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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 떼> 상영 후 후지이 진시 특강

[소마이 신지 전작 회고전]



“소마이 신지는 끝을 의식하게 하는 동시에 새로운 걸 고민하게 만든다”

- <물고기 떼> 상영 후 후지이 진시 특강





김보년(프로그래머) 지난 “나루세 미키오 회고전” 때도 서울아트시네마를 찾았던 후지이 진시 평론가를 이번에 다시 초대했다. 후지이 진시 평론가는 최근 일본에서 열린 소마이 신지 회고전을 직접 기획하기도 했고 최근 『되살아나는 소마이 신지』란 책을 공동 편집하기도 했다.

후지이 진시(영화평론가) 소마이 신지를 80년대 일본 뉴웨이브의 대표 감독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분들이라면 이번 <물고기 떼>를 보고 그 고전적인 느낌에 당황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작품을 포함해 <이사>나 <아, 봄> 같은 작품은 소마이 신지 감독의 작품 중 영화적 기법이 비교적 억제된 작품이다. 어디선가 ‘소마이 신지의 롱테이크’에 대해 많이 들은 분이라면 매우 얌전한 작품이라는 인상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 소마이 신지의 양의성

물론 이 영화에도 롱테이크나 대담한 영화적 기법이 많이 들어있기는 하지만 중후한 드라마가 좀 더 강조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점이 눈에 안 띄었을지도 모르겠다. 실은 바로 이런 점이 소마이 신지가 일본 영화사에서 점하고 있는 애매함, 양의성, 혹은 모순이라 할 수 있다. 소마이 신지는 ‘마크’란 어휘를 즐겨 사용했다. 여기서 마크는 스튜디오의 로고를 의미한다. 즉 그는 이 작품이 어느 촬영소의 작품인지를 많이 의식했다. 소마이 신지는 영화 촬영소가 쇠락한 다음 데뷔한 감독이지만 오히려 선배들보다 촬영소의 존재를 더 의식하고 있었다.

이번 <물고기 떼>에도 쇼치쿠의 후지산 로고가 먼저 등장한다. 쇼치쿠는 오즈 야스지로가 평생 소속되어 있었던, 일본에서 가장 전통적인 역사를 가진 영화사다. 그래서 소마이 신지 역시 쇼치쿠의 ‘품격’에 맞춰 이 영화를 제작했다. <물고기 떼>는 소설을 원작으로 한 문예영화이고, 쇼치쿠가 강조하는 중후한 성격을 따르려 했다. 이는 현대 감독, 이를테면 타란티노가 옛날 작품을 오마주하며 흉내내는 것 같은 패스티시와는 다른 것이다. 촬영소 전통이 끝난 시대에 촬영소를 재구축하려고 도전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물고기 떼>는 소마이 신지의 네 번째 작품인데, 지금까지 그가 찍은 세 편의 영화는 모두 십 대 청소년이 나오는 청춘영화였다. 이 영화를 통해 소마이 신지는 일본영화의 전통적인 측면에 접근을 시도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이 영화는 다른 감독들도 영화화를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왜냐하면 실제 참치를 잡아야 했기 때문이다. 소마이 신지는 포기하지 않고 진짜 참치에 집착했고 촬영 일수를 초과했지만 결국 성공했다. 그리고 이 영화는 대부분의 일본인들도 제대로 알아듣기 어려운 강한 도호쿠 방언을 쓰고 있다. 일본영화에서 어떤 지역의 특색을 재현하는 건 문예영화의 전통이지만, 이 정도로 지독한 방언을 쓰는 건 일종의 도발로 봐야 한다.

다른 나라의 영화사와 비교했을 때 일본 영화사의 특징 중 하나는 촬영소 영화(스튜디오 영화)에서 현대 영화로의 전환이 촬영소의 주도에 의한 것이었고, 그것도 촬영소 내부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전환이 굉장히 긴 시간을 필요로 했다. 오시마 나기사의 주도로 이루어진 ‘쇼치쿠 누벨바그’가 1960년대에 일어났는데, 이 역시 쇼치쿠 영화사 내부에서 일어난 혁신이었다. 이후 포스트 스튜디오 시대로 이행하며 소마이 신지가 등장할 때까지 약 20년이 걸렸다. 다시 말해 촬영소 시대가 끝나고 인디펜던트 영화로 전환됐다고 이해하기보다는 약 20년간 촬영소와 인디펜던트라는 양 극단이 긴장하며 공존했다고 말하는 게 더 적절하다. 소마이 신지 역시 70년대부터 닛카츠 같은 촬영소에서 일을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60~70년대의 양극화를 의식하며 활동한 감독으로 봐야 한다. 구로사와 기요시나 모리타 요시미츠 같은 감독들은 학생 때부터 8mm 자주영화를 찍으며 이름을 알렸다. 하지만 소마이 신지는 그들보다 나이도 많았고 데뷔할 때까지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런 시차 때문에 상대적으로 소마이 신지가 덜 알려진 것이라 생각한다. 현대적 작가로 보기에는 촬영소의 그림자를 갖고 있고, 촬영소 소속의 감독이라 보기에는 너무 현대적이다. 이런 모순으로 인해 소마이 신지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 소마이 신지의 영향력

<물고기 떼>로 돌아가면, 소마이 신지는 쇼치쿠에서 이 영화를 만들었고, 평생 이런저런 촬영소를 거치면서 13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그래서 그가 만든 영화들의 저작권은 여기저기 흩어져있고, DVD 박스 세트를 만드는 것도 어렵다. 그렇다고 소마이 신지가 생전에 비평적으로 저평가를 받은 건 아니다. <태풍 클럽>은 제1회 도쿄국제영화제에서 상을 받았고 당시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절찬을 받았다. <이사>는 칸영화제에서 상영됐고, <아, 봄>은 베를린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개별 작품이 높은 평가를 얻은 것이지, 그를 일관된 스타일을 가진 ‘작가’로 평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기인(奇人) 취급을 받은 감독이었다.

1980년대 일본, 특히 도쿄는 세계의 다양한 영화를 상영하는 영화 도시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80년대 도쿄를 중심으로 흥미로운 기획이 이어졌고, 관객의 눈도 함께 높아지며 이른바 ‘시네필’이라 불리우는 관객층이 등장했다. 그리고 이들이 열광적으로 반응한 영화가 바로 소마이 신지의 작품들이었다. 이때 지적하고 싶은 건 소마이 신지는 비교적 덜 유명한 배우들, 특히 아이돌을 캐스팅해 리허설을 거듭하며 한 명의 배우로 성장시키는 감독이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소마이 신지의 영화를 보는 건 한 사람의 소녀가 영화배우로 성장하는 것을 목도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네필들도 자연스럽게 영화를 보며 자신이 성장하는 감각을 맛보게 된다. 당시 시네필, 특히 소마이 신지의 팬들은 자신의 청춘과 결부해 소마이 신지를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그중 자라서 영화감독이 된 사람들에게 소마이 신지가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

마틴 스콜세지의 일화를 예로 들고 싶다. 마틴 스콜세지는 오손 웰즈의 <시민 케인>을 보고 비로소 감독이란 존재를 의식하고 감독을 지향하게 됐다고 한다. 알다시피 <시민 케인>은 누가 보더라도 확실히 알 수 있는 ‘과잉된’ 스타일을 가진 영화다. 소마이 신지의 영화도 그런 굉장히 과잉된 스타일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소마이 신지의 영화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하는 관객들의 욕망을 부추기는 면이 있었다. 90년대 일본 감독들의 작업을 보면 분명 소마이 신지를 의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유레카>(2000)를 만든 아오야마 신지는 다무라 마사키라는 촬영감독하고만 작업을 했었다. 애석하게도 다무라 마사키 씨는 최근 세상을 떠났는데, 그는 소마이 신지의 <숀벤 라이더>를 촬영한 감독이다. 나는 아오야마 신지가 <숀벤 라이더>의 다무라 마사키와 함께 작업하며 소마이 신지와는 다른 방법으로 롱테이크의 가능성을 파고들었다고 생각한다. 구로사와 기요시도 마찬가지다. 그는 <세일러복과 기관총>에서 조감독을 맡기도 했었는데, 소마이의 스타일을 동경하면서도 그 동경을 감추고 있는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요시는 현명하게도 소마이 신지와 자신의 시대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이 소마이 신지와 같은 행보를 걸으면 앞으로 영화를 찍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소마이 신지를 반면교사 삼아 굉장히 ‘합리적인’ 방식으로 영화를 찍고 있다.

소마이 신지의 영향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분야는 애니메이션이다. 특히 고교 시절을 그린 학원물들이 그렇다. <태풍 클럽>의 영향을 많이 찾을 수 있다. 특히 호소다 마모루는 (최근은 달라진 것 같지만) 한때 굉장히 소마이 신지에 경도되었던 것 같다. 호소다 마모루는 <이사>의 각본을 쓴 오쿠데라 사토코와 함께 작업을 하기도 했었다. 도쿄에서 소마이 신지 회고전을 했을 때 실제로 호소다 마모루를 초대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소마이 신지 감독을 좋아한다고 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한편 소마이 신지는 단순히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려고 하는 감독이 아니었다. 그는 이 전통을 보존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런 의미에서 이 전통을 어떻게 계승할지 고민한 감독이었다. 그런 소마이 신지와 특히 깊은 관계를 맺었던 게 닛카츠였다. 닛카츠는 알다시피 일본에서 굉장히 유서 깊은 촬영소다. 하지만 경영 악화로 70년대 이후에는 로망포르노로 잘 알려진 영화를 만들며 살아남을 수 있었다. 소마이 신지가 닛카츠에서 조감독으로 있을 때 만들었던 영화도 역시 로망포르노다. 로망포르노는 그 제작 특성상 젊은 감독들의 과격한 영화적 실험의 무대가 되기도 했었다. 이때 소위 ‘소마이 팀’이라고 불리는 스태프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닛카츠의 언저리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었다. 이후 여기서 성장한 스태프들은 소마이 신지와 많은 작업을 함께했다. 그중 특히 중요한 인물이 프로듀서인 이지치 게이다. 그는 데뷔작인 <꿈꾸는 열다섯> 외에도 소마이 신지의 거의 전 작품에 어떤 형태로든 참여를 한다. 소마이 신지처럼 시간이나 돈을 태연스럽게 오버하는 감독은 보통 프로듀서에게 미움을 받기 쉽다. 하지만 감독 지망생이었던 이지치 게이는 소마이 신지의 재능을 알아보았고, 결국 <숀벤 라이더> 같은 어처구니 없고 과격한 영화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 소마이 신지의 현장

또 하나 얘기하고 싶은 것은 촬영감독에 대해서다. 방금 ‘소마이 팀’이라고 얘기했지만 이상하게도 소마이 신지는 거의 항상 다른 촬영감독들과 작업을 했다. 이게 소마이 신지의 개성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다시 말해 항상 과격한 스타일의 영화를 찍지만 특정 촬영감독을 고집하지는 않았다. 이 말이 소마이 신지가 촬영에 무관심했다는 말은 아니다. 일본영화 현장에는 촬영과 조명이 뚜렷하게 나뉘어 있다. 소마이 신지의 현장에서는 촬영감독은 항상 바뀌지만 구마가이 히데오라는 조명감독은 바뀌지 않았다. 이런 일화가 있다. 소마이 신지는 끝없이 계속되는 리허설로 유명하다. 그래서 배우와 리허설을 할 때 스태프들이 바로 움직이지 않다가, 슬슬 분위기가 만들어지면 구마가이 씨가 세팅을 시작한다. 그러면 다른 스태프들도 비로소 촬영 준비를 시작했다고 한다. 구마가이는 굉장히 개성적인 조명감독이다. 그저 피사체를 아름답게 볼 뿐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빛으로 연출에 관여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물고기 떼>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배우의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바다 쪽에서 빛이 계속 흔들렸던 걸 기억할 것이다. 이 빛이 구마가이 씨가 의식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그는 이 빛을 ‘반짝반짝’이라고 표현했었는데, 인물의 심정을 웅변적으로 전환한 훌륭한 연출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구마가이의 조명 역시 ‘왕도’가 아니라 이단적인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마이 신지는 촬영소에서 단련된 베테랑 스태프들과 일하면서도 촬영소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지 않았다. 그는 촬영소에서는 제대로 꽃피울 수 없었던 재능을 본격적으로 활용하였다. 다시 말해 이단적 스태프들을 해방시킨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물고기 떼>와 같은 비교적 ‘얌전한’ 영화들을 다시 사고할 필요가 있다. 그는 물론 과격한 스타일의 영화를 만들었지만 꼭 그런 작업만 한 감독은 아니었고, 촬영소의 전통을 어떻게 계승할지 적극적으로 고민한 감독이었다.


- 한 시대의 끝에서 다음 시대를 고민하기

소마이 신지는 2001년,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는 영화의 디지털화를 제대로 경험하지 않은 채 필름으로 충실하게 영화를 만들었다. 물론 많은 분들이 소마이 신지의 이른 죽음을 애석하게 생각하지만, 반대로 소마이 신지가 ‘좋은 시절’에 활동했다고 말하는 지인들도 있다. 만약 조금 더 오래 활동했다면 그의 특징이자 장기였던 현장에서 끈질기게 버티는 리허설을 할 수 없었을 것이고, 어처구니 없는 롱테이크를 시도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아마 타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인데, 그렇다고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을 두고 이런 가정을 하는 것도 소용 없을 것이다. 대신 지금 소마이 신지의 영화를 이렇게 보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고민하는 게 더 바람직할 것 같다.

어쩌면 1980~90년대 개봉 당시 영화를 보는 것보다 2018년에 소마이 신지의 영화를 보는 게 더 큰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촬영소의 시대가 끝난 후 영화를 시작한 감독이다. 즉 무언가가 끝난 후 새롭게 시작했다는 점을 생각해 볼 만하다. 실제로 소마이 신지는 예전에 했던 강연에서 “저는 20세기와 함께 영화는 이미 멸망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자신이 이전에 좋아했고 믿었던 영화라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걸 스스로 의식했던 것이다. 이런 점을 보면 소마이 신지는 영화를 매우 비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본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마이 신지는 굉장히 풍요로운 작품을 꾸준하게 세상에 내놓았다. ‘필름’은 과거의 유물이 되었고, ‘영화’의 정의도 바뀌고 있다. 이런 시기에 소마이 신지를 본다는 건 ‘끝’을 의식하고 새로운 무언가를 찾는 계기를 제공해 주는 것 같다. 지금 여기 모인 관객들도 ‘더 이상 이런 건 안 되겠구나.’라고 인식하는 동시에 또 다른 새로운 걸 탄생시키길 기대한다.

김보년(프로그래머) 제작자, 혹은 기획자로서의 소마이 신지에 대한 이야기도 듣고 싶다. 소마이 신지의 이력을 검색하면 그가 만들었던 제작사인 ‘디렉터스 컴퍼니’가 나온다. 어떤 면에서는 메이저와 마이너를 넘나드는 주도면밀한 전략가처럼 보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낭만적일 정도로 무모했던 제작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후지이 진시 80년대 중반 소마이 신지가 참여한 ‘디렉터스 컴퍼니’가 세워졌다. 자신이 찍고 싶은 작품을 찍기 위해 영화감독들이 모여 만든 회사였다. 구로사와 기요시도 참여했었다. 그런데 내가 전해 듣기로는 소마이 신지는 별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웃음). 심지어 디렉터스 컴퍼니가 망하는 데 소마이 신지의 책임도 일정 부분 있다고 볼 수 있다. 경영의 재능은 전혀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번에 상영하기도 하는 <하늘이 이렇게 푸를 리 없다>를 개봉 당시 본 사람들은 다들 놀랐다고 한다. 소마이 신지가 제대로 제작을 해냈기 때문에 ‘하면 되는데 왜 안 하냐?’라고 화를 냈다고 하더라(웃음). 참고로 소마이 신지는 영화를 찍지 못하던 시기 TV 광고도 많이 찍었다. <하늘이 이렇게 푸를 리 없다>를 봐도 그렇고, 그는 자신과 다른 재능을 가진 사람들을 높게 평가했던 것 같다.




관객 1 소마이 신지의 영화에는 강한 비와 바람이 많다. 촬영도 어려웠을 텐데 왜 이렇게 비를 사랑했는지 궁금하다.

후지이 진시 실제로 기후나 날씨의 변화를 연출에 활용하는 건 촬영소 시대에는 자주 있었던 일이다. 당시는 그런 연출을 모두 스튜디오 내부에서 했었다. 하지만 소마이 신지는 야외 로케이션에서 날씨의 변화를 직접 보여준다. 질문하신 것처럼 영화에서 비 장면을 촬영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태풍 클럽>을 찍을 때는 근처의 수도가 메말랐다는 일화까지 있다.

왜 이렇게 고생을 하느냐고 물을 수 있을 텐데, 나는 소마이 신지가 일부러 이런 고생을 함으로써 뭔가 나올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대단한 고생을 모두 함께 거치면서 새로운 것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실제로 소마이 신지는 스태프들에게 부조리한 걸 종종 강요했었다. <물고기 떼>를 만들 때는 참치의 생태를 연구해 오라고 지시했었다. 그런 점들이 실제로 화면상에 반영됐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만큼 모든 스태프들이 엄청난 노력을 쏟아 부음으로써 새로운 무언가가 만들어질 거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강한 바람이 불거나 지독한 비가 내리는 건 단지 인물의 심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게 아니라 촬영현장 자체의 열기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 같다. <물고기 떼>에서도 여배우가 폭우 속을 필사적으로 뛰어간다. 이 장면에서 만들어지는 스토리를 초월하는 무언가를 여러분들도 느꼈을 것이다.

관객 2 소마이 신지의 영화를 보면 롱테이크를 자주 만날 수 있다. 내가 알기로는 미조구치 겐지 감독이 도드라지는 롱테이크를 자주 썼었다. 영화사적 의미에서 소마이 신지의 롱테이크를 어떻게 볼 수 있는지 궁금하다.

후지이 진시 미조구치 겐지와 소마이 신지의 롱테이크를 비교하는 건 굉장히 중요한 질문인 것 같다. 하지만 소마이 신지는 롱테이크가 아니면 절대 안 된다는 식으로 롱테이크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래서 소마이 신지의 후기 작품을 보면 점점 롱테이크가 줄어든다. 그래서 ‘소마이 신지 = 롱테이크’로 생각했던 관객들은 그의 후기작을 보며 실망할 수도 있다.

80년대 작품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무모할 정도의 얼토당토 않은 소마이 신지의 롱테이크는 앞서 말했던 비 장면과 비슷한 맥락에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현장의 열기를 이끌어내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미조구치 겐지의 롱테이크는 모든 게 세심하게 컨트롤된 연출이다. 그것과 비교하자면 소마이 신지의 롱테이크는 잡스럽다고 표현해도 될 것이다. 그만큼 소마이 신지의 무턱대고 찍는 롱테이크는 촬영 현장의 박력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어쩌면 소마이 신지는 자신도 컨트롤할 수 없는 순간을 이끌어내기 위해 롱테이크를 구사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 의미에서 소마이 신지는 독재자라고도 말할 수 있는 미조구치 겐지와는 전혀 다른 타입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일시 9월 1일(토) <물고기 떼> 상영 후

정리 김혜령 관객에디터

사진 목충헌 자원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