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공동체가 악(惡)이라 규정하는 것의 속성과 범위를 살펴보면 거꾸로 그 공동체의 이상이 무엇인가를 파악할 수 있다. 즉 어떤 공동체든 그 존재를 위해 반드시 배타적인 악의 명명을 필요로 하는 법이다. 좀 우스꽝스러운 예를 들자면, 오늘날 대한민국의 일부 수구세력들이 그 존재를 위해 ‘친북좌파’라는 악의 명명을 필요로 하듯 말이다. 그런데 ‘친북좌파’란 잘못된 명명, 즉 실체 없는 악에 대한 명명이기 때문에 결국 이러한 명명을 수행하고 있는 공동체의 이상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온다. (굳이 그러한 공동체의 이상에 대해 논하자면 ‘친북좌파’라는 명명을 목청껏 수행하는 것 정도가 되겠다.)

2007년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서 공개돼 작은 화제를 불러일으킨 바벳 슈로더의 다큐멘터리 <공포의 변호사>는 극히 논쟁적인 한 인물을 다루고 있다. 그의 이름은 자크 베르제스. 프랑스인임에도 불구하고 알제리민족해방전선(FLN) 편에 서서 테러리스트들을 변호하는 것으로 경력을 시작한 그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야세르 아라파트, 독일 극좌파 바더-마인호프 그룹의 일원을 의뢰인 및 친구로 두는 등 기이한 행보를 이어간 인물이다. ‘테러리즘은 곧 악이다’라며 위에서 거론된 인물들을 비판하는 이들에 대해, 그는 언제나 프랑스의 알제리인 탄압을 비롯한 서구 제국주의에 의해 자행되는 훨씬 음험하고 강도 높은 폭력을 비난하는 것으로 맞서며 자신의 의뢰인들을 열성적으로 변호해왔다.


악이란 공동체의 필요에 따라 언제나 자의적(恣意的)으로 규정되는 것이라는 인식에 기반을 둔 이 가공할 보편주의는 일견 그럴싸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베르제스의 행보가 1987년 나치 전범 클라우스 바르비 변론이나 캄보디아 크메르루즈의 폴 포트 및 악명 높은 테러리스트 카를로스 자칼과의 의심스러운 공모로 향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베르제스식의 무규정적 보편주의에 대해 점점 역겨움을 참을 수 없게 된다. 즉 주의 깊게 악을 규정하는 것은 (보편적 인류애를 위한) 일종의 필요악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글/ 유운성(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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