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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시차 - 동시대 영화 특별전

[시네토크] 기계에 대한 80년대적 감각 - 앤드류 부잘스키의 <컴퓨터 체스>

기계에 대한 80년대적 감각

- 앤드류 부잘스키의 <컴퓨터 체스>



지난 4월 13일(일), “시차 - 동시대 영화 특별전”의 상영작 중 하나인 앤드류 부잘스키의 <컴퓨터 체스>를 상영한 뒤 비평좌담 시간을 가졌다. 이날 이용철, 유운성, 김성욱 영화평론가는 초현실주의의 영향, 매체 사용의 독특한 점, 영화의 숨은 의미 등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컴퓨터 체스>의 앤드류 부잘스키 감독은 77년생으로 10년 전에 데뷔하여 네 편의 장편영화를 찍었다. 21세기 들어 등장한 미국 인디펜던트 감독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들은 전주국제영화제나 필름포럼을 통해서 대부분 국내에 소개가 되기도 했다.

유운성(영화평론가): 데뷔작 때부터 미국 독립영화계에서 굉장히 주목을 받았던 감독이다. 특히 21세기 초반 미국 독립영화계의 흐름들 가운데 젊은 주인공의 웅얼거리는 대사, 대화의 내용보다는 대화가 만드는 인상 자체를 더 중요시하는 듯한 느낌, 소위 ‘멈블코어 영화’를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었던 사람 중 하나다. 그런데 <컴퓨터 체스>는 오히려 이전 영화들과 약간 달랐던 것 같다.

이용철(영화평론가): 오늘 영화를 보신 분들이 화질 때문에 무슨 이상한 포맷이 아닌가 생각했을 수도 있는데 원래 화질이 이렇다. 부잘스키 감독은 디지털 시대에 등장한 감독이지만 디지털로 영화를 찍은 적이 한 번도 없다. 세 편의 영화를 16mm로 찍었고 <컴퓨터 체스>는 구식 비디오 카메라로 찍었다. ‘이 사람은 매체의 순서대로 영화를 찍으려나?’하는 궁금증도 생긴다. 데뷔작으로 크게 주목을 받으면서 오랜만에 나타난 신성으로 취급받았지만 이후 조금 시들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영화로 어떤 변화를 시도했던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는 이전의 영화들을 반복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런 반복이 더 중요해 보이기도 한다. 리뷰를 쓰면서 이 영화에 대해 잘 모르겠다고 고백해버렸다. 이 영화를 처음 본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하다.

유운성: <컴퓨터 체스>는 요즘 드문 영화이다. 영화사에서 루이스 부뉴엘의 <안달루시아의 개>나 <황금시대>에서부터 면면이 이어져오는 초현실주의에 대한 전통과 흔적들이 있다. 초현실주의하면 역사적으로 아방가르드의 과격한 태도와만 너무 결합되어 이야기되곤 하는데, 영화의 전통에서 얘기하면 꼭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다. 초현실주의의 유산을 신중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오히려 초현실주의를 영화적 내러티브를 재구성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차용하기도 했다. 이야기의 외양을 빌려오지만 이야기가 이야기가 아니게 되는 포인트를 계속 만드는 것이다. <컴퓨터 체스>에도 급작스런 전환의 순간들이 있는데 그것이 관객에게 어떤 충격이나 놀라움을 주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어떤 상징이나 복선, 암시도 아니다.


부잘스키가 스스로 가장 영향을 받고 애착을 갖는 영화로 꼽는 것이 카사베츠의 <사랑의 행로>이다. <컴퓨터 체스>를 보면 부잘스키가 자신과 카사베츠를 엮는 고리로 생각하는 것이 초현실주의임을 알 수 있다. <사랑의 행로>는 카사베츠의 영화 중에서 가장 과격하고, 가장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 동시에 관습적이고 익숙한 요소들을 활용한다. 사용할 수 있는 틀이 있고, 이 틀 안에서 무언가 해내는 것이다. 만약 <컴퓨터 체스>가 특이한 효과들만으로 구성된 영화라면 그냥 이상한 영화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단단하게 무언가 고정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결국 컴퓨터 체스 대회라는 ‘이야기(내러티브)’이다. 일탈로 영화가 무너지는 순간을 막아줄 수 있는 어떤 고정점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용철: 영화의 전개 방식에서 <컴퓨터 체스>는 이전 세 편의 영화들과 그리 다르지 않다. 카사베츠나 로메르, 부잘스키의 특색이라고 한다면 원경을 별로 잡지 않고 상반신 이상의 샷을 주로 잡는다는 것이다. 멀리서 관조하듯이 인물을 보는 감독이 아니다. 그렇다고 인물의 심리나 머릿 속을 들여다보겠다고 작정하고 카메라를 들이미는 것도 아니다. 항상 인물을 졸졸 따라다니는 것이다. 그런데 영화적 사건이라고 할 만한 것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이 사람 영화의 특징이다. 그렇게 인물을 따라다니다가, 우리가 모르게 영화가 슬며시 다른 영역으로 갈 때 영화를 끝내버린다. 어떤 사건이 끝이 나서 끝나는 게 아니라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이야기를 하던 중에 툭 끝나버린다. 그들의 관계에서 어떤 일이 은밀하게 벌어진다. 우리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끝에 가면 어딘가에 가 있게 되고, 그곳이 어디인지를 명확하게 표현 못하는 것. 그 점에서 이번 영화가 이전 영화들보다 좀 더 기묘하다고 생각한다. 영화 안에서 수많은 인물들이 나오는데 이들은 처음에는 단순히 ‘너드’처럼 보였지만 영화가 끝났을 때 각각의 인물들은 어딘가에 도착해 있다. 어떤 인물을 따라가느냐는 관객들마다 다를 것이다. 그 도착 지점을 각자 발견한다면 이 영화의 의미 중 하나를 찾은 것이라 생각한다.



유운성: 이 영화는 미국에서 꽤 흥행한 편이다. 이 영화의 기벽이라고 할 만한 것들, 유머러스한 코드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면 불편해할 수는 있지만 이 영화가 이전의 영화들과 비교해서 특별히 더 이해하기 힘든 영화는 아닌 것 같다. 부잘스키는 이 영화를 80년대에나 사용했을 법한 오래된 비디오카메라로 찍었듯이 스타일도 70~80년대 비디오 미학이나 테크닉을 끌어온다. 그게 유머러스할 때도 있고 의외일 때도 있다. 특별히 새롭고 독창적인 것을 과시하는 영화라기보다는 아방가르드 안에서 활용되었던 미디어와 테크닉을 다시 한 번 활용하는 영화인 것 같다. 분명히 이 영화가 갖고 있는 서구적이고 미국적인 코드들이 있다.

이용철: 디지털이라고 하면 워낙 짧은 역사이다보니, 그 안의 세부적인 역사에 대해선 제작하는 사람 외에는 둔감한 것 같다. 얼마 전 김경묵 감독을 인터뷰하면서 디지털카메라의 변화를 민감하게 인지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웹캠에서 디지털카메라, 그리고 최신 HD카메라로 이어져오는 변천들이 있기 때문에 디지털을 단순히 필름 다음에 온 것으로 쉽게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하더라. <컴퓨터 체스>는 두 가지로 찍었다. 아주 짧은 칼라 부분은 16mm로, 흑백 장면들은 아날로그 비디오 카메라로 찍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다시 디지털로 전환했다.


이 영화에는 초현실적인 면도 있지만 ‘유령’적인 측면에 대해서 더 관심이 간다. 요즘 디지털로 찍은 영화들의 가장 큰 문제는 유령적인 면이 전혀 안 나타난다는 점이다. 극장에서 필름으로 영화를 보면 ‘유령성’을 느낀다. 사실 필름에는 움직이는 물체가 가만히 정지된 채 저장되어 있는데, 그것을 영사기에 걸면서 필름이란 물체를 강제로 돌린다는 이상한 생각을 갖게 된다. 필름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속도와 빛을 통해 등장하는 모습은 마치 피곤한 몸을 이끌고 우리에게 나타나는 유령 같다는 느낌을 준다. 무성 영화 같은 경우 특히 그런 게 강한 것 같다. 그리고 <컴퓨터 체스>도 그런 느낌이 있다. 영화에서 반짝거리고, 노이즈가 끼고, 속도가 빨라지는 등의 특이한 효과들이 마치 우리에게 다시 등장하면서 발생하는 어떤 에러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80년대 초반에 찍힌 어떤 것이 오래 묵혀져 있다가 우리가 이것을 보겠다고 하는 순간 피곤하게 다시 등장하다보니 에러가 생기는 것이다. 더구나 부잘스키 영화의 특징 중 하나는 우리가 아는 배우가 전혀 안 나온다는 점이다. 우리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나오다보니 유령성의 느낌이 더 강하게 배어나온다.

김성욱: 이 영화가 초현실주의적인 전통 안에 있다고 하는 부분은 우리가 이 영화에 대해 내릴 수 있는 가장 심플한 정의라고 생각한다. 조금 다른 방향으로 얘기하면 ‘초현실주의라는 소프트웨어를 장착한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이런 류의 약간 허무한 영화들을 좋아하는 편이다. 영화가 중심을 향해 나아가는데 자잘한 에피소드들이 그 중심에서 계속 이탈해간다. 영화가 중심적인 내러티브에서 벗어나 다른 길로 빠져나가는 것이다. 말하자면 네트워크 내러티브라고 하는 것들이다. 보통 영화라는 것은 중심적인 길을 걸으며 ‘오솔길의 내러티브’들을 제거해 나간다. 그런데 부뉴엘 같은 감독들의 영화는 잠재적인 내러티브들을 계속 증가시킨다. 이 영화도 그렇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이 영화는 <소셜 네트워크>의 굉장히 모호한 버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컴퓨터 체스>의 사람들은 스스로를 개척자, 선구자라고 이야기하면서 가장 미국적인 영웅 신화의 주인공처럼 스스로를 이야기한다. 그런데 실질적으로는 별로 한 건 없고 체스 게임을 하다가 끝나버린다.

유운성: 영화의 형식과 컴퓨터 체스라는 소재, 그리고 호텔이라는 공간 같은 것들이 모두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는 재미가 있다. 제한된 요소들을 갖고 얼마나 변주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면 자크 리베트의 <셀린느와 줄리, 배 타러 가다> 같은 영화가 생각나기도 한다. 영화에서 한 인물이 주인공에게 64개의 스퀘어로 이루어진 체스판을 벗어나 넓은 곳, 즉 삶으로 나가라고 한다. 그런데 64개라고는 하지만 그것이 만들어낼 수 있는 체스의 수는 거의 무한에 가깝다고 주인공이 이야기한다. 삶이건 예술이건, 우리가 가지게 되는 질문이자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이 바로 ‘무한’에 대한 질문인 것 같다. 우리가 살면서 던지는 큰 질문들, 자유, 삶, 사랑, 무한 같은 것은 이 영화에서 재밌게 나오는 단어들이기도 하다. 사실 이런 단어들은 제한된 술어로 설명이 안 된다. 유한한 술어로는 도저히 정의되지 않는 단어들이다.


이 영화의 인물들을 두 그룹으로 나눠볼 수 있다. 이 두 그룹은 하는 일만 다른 것이 아니라 이 그룹을 규정하는 단어의 성격도 매우 다르다. 한 그룹은 부부치료를 하러 온 사람들인데 주로 몸을 움직이거나 대화를 하는 식의 치료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들의 제스처나 대화를 관장하는 건 모두 ’무한‘과 관련된 믿음, 인상, 단어들이다. 다른 한 그룹은 컴퓨터 체스 경기를 하기 위해서 온 프로그래머들인데 이들을 움직이는 건 철저하게 제한된 조건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거다. 그렇다고 이들이 ’무한‘과 무관한 그룹은 아니다. 피터가 이야기하듯이 무한을 상상한다는 것도 결국은 유한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런데 피터를 곤혹스럽게 하는 건 첫 번째 그룹을 규정지을 법한 단어들이 유한의 요소들로 프로그래밍 된 것 안에 나타나는 것이다. 무한, 사랑 이런 것들을 입력하며 의아해하기도 한다.


영화는 이런 식으로 제한된 요소 안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영화 속 인물들이 다루는 소프트웨어의 원칙도 되고, 인물들이 믿는 무언가도 되고, 그것들이 계속 섞이는 것도 보여준다. 이렇게 나누어져 있던 무언가가 조금씩 섞여 들어가는 걸 보여주는 게 큰 부분을 차지하는 영화다.



이용철: 이 영화는 좀 더 근원적인 질문을 하는 것 같다. 부잘스키 감독은 인물이 컴퓨터와 맺는 관계에 대해 궁금해 한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 속 인물은 이상할 정도로 자기와 컴퓨터의 관계가 아니라 컴퓨터와 컴퓨터의 관계에 관심을 가진 인물이다. 그 관계에 자신을 개입을 시키지 않는다. 기계가 기계와 싸우기를 거부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컴퓨터와 마주하고 있어서 질문 하지 않지만 이 영화는 기계와 사람의 관계에서 가장 원초적인 어떤 것을 그린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 컴퓨터는 무적도 아니고 엄청 지혜로운 것도 아니다. 비에 맞아 커퓨터가 망가지는 것처럼 컴퓨터가 사실은 연약한 기계라는 관점을 갖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80년대 초반, 기계와 사람이 관계를 맺던 순간을 기억하는 부분도 존재하는 것 같다.

유운성: 이 영화는 형식적으로 액자화 되어 있는데 주제도 마찬가지다. 컴퓨터와 인간, 기계와 인간의 관계에 대해 말하는데 그것을 직접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관계를 이야기하던 80년대에 대한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들려주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와 비교할 수 있는 영화는 <슈퍼 에이트> 같은 게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다. 인간보다 뛰어난 기계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던 80년대, 그리고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멘탈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컴퓨터에 대한 80년대적 망상이나 공상을 프레이밍해서 보여주는 것 같다.

김성욱: 이런 영화는 고전식으로 하면 ‘그랜드 호텔 영화’라고 부를 수 있다. 호텔 안에서 벌어지는 다수의 사람들이 등장해서 벌어지는 이야기인데, 그랜드 호텔 이야기를 B급 버전으로 만든 영화들에 가깝다. 이 영화의 전체적인 틀은 그랜드 호텔이라는 장소에 체스 게임과  힐링을 위해 모인 사람들이 다 들어있는 세계다. 이 맥락에서 피터가 여자를 만나는 것도 흥미롭다. 한 명의 여자는 떠났고, 또 다른 여자가 호텔 방으로 들어온다. 피터가 고립된 형태로 연구를 계속한다면 그 좁은 ‘공간’에 일과 삶과 사랑이 다 들어오게 될 것이다. 그 비좁은 상태 안에 서로 다른 것들을 집어넣으면서 발생하는 것들이 부조리한 유머를 발생시킨다.

유운성: 마지막 장면에 매춘부가 머리 뚜껑을 여는 장면은 전형적인 80년대적 인상이다. <터미네이터 2>에서 기계인간을 제일 처음 설계했던 과학자가 미래에서 온 완성된 기계인간을 갑자기 봤을 때 느끼는 충격과 비슷한 감각일 것 같다. <컴퓨터 체스>의 인물이 아직 원시적인 형태의 프로그램과 기계들을 만지고 있지만 그가 꿈꾸던 것과 갑자기 마주쳤을 때 받을 법한 충격을 유머러스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80년대는 <백 투 더 퓨처> 같은 영화들이 유행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미래가 빨리 다가오기를 바라는 조급함이 굉장히 컸던 것이다. 그걸 80년대로부터 약 30년이 지난 지금 코믹하게 활용한 장면이다.

김성욱: 정서적으로 보면 코믹하다기 보다는 이 남자가 처할 미래적인 우울함의 느낌이 있다. 바깥이 제한적으로 등장하는 영화인데 그중 영화의 초반부에 남자가 카메라를 들고 엉뚱하게 찍은 샷이 몇 개 있다. 그러자 누군가 태양을 찍지 말고 체스 게임이 벌어지는 실내를 찍으라고 한다. 비가 창문을 통해 들어와 컴퓨터를 적시는 것도 어떻게 보면 바깥이 내부로 들어오는 현상이다. 외부를 제한한 뒤 내부에 모든 것을 집어 넣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컴퓨터 프로그래밍 작업의 일환이라 생각한다. 이 작은 것 안에 얼마나 많은 것을 집어넣을 수 있을지, 얼마나 무한한 부분이 있는지 계속 연구하는 것이다. 컴퓨터와 힐링이 결합하면 집에서 혼자 컴퓨터로 힐링을 하는 것이고, 컴퓨터와 사랑이 결합하면 방 안에서 기계와 마주하는 섹스가 된다. 그래서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우울한 정서를 준다. 또한 감각적인 면에서는 전반적으로 불가능에 대한 감각을 자극한다. 태양을 찍지 말라고 하는 것이나 완전히 일그러진 형태로 끝나는 마지막도 그렇다.


그리고 이런 흑백영화를 접할 때마다 민감하게 느끼는 부분인데, 흑백영화에서 ‘당신의 눈이 파랗다’와 같은 대사들이 나온다. 이 영화에도 두 번 정도 눈의 색깔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흑백을 보고 있기 때문에 못 느끼는 경험이다. 그럼 저 세계 안에서 저 사람들이 색깔을 이야기하는 말들은 관객의 입장에서는 느낄 수 없는 불가능한 감각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영화를 최종적으로 디지털 포맷으로 봤지만 그 안에 있는 필름이나 비디오로 촬영된 것들은 어떻게 감각할 수 있는가란 질문도 든다. 영화의 내용으로 들어가면, 이 프로그래머들은 어쩔 수 없이 골방에 갇혀 계속 프로그래밍만 하다가 결국 인공지능의 컴퓨터와 대화를 나누는 단계로까지 나갈 수 밖에 없다. 그런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굉장히 우울한 느낌이다. 이 감독이 77년생인데 그 세대의 감각이이 이런 ‘골방주의’, 또는 ‘고립주의’인지 궁금하다. 프로그래밍이라는 문법적 체계를 만드는 세계 안에 놓여 있는 사람들에 대한 독특한 자기 정체성을 굉장히 많이 느낀 것 같다. 예를 들어 우리들은 프로그래밍 된 게 많이 없다고 느낀 세대이다. 문법적 체계도 우습고 모든 규칙과 체계가 우습고 시원찮게 느껴졌다면, 지금은 프로그래밍된 게 너무 많아서 거기에 따라가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예외적인 일들의 발생이나 다른 식으로 빠져나갈 기회의 보장도 결과적으로는 하나의 프로그램 안에 들어가버리는, 결국 바깥으로 나갈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린다. 다들 짐을 싸고 나갈 때도 이상하게 피터는 호텔에 남아서 그 안으로 여자를 끌고 들어온다. 그런 느낌이 기억에 남는다.


정리ㅣ 장지혜 자원활동가

사진ㅣ 곽혜원 자원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