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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한국 법정영화의 어떤 경향

[시네토크] 분노로 차 있으나 무의미한 법정 공방, 진실은 어디에도 없다 - <의뢰인> 상영 후 손영성 감독과의 대화

지난 3월 24일 오후 ‘한국 법정영화의 어떤 경향’의 상영작 하나인 <의뢰인> 상영 후 <의뢰인>을 만든 손영성 감독과의 대화가 이어졌다. 한국 법정영화란 장르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가 오간 그 현장을 전한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이번에 한국 법정영화들을 모아서 상영하게 되었다. 그 중 하나가 방금 보신 <의뢰인>이었는데, 한국영화들 중에서 장르적인 특징이 두드러지는 영화라는 생각이 드는데 일단 이 영화가 처음에 만들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본인이 직접 이런 장르성 영화를 계획했는지 아님 영화에서와 똑같이 ‘의뢰’를 받아서 제작했는지 알고 싶다.

손영성(영화감독): 영화사에서 시나리오 초고를 보고 잘 맞겠다 싶어 컨택을 했다. 시나리오가 60~70페이지면 120분 러닝 타임이 나오는데, 처음 초고 시나리오는 130p정도로 미드로 보면 한 시즌 정도 되는 분량이다. 그래서 결국 내용의 핵심만 남기고 다 줄였다. 원래 법정 스릴러를 되게 좋아하는 편이다. <라쇼몽>도 법정물로 회상을 통해서 진실의 상대성을 이야기하지 않나. 원래 할리우드 영화도 좋아하는데, <의뢰인>은 이런 법정 장르에다가 할리우드 영화 같은 분위기도 뒤섞여있다.

 

김성욱: 처음의 분량에서 줄여나갔을 때, 시나리오에서는 어떤 내용들이 생략되었는지?

손영성: 사건의 디테일한 것들을 줄여나갔다. 한철민이라는 사람이 범인 진위 여부를 따지는 과정에서 증거 조작, 한철민의 과거 같은 서브플롯이 많이 빠졌다. 분량이 긴 드라마는 샛길로 빠지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영화는 짧기 때문에 직선적으로 목표를 향해 달려가야 하는데 샛길로 빠지면 길을 잃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름 목표를 향해서 가는 느낌으로 잘 줄인 것 같긴 하지만 완벽하진 않은 것 같다.

 

김성욱: 무고한 사람이 범죄자가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최종적인 지점에 이르면 범죄자를 어떻게 드러낼 수 있는 것인가에 집중한다. 검사는 증거 조작을 하고, 변호사가 변호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죄라고 추정하는 건 아니다. 최종적으로 보면 일반적인 법정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대결 구도가 크지 않고 오히려 범죄자라는 걸 어떻게 입증할 수 있을 것인가를 나타내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구도가 특이했다고 생각했다.

손영성: 저는 반대로 뻔 할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관객들은 이 영화를 <링컨 차를 탄 변호사>랑 비교를 많이 했다. 각색 방향 중에 반대에 부딪혀서 못한 방향이 있다. 강변호사가 한철민이 범인이었다는 사실을 먼저 알게 되는 플롯으로, 한철민이 과거사건 용의자였고 범인이었던 걸 미리 안 상태에서 한철민과 강변호사, 안검사 사이에 도덕적 딜레마에 빠지는 흐름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바꾸면 초고 내용을 다 바꿔야하니까, 결국 못 했다. 법정 장면들에서 조금 빈틈들이 있기 때문에 낡은 방식이더라도 캐릭터의 트라우마를 넣어서 캐릭터로 그 틈을 매꿔 보자는 방식으로 방향을 바꿨다. 사건 위주가 아닌 캐릭터의 화학 작용을 중요시한 부분 때문에 프로그래머님이 특이하다고 느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람의 매력으로 덮겠단 전략적 태도가 프리 때부터 있었다.

 

김성욱: 법정 영화의 일반적 경향은 법정 시스템 내에서 법이 지켜질 수 있을 것인가, 정의에 대항하여 투쟁을 하는 법적인 문제를 다루던가, 범인이 누군지 밝혀나가는 것이 주의 법정 드라마 내용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캐릭터의 힘에 의존하는 영화다. 검사의 아버지와 변호사의 스승이 마치 두 명의 자식이 서로 싸우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최종적으로는 범인을 잡기 위한 동일한 과정이긴 했지만, 그 등장에서 역할은 미미한데 아버지의 등장으로 인해서 관계도가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범인이나 정의 보다는 그 관계 때문에 일반적인 의미의 법정 드라마와 다른 느낌이었다. 원래 시나리오 상에서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나와 있었는지?

손영성: 아버지가 감사원장 출신으로 중앙 지검 내의 큰 선생님인 것이다. 검사의 아버지로 되어있어서 아버지를 그렇게 변호사가 이용한다는 설정은 초고에 속해있던 내용이었다. 각색 과정에서 안교수를 강변호사 아버지로 한번 놔본 적도 있었다.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변호를 한다는 것이 다른 맥락의 의미도 생겼다. 검사의 아버지가 상대편을 변호하는 아이러니한 부분이 사실 개인적으로는 만족스럽게 연출되진 않았다. 드라마틱한 여론이 있어서 남겨졌지만 감독으로서 동의가 안 되는 부분으로, 이 영화의 주제에 그 부분이 봉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백하건데 안 교수님 장면을 편집하고 싶었지만 그럴 힘이 없었다.

 

 

김성욱: 영화에 몇 가지 트릭이 있었던 것 같은데 집에 도착하는 장면이 두 번 반복된다. 처음에 관객들이 한철민을 따라가는 입장에서, 그가 범인이 아닌 것 같은 느낌으로 나오는데 일종의 트릭이었던 것 같다. 범죄자로 몰려있는 인물에게 근접해서 드러내고 있는 화면들이 있었다. 통상적으로 보면 트릭 같은 건데, 얘가 범죄자가 아닐 가능성들을 많이 두고 후반부로 갈수록 조금씩 요소들이 강해지지 않았나 싶다. 마지막 문을 가리키면서 숫자를 세는 장면과 연결되는 것과 아내가 물을 마시는 꿈 장면이 연결된다고 보는데, 연출 의도가 궁금하다.

손영성: 숫자 세는 장면이 겉으로 봤을 땐 여지를 남겨드는 긴가민가한 꼼수처럼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한철민과 와이프의 캐릭터를 잡기 위해서 고민하는 중 영화 안에선 드러나지 않고 설명이 되지 않는 주제를 놓고자 했다. 한철민이 억압적인 왕처럼 보이는 느낌으로 와이프에게 레이디 멕베스의 느낌을 넣고 싶었다. 멕베스 부인도 결국 자살을 하는데, 만약 한철민 아내도 남편이 살인자라는 걸 알면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멕베스가 죽기 직전에 읊는 시구가 ‘인생이 허무하고 소리와 분노로 가득 차 있지만 아무 의미도 없다’인데 이 작품과 맞닿아 있는 것 같다. 꺼지는 촛불의 이미지와도 유사하고. 법정 안에서 다들 분노에 차 소리 지르며 싸우지만 결국 그 안에서는 진실은 없지 않은가. 밖에서 우연과 우발성에 의해서 모든 게 밝혀지는 등 무의미하고 허무한 느낌의 결론이 영화 안에 공기처럼 있길 바랐다. 그 맥락에서 아내가 집에서 물을 먹는 환영도 나왔지만 관객들에겐 숫자 세는 장면이 꼼수처럼 느껴졌을 수도 있다. 각색을 하면서 새롭게 만들었던 주제의식과 선정적인 소재들이 부딪히는 과정 속에서 그 둘이 잘 녹아들지 못했던 것 같다.

 

 

관객1: 용의자의 꿈속이긴 했지만 물 마시는 아내가 살아있는 것은 아닌지 헷갈렸다. 이 작품은 기존의 정의가 승리하는 내용의 법정드라마와는 달랐던 것 같다.

손영성: 정의가 승리하는 드라마가 밝고 낮의 영화라면, 이 작품은 흐름이 밤의 영화인데 타협했기 때문에 황혼 영화라고 부르고 싶다. 관객이 많이 들어서 일단 나에게는 잘된 타협인 것 같다.

 

관객2: 하정우 배우의 캐스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손영성: 캐릭터에 대해서는 내가 얕다. 내가 만든 시나리오 속의 주인공이 배우를 만나면 캐릭터가 정반대로 된다. 그로 인해 감정 디테일이 달라지면서 연출 방향도 변한다. 그 사람의 성격을 뜯어고칠 수는 없지만, 배우의 성격이 붙으면서 다른 게 만들어지는 거다. 전의 <약탈자들>에서도 그랬는데. 내가 원하는 변호사의 모습이 아니었다. 결국 하정우라는 인물이 강변호사라는 인물을 새로 만들었다. 그 과정을 보면서 훨씬 하정우가 깊이 있다고 생각했다. 감독의 자리는 카메라 뒤이다. 배우와 촬영감독의 관계가 가장 내밀한데, 감독이 보는 거리는 멀고 감정과 계산과 추측성. 화학적 작용이 되었을 땐 다른 물결을 탄다. 하정우가 그 물결을 잘 타 훨씬 훌륭한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나는 의도가 더 많은 감독에 속해서 캐릭터는 오히려 얕고 그 밖에 의도를 드러내는데 집중했었다. 이번 작업에 하정우를 만나서 깨닫는 게 많았다.

 

김성욱: 미국 법정영화가 갖고 있는 대립적 충돌들을 한 공간 안에서 싸움이 아닌 논리적으로 전개되는 또 다른 액션이라고 본다. 최근에 뭔가를 정확하게 결정할 수 없는 사안들인데도, 법정영화라고 말할 수도 있고 범죄, 살인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텐데. 이런 영화들을 한국에서 만들 때 특히 장르적으로 만들 때는 한국적인 상황들 염두에 뒀을 때, 배심원들이 하는 역할이 영화 내에서는 별로 없고. 전체적으로 한국에서 사람들이 이를 수용하는 방식에 대해서 어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손영성: <도가니>, <이태원 살인사건>, <부러진 화살>은 다 봤다. 그 영화들이야말로 조금 다른 맥락에서 한국적 현실을 가져왔다. <의뢰인>은 한국적 맥락으로 결판을 내고 싶었지만 결국 할리우드를 선택했다. <의뢰인> 속 배심원들을 놓고 검사와 변호사가 공방을 벌인다는 설정은 실제가 아니다. 배심원들은 아직 결정권이 우리나라에선 없다. 사건의 실체를 두고 다투는 건 우리나라 법정에선 전개가 안 된다. 우리나라 영화에서 나올 양상은 배심제랑 판사가 앉아있는데, 배심원들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은 범인인 것 같다 아니다는 권고 수준이다. 배심제 문제 때문에 비리나, 안 좋은 문제가 생기거나 비판적 시선을 가진다는 식으로 스토리는 풀릴 수 있다. 그러나 실체를 다루는 치열한 공방이 사실감 있게 그대로 전달 될 수 있는 법정 분위기는 우리나라엔 없다. 사법고시도 없어지고 로스쿨이 생기는 등 법조계를 변화시키려는 시도들은 있으나 아직까지 기득권이 세기 때문에 힘들다. 법원의 이미지는 깨지나 실질적인 권력 행사는 내부에서는 여전히 강하다. 앞으로도 기획되는 법정영화나 변호사 영화들도 이때까지 나온 영화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한국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들여오기 보다는 영화적으로 재밌게 풀기 위해 아마 사실을 덮을 것이다. 현실이 바뀌어야 영화가 바뀌는데 <의뢰인>은 앞서간 케이스다.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에 그걸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관객3: 아직 법과 질서에 대해서 사회의식이 발전이 안 되어있다고 본다. 판사들도 일반 우매한 백성들이 배심원으로 앉아서 그들의 무엇을 판단하겠냐며 깔보는 것 같다. 한국도 배심원 제도가 있으면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손영성: 법조계에선 일반대중의 판단력을 믿지 못한다. 이 사람들이 똑똑하기 때문에 유무죄를 가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12명의 여론과 얘기를 통해 집단 지성이 발휘되는 것이다. 그들은 사람을 보는 거다. 사람을 보고 말의 진실함이라든지 단순한 논리적 순서를 따져보는 거다. 우리나라 법조계는 아직 계몽주의가 팽배해서 국민을 믿지 못한다. 비판까지 가긴 뭐하지만. 피의자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을 고려해서 뽑아야 한다고 본다. 그 법정 안에서 판단하는 사람들을 제도가 믿어야 배심원 제도가 나올 수가 있을 것이다.

 

김성욱: 어느덧 정리해야 할 시간이다. 전에 만들었던 <약탈자들>도 그렇고 법정드라마류의 영화를 차기작으로 생각하시는지 앞으로의 계획을 듣고 싶다.

손영성: 다음 영화는 다른 영화다. 기본적으로 좋아하는 건 미스테리 장르다. 미스테리는 모르는 걸 쫓아가는 건데, 기본적으로 무언가를 찾아가며 깨달음을 얻고 알기 전과 후가 세계가 다른 걸 좋아하는 것 같다. 열심히 그 미스테리에 관한 내용을 쓰고 있다.

정리: 윤서연(관객 에디터) | 사진: 최미연(자원 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