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만 폴란스키의 <유령 작가>(2010)에서 주인공은 정말 기이한 인물입니다. 그는 이름도 없고, 그저 ‘유령’이라 불릴 뿐입니다. 그가 세상에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지만 (그래서 존재가 미미한 그가 세상에 드러나는 유일한 방법은 최종적으로 그가 죽었을 때입니다), 실로 그가 ‘유령’인 것은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다른 이의 대필 작가로 나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이미 죽어버린 선임자의 뒤를 계승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주인공은 그래서 유명인의 대필 작가이자 대필 작가의 대역, 즉 이중적인 의미의 ‘유령’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인물은 알프레드 히치콕의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1959)에서 주인공처럼 일종의 텅 빈 존재와도 같습니다. 그는 첩보원으로 오인 받으면서 부재하는 이의 일종의 유령 대역을 했던 것입니다. 혹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패신저>(1975)를 떠올려볼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정체성의 혼란에 빠져있고, 다른 인물을 대신합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죽은자, 혹은 부재하는 이의 유령이 되는 것은 최종적으로는 사라지는 것, 즉 인물의 소멸로 향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역설적이지만 유령 또한 죽기도 합니다.

나치스가 독일에서 정권을 장악했던 1933년에 유태계 폴란드인으로 태어난 로만 폴란스키는 어린 시절 강제 수용소를 경험했고, 그 스스로 답답해했던 조국을 떠나 세계를 떠돌았던 감독입니다. 그의 유년시절을 두고 ‘폭풍의 고아’라 말했던 평자도 있는데, 그리 이상하지 않은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폴란스키는 언젠가 자신의 인생 대부분을 할애해 깨닫게 된 것이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분간할 수 없으며, 그 경계성이 애매하다는 사실이라 말한 바 있습니다. 그러한 인식으로 그는 상심, 갈등, 불행, 실망을 경험했지만 동시에 예술가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유년기의 누구나가 그러하듯 판타지의 세계를 꿈꾸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의 실현을 단념했던 것과 달리 아직 생기가 없었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세상을 떠돌았습니다. 꿈과 현실의 문제는 언제나 그의 작품 전체를 관철하는 테마였는데, 종종 그의 작품에서 눈앞의 현실은 도리어 비현실적이고 부조리하게 보입니다. 이번 ‘로만 폴란스키 초기 걸작선’에서 상영하는 세 편의 작품은 이런 특징을 보여줍니다.

인물들 대부분은 자신의 정체성에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됩니다. 외부적 위협에 노출되면서 그들은 주위의 압력에 무너져버리고 망상의 세계에 쉽게 빠져듭니다. 난입자 때문에 주인공의 정신이 불안에 사로잡히는 과정을 날카롭게 그린 <물속의 칼>(1962), 망상과 광기의 세계에 빠져든 인물의 극단적인 시각을 담아낸 <혐오>(1965), 그리고 ‘막다른 골목’에 처한 인물의 불안과 동요를 가장 훌륭하게 표현한 <궁지>(1966)가 그러합니다. 폴란스키는 영화가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고 동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작가입니다. 그가 도발을 즐겼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사회적 관습, 논리적 사고를 흔들어버리는 불안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을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불안은 무언가 우리 안에서 바뀌어져야 할 것을 성찰하게 합니다.

이탈리아 호러영화의 선구자인 마리오 바바의 작품도 그런 불안의 영화라 할 수 있습니다. 마틴 스콜세지가 그를 찬양하며 했던 말처럼 마리오 바바의 영화는 종종 형언할 수 없는 꿈의 상태로 관객들을 빠져들게 합니다. 마치 거친 파도위에서 서핑을 하는 것 같은 상태를 말합니다. 꿈과 현실의 경계를 넘어가며 혼란을 자아내는 불안의 영화들. 그런데 이는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영화의 진정한 매혹이기도 합니다.

글 / 김성욱(영화평론가,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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