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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전/샹탈 아커만 회고전

[샹탈 아커만 회고전 - 시네토크] <잔느 딜망> - 조혜영 서울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

[샹탈 아커만 회고전 - 시네토크]


“제스처와 복화술의 미학”

샹탈 아커만의 <잔느 딜망> 

조혜영 서울국제영화영화 프로그래머 시네토크





오늘 시네토크의 제목은 ‘제스처와 복화술의 미학’이다. <잔느 딜망>을 중심으로 샹탈 아커만이 가진 씨네페미니스트 작가로서의 모습에 대한 이야기와 여성 작가성, 소수자 작가성에 대한 얘기를 해보고자 한다. 많은 사람들이 아커만의 영화를 페미니즘과 연결시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는 말을 한다. 왜냐하면 아커만이 인터뷰에서 자신의 영화를 여성영화제나 게이 필름페스티벌에서 틀지 말라는 언급을 자주 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인터뷰 때문에 샹탈 아커만이 레즈비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부인한다거나,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라는 해석도 나왔다. 하지만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샹탈 아커만의 경우 소수자, 여성으로서의 작가성이 왜 이렇게 아이러니한 방식으로 밖에 나타날 수 없는지에 대해서이다.


샹탈 아커만은 이름 앞에 많은 수사가 붙는 감독이다. 우선 아커만은 여성이며 유대계다.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은 나치를 피해 폴란드로 이주한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이기도 하다. 이 점은 그녀의 마지막 작품인 <노 홈 무비>에 잘 드러나는 부분인데, 아커만은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2세라는 특별한 트라우마를 어린 시절부터 겪는다. 또한 그녀는 레즈비언의 정체성을 갖고 있기도 하다.


아커만은 벨기에의 영화학교에 다니다가 18세에 학교를 자퇴하고 영화를 혼자 만들기 시작했다. 다이아몬드 거래소에서 일하거나 극장 티켓을 파는 일을 통해 제작비를 마련해고, 1968년에 첫 단편을 만들었다. 그 작품이 바로 <내 마을을 날려버려>다. 그리고 오늘 본 <잔느 딜망>은 약 13분 길이의 <내 마을을 날려버려>를 3시간 21분으로 늘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영화의 주제는 물론이고, 영화 안에서 건축적 구조를 다루는 방식, 그리고 실내라는 공간에 대한 작가의 입장이 굉장히 비슷하게 표현된다. <잔느 딜망>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은 부엌이라고 생각하는데, <내 마을을 날려버려>에서도 역시 부엌에서 구두 닦기, 스파게티를 만들기, 청소 하기 등의 가사 노동을 보여준다. 그러다가 갑자기 가스에 불을 켜고 폭발하는 것이 이 영화의 엔딩이다.

즉, 제목은 ‘내 마을을 날려버려’인데 정작 영화에서 날려버리는 것은 부엌이다. 부엌은 여성을 억압하는 구조이자 건축물이다. 다시 말해 여성을 계속해서 가사 노동에 묶어두는 공간이다. 하지만 <내 마을을 날려버려>는 그 공간 안의 여성을 우울하게만 다루지 않는다. 아커만 특유의 슬랩스틱 코미디 연기로 즐거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부엌은 파괴해야 할 공간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아주 사랑스러운 행동들이 있는 곳으로 그려진다.


마찬가지로 <잔느 딜망>에서 잔느가 행하는 가사 노동들은 관객을 매혹하는 측면이 있다. 요리하는 모습, 커피를 따르는 모습이 굉장히 아름답게 느껴지고, 일하는 여성의 손길에 대한 애정과 사랑스러움이 보인다. 여성의 가사 노동이 잘못됐다고만 말하는 것은 이데올로기 비판을 위해 여성의 주체성을 버리는 것과 같다. 가사 노동은 여성을 억압하는 기제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여성 주체가 살아가는 삶 안에 포함된 것이기도 하다. 예컨대 어머니가 가사 노동 안에 있는 것이 싫다고 해서 어머니의 삶을 부인하거나 경멸할 수는 없다.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주체가 실제로 살아가고 있는 삶을 경멸하거고 낙인찍지 않는 것. <잔느 딜망>에서는 여성의 삶을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는지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테레사 드 로레티스를 비롯한 1970년대 씨네페미니스트 영화학자들이 <잔느 딜망>을 극찬했던 건 내용적 측면 뿐만 아니라 형식적이고 미학적인 측면에서도 페미니스트적인 주제를 전달할 수 있는 영화가 나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잔느 딜망>의 미학적인 특징 중 하나로 ‘리얼타임’을 들 수 있다. 인물의 행위를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장면들이 이에 해당한다. 영화에서 리얼타임 연출은 주로 잔느가 설거지나 요리 등의 가사 노동을 하는 순간에 등장한다. 한 쇼트는 대개 하나의 공간을 보여주는데, 가령 부엌에서 한 쇼트를 보여주다가 불을 끄고 나가면 숏이 끝나는 식으로 영화의 대부분이 진행된다. 공간을 열고 닫는 연극적 요소가 분명하게 보인다. 이를 통해 실내 건축 안에서 여성이 굉장히 많은 노동을 한다는 것, 또 그 노동들이 마치 컨베이어 벨트처럼 조직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잔느는 부엌에서는 가사노동을, 거실에서는 아들에게 각종 서비스를 하고, 침실에서는 성 노동을 한다.


아커만이 인터뷰에서 이야기한 대로, 영화 전체가 온전한 리얼타임은 아니다. 3일의 이야기를 각각 한 시간 정도 보여준다. 뒤로 갈수록 하루가 조금씩 길어지는데, 그러면서 매번 잔느가 규칙적으로 해 온 일과가 점차 틀어진다. 이때 무슨 사건이 일어날 것 같지만 일어나지 않으면서 서스펜스가 발생한다. 그리고 이 서스펜스 요소 중 하나가 리얼타임이 아닌 장면에서 나온다. 이 영화에서 리얼타임으로 보여주지 않는 장면은 무언가 억압되어 있지만 말로 옮기기 힘든 순간, 혹은 말하기 힘들기 때문에 억압되는 순간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잔느가 처음 남자 손님을 받는 장면을 들 수 있다. 침실 안에서 일어나는 성행위를 직접 보여주는 것은 마지막의 살인 장면이 처음이다. 그전까지 매춘 장면은 잔느가 남자 손님을 받아 침실로 들어가는 모습에서 끝났다. 그리고 고정된 카메라가 계속 복도를 비추다가 순간 빛이 바뀌며 잔느와 남자 손님이 방에서 나오는 식으로 보여주었다. 잔느가 성노동을 하는 순간 시간의 생략이 일어나는 것이다.


여기서 이미지의 경제학을 생각해보자. 어떤 여성의 이미지가 가장 많은 돈을 벌까. 그건 바로 여성이 성적 대상으로 그려질 때다. 많은 상업 영화에 가해지는 비판 역시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한다는 것이엇다. 남성의 일방적인 시선으로 여성을 바라보고, 이를 통해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논의를 많이 해왔었다. 그리고 <잔느 딜망>은 경제적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즉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보는 장면을 의도적으로 삭제하고 있다. 대신 너무 일상적이거나 우소해서 우리가 잘라내기 쉬운 장면들, 가령 성노동 후의 목욕 장면이나 욕조를 청소하는 장면을 길게 보여준다. 영화 이미지의 경제학 측면에서 쓸데없다고 생각되는 장면을 리얼타임으로 보여주고, 그 반대의 장면들은 과감히 생략하고 있는 것이다.


아커만은 <잔느 딜망>을 페미니즘적 인식을 가지고 만들었다고 이야기했다. 아커만은 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여성 촬영감독인 바베트 망골트와 함께 했고, 편집이나 제작 역시 여성 스탭들과 함께 했다. 또한 <잔느 딜망>에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잔느 역을 맡은 델핀 세리그다. 델핀 세리그는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인디아 송>이나 알랭 레네, 프랑수아 트뤼포의 영화에 등장하기도 했다. 또 스스로 연출을 하기도 했던 감독이기도 하다. 당시 델핀 세리그는 한 명의 평범한 배우라기보다는 누보로망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녀는 아주 지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고, 『제2의 성』을 쓴 시몬 드 보부아르의 추종자이기도 했다. 샹탈 아커만이 당시 <나, 너, 그, 그녀>로 주목을 받기는 했지만, 그런 델핀 세리그와 작업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델핀 세리그가 스물 다섯살의 신인 감독인 샹탈 아커만과 함께 작업한 것은 그녀 스스로 아커만의 영화가 가진 주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델핀 셀리그가 영화의 주제를 충분히 이해하고, 샹탈 아커만과 함께 많은 토론을 했기 때문에 이 작품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잔느 딜망>은 한 마디로 체험의 영화, 몸의 감각의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끊임없이 반복하는 인물의 행위를 느끼게 만드는 영화다. 영화를 보다 보면 가사 노동의 반복성, 그리고 그에 대해 여성이 가진 강박을 느낄 수 있다. 잔느가 매춘과 부르주아 여성으로의 정체성, 그리고 아들을 돌보는 삶을 동시에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각각의 공간 안에 규칙적으로 역할을 가두어 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복성이 점점 깨지고 어느 날 갑자기 시간이 남는다. 규칙성이 틀어지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모습을 보인다. 어떤 파국의 균열이 조금씩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아들의 대사에서 남성의 성기를 칼에 비유하는 장면이 있는데, 기호학적으로 해석해보면 영화의 엔딩에서 잔느가 남자를 가위로 찔러 죽이는 것과 연결할 수 있다. 잔느의 살인 행위는 여성에게도, 비록 억압되어 휴면 중이지만, 분명한 폭력성이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잔느의 아들은 여성은 사랑이 없으면 오르가즘을 느끼지 못한다고 말하지만 잔느는 사랑 없이도 오르가즘을 느끼다. 잔느가 오르가즘을 느끼는 후반부 장면은 가부장적 자본의 통제와 구속에서 벗어나는 순간이다.

영화가 개봉했던 초기에는 많은 비평들이 잔느가 오르가즘을 느끼는 장면을 마치 없는 것처럼 대했다.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다. 잔느는 가부장제의 피해자인데 어떻게 오르가즘을 느끼는가, 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잔느가 오르가즘을 느끼는 순간은 남자와의 관계가 아니라 잔느 ‘자기만의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성적 쾌감마저 남자와 공유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도리어 자기만의 것이 필요하다는 걸 자각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마지막 장면은 굉장히 긴 롱테이크로 이어진다. 잔느의 옷매무새가 흐트러져 있고, 빛이 통제되지 않은 채 잔느의 얼굴 위로 흩어지고 있다. 이 빛은 잔느가 중산층이 되고자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유럽에서 상가 건물 위에 있는 집은 노동자 계급의 집이다. 잔느는 실내에서 중산층 가정의 모습을 유지하려 하지만 바깥의 빛이 끊임없이 실내를 침입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잔느는 빛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대로 느낀다. 잔느는 비로소 <내 마을을 날려버려>의 폭파 이후처럼 ‘이후의 순간’, ‘나만의 시간’을 가진다.

아커만은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리얼타임에 관심이 없다. 지속의 시간을 조작한 극적 시간이나 관습적인 영화 시간에도 관심이 없다. 나는 ‘나의 시간’에 관심이 있다. 책을 읽을 때 사람들은 자신만의 시간 속에 있다. 그러나 영화는 그렇지 않다. 영화를 볼 때는 감독의 시간에 지배당한다. 그러나 시간은 모든 이들에게 다르다. 나의 5분은 당신의 5분과 같지 않다. 영화를 보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고 말하는 건 내게 칭찬이 아니다. 내 영화에서 당신은 시간이 흐르는 것을 볼 수 있다. 당신은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바로 그것이 내 영화를 보면서 관객들이 저항감을 느끼는 이유다.” 영화의 마지막 긴 롱테이크는 타인의 시간 속에서만 살면서 자신을 통제하려 했던 잔느가 마침내 자기만의 시간 안에서 시간의 흐름을 느끼는 장면이라고 볼 수 있다.


어찌보면 이 영화는 맑시스트들이 봐야 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야말로 노동 영화의 정수라고 느껴진다. 흔히 지가 베르토프의 <카메라를 든 사나이>에 대해서 맑스의 『독일 이데올로기』를 영화로 옮긴 작품이라고 이야기 한다. 영화에 출연한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이미지를 영화에게 주었음에도 영화가 어떻게 제작되는지 모른다. 이것이 맑스가 이야기한 소외다. 그래서 <카메라를 든 사나이>는 제작의 과정을 영화 ‘안’에서 보여주려 한다. 가령 필름이 어떻게 편집되고 어떻게 촬영되는지 보여준다. 베르토프는 혁명을 위해서는 우리 눈부터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며 영화의 눈, 즉 ‘키노-아이’를 주장한다. 그리고 샹탈 아커만의 경우, 맑스가 이야기했던 생산과 노동 문제에서 가장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을 다룬다. 임금마저 받지 못하는 노동, 그리고 감정과 노동이 구분되지 않는 노동의 어떤 측면을 보여주기 때문에  <잔느 딜망>은 지가 베르토프의 ‘키노-아이’ 못지않게 맑시즘적 논의가 가능한 영화다. 노동, 감정, 그리고 언어적 표현 사이에 있는 몸의 움직임을 제스처라고 한다면, <잔느 딜망>에서 나타나는 아커만의 작업방식을 ‘키노-제스처’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정리 ㅣ황선경 자원활동가

사진 ㅣ송재상 자원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