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사강좌①] 지난 11월 12일 <쉬린> 상영 후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현재’라는 주제로 홍성남 영화평론가의 강연이 열렸다. 2000년 이후 이전과는 다른 독특한 색깔로 다른 영화적 형식을 지향하고 있는 키아로스타미의 현재 영화세계와 생각을 읽을 수 있었던 그 시간을 전한다.


홍성남(영화평론가): 개인적으로 키아로스타미 감독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있어서 <쉬린>이란 작품을 접하고 영화에 대해 찾아보기도 했는데, 자료가 많지 않다. 비평가들의 관심에서도 멀어져있는 것 같다. <쉬린>뿐 아니라 현재의 키아로스타미에 대한 관심의 결여, 다소 냉담한 시선이 존재한다. 십여년 전만 해도 키아로스타미는 비평가나 감독들 사이에서도 열렬히 각광을 받곤 했었다. 그러나 2002년 <텐>을 만들면서부터는 이전과는 다른 형식주의, 추상화를 지향하게 되고, 이전의 영화에서 보였던 서정성을 지우자, 많은 사람들이 그에 대한 관심에서 등을 돌렸다. 키아로스타미의 2000년대의 영화들은 이전까지의 자신의 영화들에서 어떤 도약을 하게 된다. <텐> 이전의 영화와 이후의 영화가 연결지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지점이 흐릿하거나 어느 정도 거리가 있게 느껴진다.

개인적으로 2002년에 <텐>을 보면서 많이 놀랐고, 그 해 나온 최고의 영화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정도의 성취를 이룬 감독이 과연 이후에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하는 불안도 있었다. 하지만 이후의 <파이브>나 <쉬린>과 같은 영화를 보면서 그러한 불안을 지울 수 있었고, 그의 이후의 행보가 늘 궁금해진다. <텐> 이후의 영화들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영화가 어렵다고 느끼곤 한다. 하지만 감독 자신은 자신의 영화를 보면서 관객이 이해를 못하거나 잠을 잔다고 해도 상관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것은 감독의 책임이 아니라 관객의 오해나 이해 부족의 측면, 또는 영화와 본격적으로 상호작용을 하지 못한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건 영화를 보고 나왔을 때, 관객들은 저마다 다른 생각들을 가지고 있겠지만, 기분 좋은 마음가짐을 갖고 극장을 나선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고 말했다.

오늘 이 자리에서는 <텐> 이후의 키아로스타미의 영화 세계에 대해 조금 전 보신 <쉬린>을 중심으로 말씀드리고자 한다. <쉬린>이라는 영화만을 따로 떼어 놓고 보면 선뜻 이해가 잘 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 <쉬린>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적 여정과 관련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키아로스타미는 왜 이란의 억압적 현실 안에서 주변적 존재인 여성을 그리지 않느냐는 힐난을 종종 받곤 했다. 여성의 표현과 관련해서 그는 지금까지의 이란 영화에서 그려진 여성은 대부분 상투적이었다고 말했다. 그녀들은 어머니이거나 유혹하는 존재이거나, 사랑에 대해 낭만적이고 수동적인 여성으로 그려질 뿐이었다. 실제로 이란 사회가 여성의 표현에 대해 가하는 검열은 제약이 될 수밖에 없었고 키아로스타미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단적인 예로 이란 영화에서 여성은 실외는 물론이고 실내에서도 반드시 차도르를 쓰고 있어야한다. 그러다가 90년대 말 이후의 영화들에서부터 조금씩, 키아로스타미는 영화 속에 강한 여성들을 등장한다.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에서 주인공은 남성이지만 주인공 주위의 인물들로 강하고 자신의 주장을 갖는 여성들을 설정했다. 그동안 이란 영화에서 상투적으로 그려졌던 시골의 유약한 여성의 이미지와 다르게, 자신도 시를 쓸 수 있냐며 물음을 던지는 소녀라든가 도시에 거주하는 직업여성 등이 등장한다. <ABC 아프리카>에서도 영화 안에서 생명력과 활력을 가진 존재들은 여성들로 그려진다. 그리고 <텐>에 이르면 본격적으로 여성의 이야기를 다루게 된다. <텐>은 열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으며, 운전을 하는 주인공과 조수석에 앉아 그녀와 대화하는 인물들이 바뀔 때마다 하나의 에피소드를 이룬다. 다양한 계급과 환경 안에 존재하는 여성들이 주인공과 동승하게 되는데, 영화는 바로 그녀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을 보여준다. <텐>에 등장하는 남성은 주인공의 어린 아들 단 한명이다. <쉬린>에서도 중심 공간을 차지하는 것은 모두 여성들이다.

<쉬린>의 영화 속 관객들이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관객들의 얼굴을 비춰지는 빛의 움직임이나, 소리만 들려오지만 전쟁이나 죽음의 묘사 등에 있어서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은 영화이지 않을까 짐작하게 된다. 따라서 <쉬린>은 한편으로는 영화의 메카니즘을 다루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쉬린>은 기본적으로 여성과 얼굴, 아름다움에 대한 매혹을 클로즈업을 통해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영화인 것 같다. 이는 단지 외모상의 아름다움에 대한 매혹을 넘어선다. 예민하고 섬세하게 반응하는 존재에 대한 매혹이 담겨있다.

<텐> 이후 두드러지는 특징 중 하나는 미니멀리즘에 대한 추구이다. 훌륭한 감독이라고 한다면, 세상의 어떤 면 또는 서로 반대쪽에 있다고 가정되는 개념들이 이상하고 흥미롭게 긴장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한 덕목이 아닐까 생각된다. 키아로스타미의 경우 미니멀리즘, 혹은 단순성이라고 하는 것을 영화의 미학적 원리로 가져가지만, 이 단순성을 가지고 풍요로움을 끌어오는 덕목을 가진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텐>의 구성요소는 몇몇의 배우들과 영화 전체의 공간이 되는 자동차 한 대, 운전석과 조수석 앞에 작은 디지털 카메라 정도다.

<쉬린>의 구성 역시 굉장히 단순한다. 쇼트를 잡아내는 영화의 원칙은 전체적으로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키아로스타미는 하나의 쇼트 구성의 원칙을 가지고서도 풍성한 무언가를 담아낸다. 영화 속 관객의 얼굴을 통해 관객과 영화는 하나의 관계를 만든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만이 아니라 또 한편으로는, 표정이라는 것 안에서 목소리의 표정이라고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쉬린>에서의 목소리는 영화 속의 영화이다. 목소리의 표정들을 우리는 느끼게 된다. 영화 속 영화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우리는 영화 속 관객들이 보고 있는 영화를 상상하게 된다. 상상을 통해 떠올리는 것은 라디오를 통해 내러티브를 만들어가는 것과는 다르다. 우리는 그 영화 속 영화를 보는 대신 그것을 보는 관객들을 보는데, 우리에게 보이는 관객들은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들리는 내러티브와 결합하여 우리에게 어떤 감정을 전달해준다. 또 영화를 보는 우리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자극과 반추의 계기를 만들어 준다. 그런 점에서 <쉬린>은 굉장히 단순한 구성에도 불구하고 결코 단순하지가 않다.

현실과 허구, 거짓과 리얼리티의 교차 혹은 만남의 측면에서 이 영화를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2000년대 이전의 키아로스타미를 설명했던 요소 중의 하나는 네오리얼리즘이었다. 하지만 키아로스타미는 가장 네오리얼리즘적으로 보이는 것에서 조차도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지 않았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만 하더라도, 그 안에는 이미 허구적 요소가 기입되어 있는데, 이를테면 영화의 구불구불한 언덕길은 그 영화의 컨셉과 효과를 위해 키아로스타미와 스텝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길이었다. <텐> 다음에 만든 <파이브>는 형식적인 면에 있어서 <텐>보다 더 단순해졌다. <텐>에서부터 <쉬린>으로 이어지는 그의 영화 세계에서 중요한 연결지점이 되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키아로스타미는 <파이브>에 대해, 그저 카메라를 갖다 놓고서 자신은 잠을 잤다고 말하기 했다. <파이브>와 같은 형식의 연출은 물론 디지털이라고 하는 테크놀로지의 변화를 통해서 가능해진 것이기도 하지만 그럼으로 해서 감독의 위치, 연출의 개념이 바뀌게 된다. 그 스스로도 이런 식으로 영화를 만들게 된다면 연출자라고 하는 것이 이전과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카메라가 돌아가면서 영화감독의 할 일이 시작된다는 것이 전통적인 관념이라면, <파이브>와 같은 경우, 컨셉을 만드는 과정이 감독에겐 가장 중요해지고 카메라가 돌아가는 순간 연출자의 일은 끝난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연출의 소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현실과 픽션의 결합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어떤 대상에 카메라를 놓고 감독의 일은 끝났다라고 했을 때, 아무런 인위적 조작이 없는 다큐멘타리와 같은 접근 방식으로 대상을 포착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식의 접근 안에서도 감독이 현실에 조작하고 픽션을 기입한다.

<쉬린>도 이러한 맥락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과연 키아로스타미는 영화 속 관객의 반응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포착했을까. 실제로 그는 <쉬린>의 촬영을 위해 아주 간단한 다이어그램이나 지시어 정도만 적힌 종이를 배우들 앞에 보여주고서, 어느 방향으로 시선을 돌려라, 여러분들이 봤던 가장 슬픈 영화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려라 정도의 간단한 디렉션만을 줬다고 한다. 대상의 포착하는 과정에 배우들을 지시하는 간단한 메모와 키아로스타미라고 하는 촉매자 정도만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도에서는 무엇이 리얼리티이고 픽션인지 구별하기 힘들다. 과연 이 안에 무엇이 현실인가? 오히려 배우들에게 중요한 현실은 종이 위의 디렉션이 아니라 자신들이 머릿속에 그리는 어떤 상황들이다. 키아로스타미는 배우들의 반응을 먼저 촬영하고 그 다음에 영화 속 영화의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사운드와 이미지, 이야기와 반응들이 미묘하게 불일치하는 점들이 발견된다는 점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안에서 배우들은 영화라는 픽션이자 한편으로는 마음속의 리얼리티가 존재하고, 이야기가 보이지 않으면서도 우리와 교류하는 한편의 영화가 만들어졌다. 즉 픽션이라는 것이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배우들의 마음속에, 그리고 이 영화를 보는 우리의 머릿속에 생겨난다는 것이다.


<쉬린>에는 영화에서 다뤄지는 요소들이 모두 존재한다. 빛이 있고, 배우들과 스타가 있고, 우리가 쉽게 할 수 있는 방식과는 다르게 역전된 순서로 이루어졌지만 편집이 존재한다. 영화는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는 것인가를 계속 상기하게 되는 면이 있다. <파이브>를 만들면서 키아로스타미는 예전처럼 영화를 만드는 것은 지겨운 일이며, 새로운 방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밀란 쿤데라가 했던 말을 빌려, 하나의 단어로 된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도 했다. <파이브>나 <쉬린>은 바라보는 시점과 쇼트 자체가 한 단어나 다름없다. 키아로스타미는 문학적인 스토리는 싫지만, 한 가지 이미지로 만든 영화를 만든다 해도 스토리가 전혀 없는 영화는 생각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그에 의하면 정물의 이미지로 된 영화도 스토리를 갖기 마련인데, 마치 미술관에서 그림을 보는 동안 이미지 하나를 앞에 두고 사람들은 머릿속에서 스스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영화는 하나의 이미지를 통해서도 필연적으로 관객에게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키아로스타미는 무엇보다 스토리에 오염되어 있는 영화가 아닌 다른 방식의 영화로 사람들의 오염되고, 닳아져있는 눈과 귀를 새로 씻어야 할 필요가 있으며, 시청각적인 해독제가 될 수 있는 그러한 영화를 만들어야한다고 말한다. 키아로스타미의 방법론은 굳이 모든 것을 보여줄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있다. 그는 뭔가를 더해서 영화를 만들기보다는 뭔가를 빼가면서 만들어 가는데, 그렇게 빠지고 생략된 부분을 통해 관객은 상상력을 더 발휘하게 된다. <쉬린>은 영화의 스토리는 어디서 비롯되어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인가에 대한 영화이면서, 또한 관객이 상호작용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 것인가에 대해 키아로스타미가 자신의 관점을 영화적 방식으로 풀어나간 영화라고 생각한다. 한 영화감독의 영화에 대한 관점을 집약하면서 동시에, 영화적인 방식으로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지적인 것과 함께 감정적인 것을 촉구하는 영화이다. (정리: 장지혜)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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