종류의 영화들이 있었다. 하나는 나라에서 만든 반공영화, 그리고 또 하나는 역사극(이한상 감독의 <양산백과 축영대>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또 하나는 호금전 등의 감독이 만든 무협 영화다. 즉 기존의 대만 영화들은 전통적인 이야기에 크게 기대고 있었다.

1987년까지 계엄 상태였던 대만 사회는 이후 민주화의 물결을 맞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영화계에도 새바람이 불었고, ‘대만 영화 선언’이 1987년에 나왔다. 기존 언론 매체와 평론가들이 결탁해 대만 영화의 수준을 형편없이 떨어뜨리고 있으니 그런 퇴행적인 활동에 지지를 보내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심지어 “침을 뱉겠다”는 거침없는 표현도 아끼지 않았다. 이 선언에 허우 샤오시엔, 에드워드 양 등, 내로라하는 평론가들 53명 정도가 동참했다. 당시 영화를 본격적으로 찍고 있지 않았던 차이밍량은 동참하지 않았지만, 이 선언은 홍콩 영화계에도 영향을 미칠 정도로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차이밍량은 다른 감독에 비해 조금 늦게 활동을 시작했는데(차이밍량을 대만 뉴웨이브 2세대라 보는 사람들도 있다) 당시 대만 영화는 기존의 영화들과 굉장히 다른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시기였다. 차이밍량의 영화를 볼 때는 이런 시대적 흐름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두 번째로, 차이밍량의 영화에는 거대 서사에 대한 불신이 있다. 차이밍량은 역사나 현실의 중요한 모순들에 집중적으로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 많은 상업영화는 물론 예술영화들도 ‘영화는 모름지기 이래야 한다’면서 역사와 같은 ‘큰 이야기’를 많이 했다. 하지만 차이밍량은 영화의 이야기에 아주 일상적인 문제들을 끌어들인다. 레이먼드 윌리엄스 Raymond Williams라는 연구자는 “문화라는 것은 포괄적인 실제다. 우리 주위에 보편적으로 편재하는 것이지 높은 수준의 것들만이 문화가 아니다.”라고 이야기했다. 그 말을 빌려오면 차이밍량은 영화가 어떤 고상한, 높은 층위의 거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 있는 소소한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다시 말해 영화를 ‘포괄적 실제’로 간주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 중 첫 번째는 차이밍량 영화에 화장실 장면이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사실 화장실을 이렇게 많이 보여주는 영화가 많지 않다.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는 장면이 꼭 들어갈 필요가 없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차이밍량은 굳이 그걸 보여준다. 왜냐하면 그게 우리 삶이고, 우리 일상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른 영화는 그런 걸 배제시키면서 ‘삶은 지독하게 아름답다’, 또는 ‘지독하게 추하다’며 포장을 하는데 차이밍량은 그냥 일상을 보여준다. 또 하나는 섹스와 관련된 장면이 매우 많다. 이 역시 공공적으로 쉽게 꺼내지 않는 주제이다. 그러나 누구나 자기 개인의 영역에서 즐기는 섹스라는 문제를 차이밍량은 끌고 들어온다. 그렇게 우리 삶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감독들도 많이 보여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밥을 먹는 장면들 같은 것도 차이밍량의 영화에서 특히 많이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세 번째로는 서사 구조에 대한 불신이 있다. 즉 차이밍량은 구조적인 서사를 만들지 않는다. 많은 상업 영화들은 영화가 시작하면 기-승-전-결로 흘러가다가 마지막에 문제의 해결을 보여준다. 파국이든 해피엔딩이든 결국 갈등이 마무리가 된다. 즉 완결된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이 보통의 영화가 하는 일인데 차이밍량의 영화는 완결을 제시하지 않는다. 완결된 이야기에 익숙한 관객들은 불편해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떻게 됐다는 거야?’ 하지만 차이밍량은 더 이상 얘기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열려 있다. 이는 우리의 삶 자체가 그렇게 드라마틱하게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평소에 접하지 않는 일을 보면 ‘영화 같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우리의 일상은 그렇게 영화 같지 않다. 이를테면 하나의 사건이 발생하면 갑자기 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막 뛰어다니다가 종결 짓는 것. 아시다시피 우리는 이렇게 영화처럼 살지 않는다.

차이밍량은 우리의 이런 평범한 일상 자체를 보여주기 때문에 이야기들이 전부 파편화되어 있다. 사실 <하류>는 그나마 이야기를 잘 모은 축에 속한다. 마지막을 향해 고조되어 가는 흐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다른 영화는 이 정도의 구조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등장인물이 나와도 이 인물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어디에서 왔고 어떤 관계에 놓여있는지 알 수 없다. 또는 설명을 해주더라도 굉장히 오래 보여주는 방법을 통해 소개한다. 이는 데뷔작인 <청소년 나타>에서부터 그랬다. 이런 점을 통해서는 포스트모던한 징후를 읽을 수 있을 것이고, 일상을 끌고 들어왔다는 점에서 네오 리얼리즘이나 모던시네마의 경향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네 번째로는 언어에 대한 불신이 있다. 내 생각에 차이밍량은 언어를 믿지 않는 것 같다. <하류>는 비교적 말이 많이 나오는 편이다. 그런데 차이밍량의 영화의 언어를 듣고 있으면 굉장히 기능적이고 지시적인 언어일 때가 많다. 이는 직설적으로 자기가 말하고 싶은 걸 이야기하는 것이지 언어 내부에 어떤 의미를 내포한다거나, 상징적인 무언가를 전달하거나, 심오한 뜻을 가진 것이 아니다. 언어에 대한 이런 불신 때문에 거꾸로, 차이밍량은 이미지에 대한 믿음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화면으로 그냥 보여줄 뿐, 그걸 꼭 배우들의 대사를 통해 전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인물들이 혼자 있는 장면이 많고, 두 명 이상이 나와도 대화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말하자면, 이성애 질서에 대한 불신도 보여준다. 차이밍량의 영화는 이성애가 공고하게 쌓아왔던 체제를 무너뜨리는 작업을 한다. 참고로 오늘 본 <하류>는 대만 영화사에서 최초의 퀴어 영화다. 동성애에 대한 문제를 대만에서 본격적으로 제시한 감독은 차이밍량이 처음이다. <애정만세>(1994)에서 이런 문제를 살짝 건드렸다가 <하류>에서 본격적으로 등장시켰다.

차이밍량의 영화 속 인물들은 대부분 미성숙한 인물들이다.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주도하는 근대화된 사회의 인물이 아니다. 특히 자기정체성을 분명하게 갖지 못한 미성숙한 소년의 이미지로 많이 그려진다. 이를테면 <애정만세>의 주인공을 보자. 그는 영업을 위해 양복을 입고 돌아다니지만 내부적으로는 어린아이의 형상을 갖고 있다. 이런 미성숙한 인물, 또는 사회적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인물들을 낯선 공간으로 내몬다. 주인 없는 집, 게이 사우나 같은 곳으로 연약한 인물들을 집어넣고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관찰하는 것이다. 이런 공간 자체를 불신의 공간, 회의의 공간이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즉 산산이 부서진 인물들이 이런 공간에 어떻게 집착하는지를 통해서 기존의 딱딱한 사회에 금을 내고 균열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 결과 나타나는 대표적인 이미지가 <하류>에 나오는 물이다. 이 영화를 보면 천장에서 물이 샌다. <구멍>(1998) 역시 그렇다. 균열이 계속 이루어지다가 결국 액체적인 이미지로 변화하는 것이다. 차이밍량의 영화에서 물, 소변, 비 등 액체적 이미지가 많이 등장하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액체적인 것은 고체적인 것을 깨부술 수 있으며, 정확하게 유형화되는 것이 아니라 이곳저곳을 흘러다니며 세계를 재편하는 역할을 한다. <청소년 나타>에서 비가 상당히 많이 내리다가 하수구가 역류해서 물이 집을 채우는 장면들을 떠올려 보자. 아니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목욕탕 장면도 그렇다.

궁극적으로 감독이 꿈꾸는 세상은 단단한 고체적 질서가 깨진 ‘액체적 세상’이 아닐까 한다. 물론 그 과정이 순탄치는 않다. 어렵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게다가 감독은 인간이 주체적인 존재라고 믿지 않는다. 근대적 개념의 주체적 인간은 어려운 상황에 적극적으로 도전해 문제를 해결하고 갈등을 봉합하겠지만, 차이밍량의 영화 속 인물들은 그럴 수 있는 힘이 없는 미성숙한 인간들이다. 그래서 결국 자신의 한계와 자신이 놓인 복잡한 현실이 겹치면서 각각의 인물들이 지독한 삶의 비애 속으로 빠지는 결론을 맞는다. <애정만세>의 유명한 마지막 롱테이크씬이 이를 잘 보여준다. 우리는 그녀가 왜 우는지, 왜 그렇게 길게 우는지 모른다. 하지만 여기에는 자기 삶에 대한 질문과  회의가 엄청나게 뒤엉켜 있다. 말로 표현은 못 하지만 관객들이 여기에 공감을 가질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결국 차이밍량이 보여주는 인물과 이야기는 우리가 어떻게 해결하지 못하는 인간 삶의 비의적 부분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관객 1 차이밍량의 영화들을 보면 이강생을 비롯해 같은 배우들이 반복해서 출연한다. 이야기는 조금씩 다르지만 거의 같은 배우들이 비슷한 연기들을 보여준다.

임대근 실제로 차이밍량 감독의 영화가 동어반복이 아니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감독이 그 질문에 대해 “내 영화를 잘못 본 것이다. 나는 전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반박했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차이밍량의 영화를 단편적인 개별 영화로 보지 않고 일종의 시리즈로 보기도 한다. <청소년 나타>의 어린 소년이었던 이강생이 계속 나이를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중년의 인물을 연기하는 것이다. 특히 차이밍량을 연구하는 분들 중에는 이를 두고 ‘프랙탈 구조’로 이해하기도 한다. 각각의 개별 영화들이 전체적으로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한다고 보는 것이다. 완전히 딱 맞아떨어지지는 않지만 한 편의 영화가 다른 영화를 마주보면서 하나의 큰 구조를 이룬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차이밍량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에 매번 다른 배우를 캐스팅하지 않고 이강생을 비롯한 특정 배우들을 계속 캐스팅하는 게 아닌가 싶다.

정리 I 김보년 프로그램팀

사진 I 최미연 자원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