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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시네바캉스 서울

[시네토크] <분노의 악령>과 비전의 매혹

지난 8월 19일 브라이언 드팔마의 <분노의 악령> 상영후 김성욱 프로그램 디렉터의 강연이 이어졌다. 시스템 내부의 균열을 만들어내는 새로운 비전에 대한 감각을 담고 있는 영화만큼이나 흥미로웠던 이날의 강연 일부를 옮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이번 시네바캉스의 ‘이미지의 파열’ 섹션은 70년대 말부터 80년대의 미국 영화들 안에서 시스템적 균열의 양상들을 살펴볼 수 있는 작품들을 꼽았다. 그 중 <분노의 악령>(1978)은 일순위 중 하나였고, 나머지 영화들이 그에 따라 배치됐다고 할 수 있다. ‘시네필의 바캉스’ 섹션의 영화들은 좀 더 일탈적인 영화들로, 그 자체로 작가들이 마치 바캉스를 떠나듯이 휴양하며 찍은 듯한 영화들인데 비해, ‘이미지의 파열’의 영화들은 바캉스를 떠나지 못하고 계속 즉물적으로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시스템 내에서 균열을 만들어내는 영화들이라고 생각한다. 자본이나 시스템의 만족을 어느 정도는 충족시켜주면서도 스스로 고유한 파열을 만들어가는 과정 안에서 고군분투했던 작가들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오늘 상영한 드팔마의 영화를 굉장히 좋아했다. 영화 안에는 젊은 시절의 긴장성이나 트라우마, 분노 같은 것들이 있는데, 허무맹랑하지만 한편으로는 놀랍고 가혹한 진실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트라우마를 품고 있는 젊은이들이 있고, 이들은 자신의 힘을 어찌할 바 모른다. 그 힘이 어디서 기원하는가는 모호하지만, 죽음과 관련된 트라우마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젊은이들의 에너지를 컨트롤하려는 집단이 있다. 그것은 국가적인 기관으로 등장하고, 동시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설정되어 있다. 창조력의 엄청난 힘을 컨트롤하려는 집단에 의해 희생당하는 한 명의 젊은이 로빈과 그 과정에서 오히려 아버지를 파괴해나가는 길리언이 존재하는 것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분노의 악령>에는 비전의 매혹 같은 것이 존재한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 투시자들의 삶에 대해 말하는데, 지나간 삶과 다가올 삶, 아주 무한한 우주의 기억을 간직한 세계와 접속해 보게 되는 투시자들의 비전을 길리언과 로빈이 갖고 있다는 것이다. 드팔마는 그러한 비전을 놀라운 방식으로 이 영화에서 표현하고 있다.

 

 

영화에는 두 개의 스토리 라인이 있고, 이 둘이 얽혀가면서 최종적인 국면에 이른다. 하나는 아버지가 아들 로빈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관계가 파열된 이후에 아버지가 아들을 찾아가는 이야기 안에는 일종의 이상한 미스터리 플롯, 패러노이드 이야기의 형식이 있다. 60년대 말에서 70년대 미국영화의 상당수가 이런 식의 편집증적인 영화, 음모적 영화라고 불리는 장르 안에 있으며, 그런 맥락 안에 이 영화가 존재한다. 다른 하나는 길리언이 염력을 통해 로빈과 교통해가는 이야기가 있다. 여기에는 트라우마 혹은 초자연적인 것 못지않게, 일종의 증인, 증언과 같은 연결점이 있으며 이는 앞서 말씀드린 비전을 독특하게 표현해낸다. 과거의 끔찍한 사건을 지켜보는 자로서의 길리언의 존재가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그녀는 이중적 공포를 갖고 있다. 하나는 무언가를 자꾸 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설명하는 바에 따르면 텅 빈 극장에 앉아 비어있는 스크린을 지켜보는데, 그 스크린이 뭔가로 채워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정신 혹은 뇌 속의 무언가가 비집고 나와 스크린에 그대로 투영되어, 마치 영화를 보듯이 사건을 목도하게 되는 그런 공포다. 길리언의 또 다른 공포는 접촉에 대한 것이다. 누군가와 손을 잡거나 만지면 피가 나오게 되기 때문에 그녀는 어머니와의 접촉도 꺼리게 된다. 이러한 모티브들은 <캐리>(1976)와 이면화를 이루며, 더 넓게 보면 <캐리>와 <분노의 악령>, <홈 무비>(1980), <드레스 투 킬>(1980), <블로우 아웃>(1981)이 굉장히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분노의 악령>은 원작 소설에서 출발한 것이긴 하지만, <캐리>와의 연속선 안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분노의 악령>에서 아이들이 갖고 있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국가가 컨트롤하려한다면, <캐리>에서는 어머니가 종교적인 차원에서 고양시키려 한다. 그 억압되어있던 에너지가 영화 후반부에 학교에서 벌어지는 파티에서 폭발하는데, 캐리는 양동이 가득 담긴 붉은 피를 뒤집어쓰고서 자신의 능력을 표현하게 된다. 이 장면에서 흥미로운 것은 분할화면의 사용이다. 캐리의 에너지가 자신의 몸의 한계를 넘어서게 될 때 몸 바깥으로 나아가게 되면서 순수한 힘으로 전이된다는 점이 특별하다. 그녀가 쳐다본다든가 손짓을 하면 그 에너지가 곧바로 분할화면의 다른 프레임 안에 파괴적인 힘으로 형상화된다. 하나의 프레임이 갖는 용적의 한계를 넘어서는 에너지가 또 다른 프레임들을 복수적으로 양상하는 특징이 있다. <분노의 악령>에서는 프레임의 경계지대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공존하는, 말하자면 후면영사처럼 표현되어 있는 또 다른 방식의 장면적 전환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캐리>의 분할화면과 <분노의 악령>의 독특한 프레임 배치를 연관지어 볼 수 있다.

 

 

사실 <캐리>와 <분노의 악령>이 연결되는 가장 큰 맥락은 <캐리>의 마지막 장면에서 찾을 수 있다. 길리언을 연기하는 에이미 어빙은 <캐리>에서는 캐리의 친구로 등장한다. 그녀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캐리의 무덤을 찾아가는 꿈을 꾸는데, 무덤에서 나온 캐리의 손은 그녀의 손을 붙잡는다. <분노의 악령>에서 길리언이 어떻게 초자연적 능력을 갖고 있는가에 대해 영화에서는 설명되지 않는데, <캐리>와 연관지어 보면, 캐리의 능력을 길리언이 전수받았다고 할 수 있다. 접촉을 통해 트라우마의 기억을 간직하게 된다는 것, 누군가가 죽어가며 분출하는 슬픔과 분노를 그것을 보는 자가 이어받게 된다는 것은 드팔마의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하며, 이후에 <드레스 투 킬>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유명한 엘리베이터에서의 살인 장면에서 죽어가는 자와 시선을 교환하고 그녀가 내미는 손을 잡으려는 여자에게 희생자의 마지막 제스쳐, 공포스런 몸짓이 이전되는 과정은 거울을 통해 왜곡된 프레임에 의해 표현되고 있다. 드팔마의 영화에 존재하는 접촉과 전수, 이전의 과정들은 달리 말하면 일종의 증인적 행위로서의 보기이며, 이는 드팔마 영화에서의 비전을 특징짓는다. 캐리의 무덤가에서 캐리와 접촉하면서 전수받은 초자연적 에너지가 <분노의 악령>에서는 점차적으로 꿈틀거리며 뛰쳐나오게 되는데, 그런 에너지들을 어떻게 조절해나가면서 장면화 하는지가 이 영화를 흥미롭게 만든다.

 

 

영화에서 시각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것은 텔레파시 능력을 표현하는 장면인데,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단편적인 이미지들로 등장한다. 그 이미지들은 죽음과 연관되어져 있으며, 하나는 과거를 다른 하나는 미래를 지칭하는 사건이다. 길리언이 계단에서 360도 패닝하면서 보는 것과 후면영사되는 과거의 장면은 시선에 의해 매칭되지 않지만, 그녀의 시선에 의해 점차적으로 과거의 장면을 보는 것 같이 표현된다. 과거는 마치 투사되는 영화의 이미지를 보는 것처럼 설정되어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그녀는 과거의 한 순간에 입회되어 있는 듯하다. 그녀는 현재에 있지만 과거를 보고 있고, 과거는 그녀 바깥에 있지만 동시에 과거 안에 그녀가 내재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녀가 보게 되는 파편적인 이미지들은 사실상 세계를 이루는 단편들이며, 이 단편들은 전체적인 종합성을 가지고 있진 않지만 각각의 조합들을 통해 비가시적인 세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지나가버린 과거를 증언하는 것과 비슷한 영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증언한다는 것이 이 영화에서는 비전을 경유해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분노의 악령>의 한 장면에선 영화를 본다는 설정이 초래하는 공포의 순간이 있다. 로빈의 아버지를 살해하는 순간을 촬영한 영상을 끊임없이 로빈에게 보여줌으로써 무언가를 본다는 것으로 인해 생기는 트라우마가 로빈의 폭발적인 에너지를 계속 증가시켜나간다. 이 영화에서 본다는 것은 인물들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증가시키는데, 트라우마적 보기의 방식이 초래하는 서로 다른 두 길이 존재한다. 드팔마가 캐리에 이어 로빈에게서 자기파괴적인 상태로 귀결되는 젊은이의 결말을 보여주었다면, 그들과 유사한 설정을 두면서 동시에 거기에서 이탈해나가는 길리언이라는 새로운 젊은이를 둠으로써 또 다른 길을 열었다고 생각된다. <분노의 악령>은 억압된 성인의 질서로 보수화되기 전단계에, 완벽하게 자신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염력, 텔레파시로 표현되는 이들의 능력은 달리 말하면 무언가를 생산하거나 가시화시키는 능력,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창조성의 능력과도 닮았다. 이 영화에서 국가는 국제적인 기관과 음모에 의해 이러한 젊은이들의 에너지들을 끌어들이고 통제하려고 한다. 이 영화의 쾌감은 젊은이들의 능력을 컨트롤해나가는 세계 안에서 그들의 창조적 에너지를 어떤 방식으로 전환해서 어떻게 그 세계와 싸움을 벌여나갈 것인가를 제시하는 점에 있다. 다른 한편으로 시스템 안에서 영화를 만들어나가는 드팔마의 고군분투의 느낌이 있다. 70년대에 뉴아메리칸시네마의 많은 감독들이 시스템에 투항해 주류적인 영화 안으로 편입되어 갈 때, 드팔마는 굉장히 이상하고 저급한 익스플로테이션한 장르들을 끌어들여 영화를 만든 뉴아메리칸시네마의 별종이었다. 그러 그가 <캐리>나 <분노의 악령>을 통해 주류적 시스템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데, 그러한 작가들이 갖는 공포와 불안의 느낌이 있는 것이다.

 

또 다른 방식으로 보면 보기의 능력과도 연결된다. 길리언은 내가 보게 될 것이 두렵기 때문에 눈을 감는 것이 두렵다고 말한다. 이 영화에서 본다는 것은 눈을 감음으로써 발생하는 어떤 비전의 과정이다. 눈을 감을 때 어떤 종류의 비전이 열리게 되는가, 이런 새로운 비전이 갖는 힘이 무엇인가를 이 영화는 알레고리처럼 제공하고 있다. 그것은 젊은이들이 에너지를 분출했던 60년대라는 시기를 거친 이후에 영화를 만들어가는 새로운 세대의 자각 능력을 떠올리게 한다. 그것은 일종의 트라우마적 보기의 방식이다. 이미 지나가버린 것을 두 눈을 감음으로써 바라보는 눈 먼 보기의 방식들, 증인적 보기의 방식들과 대단히 유사하다. 경우는 좀 다른지만 클로드 란츠만은 <쇼아>를 만들면서 역사적 트라우마를 직시할 때 맹인의 눈처럼 그것을 지켜본다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눈을 찌르거나 눈을 감는 것, 길리언이 로빈의 텅 빈 방을 보는 것과 같은 장면들, 그런 식의 맹인의 우화나 맹인적 보기의 방식은 역사적 트라우마와 마주하는 새로운 보기의 방식이라고 생각된다. 그것이 굉장히 이상한 방식의 공포영화로 나타나고 있긴 하지만, 이 영화에서 맹아적으로 표현되었고, 이는 이후 <드레스 투 킬>, <블로우 아웃>에서 보다 선명하게 표현된다.

 

 

이런 비슷한 시도를 근래 나왔던 영화들 중 토니 스콧의 <데자뷰>(2006)에서도 살펴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영화에는 감시적 기제를 통해 과거의 한 순간을 들여다보게되는 설정이 있다. 보기의 힘을 강조하고 그 능력을 이용해 테러라는 하나의 트라우마적 사건을 구제해 들어가는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스필버그의 <마이너리티 리포트>(2002)에서도 그런 부분을 보여주는데, 두 영화에서 공통적인 것은 인물이 거대한 하나의 거대한 스크린을 마주한다는 사태이다. <데자뷰>의 덴젤 워싱턴은 너무나도 생생하게 과거의 트라우마를 보게 된다. 그는 언제나 늦게, 죽음 이후에야 도착해서 희생자를 구할 수 없다는 절망감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과거의 시간 안으로 뛰어들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이야기의 설정은 좀 다르지만 이 영화에서, 방대한 양의 기억의 아카이브에 접촉해서 과거의 순간에 뛰어들 수 있다는 것, 스크린을 통해 이미 죽어버린 사람에게 생생하게 접촉해 들어가는 설정들은 길리언이 초자연적인 능력을 통해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 안에 접촉해 하나의 비전을 열어가는 행위와 굉장히 유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60년대의 넘쳐났던 에너지들이 서서히 소멸해가던 70년대 중후반에 그 에너지들이 창조적인 에너지로 전환되기 보다는 오히려 트라우마적인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영화에서 카사베츠가 연기한 칠드레스는 마지막 순간에 길리언에게 눈물을 흘릴 것을 권하고(이는 감정의 착취적 소비라 할 수 있다),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서 자신을 아버지로 받아들이라고 말하지만 길리언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잠재되어 있던 폭발적인 에너지의 창조적 전환의 실패와 추락, 그로 인한 고통과 비애에 내장되어 있는 에너지를 다시 파괴적인 힘으로 발휘해 들어가는 것이다. 길리언은 국가기관의 수장으로 존재하는 이 아버지의 몸을 완전히 박살내버리는데, 이것을 하나의 알레고리로 본다면 그런 식의 에너지를 영화적인 힘으로써 바꿔나가는 것은 비전의 힘이며 그러한 비전의 힘을 배양시켜나가는 것, 바로 여기에 드팔마라는 감독의 이후로의 방향과 그가 고심했던 바, 그리고 이 영화의 매력이 있다. 사유의 착취, 감정의 착취를 만들어가는 것이 어떻게 보면 굉장히 주류적인 것일 수 있고, 사회 안에서 보자면 시스템적으로 작동하는데, 새로운 보기의 방식들을 만들어가며 그러한 시스템들을 파열해가는 은유로서 이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언제나 이 영화가 나로서는 흥미롭다.

 

정리: 장지혜(관객 에디터) | 사진: 황초희(자원 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