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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동시대 영화 특별전

[리뷰] 레오 까락스의 <홀리 모터스>

오스카 씨의 초현실적인 파리 오디세이



2012년 칸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인 후 《사이트 앤 사운드》, 《빌리지 보이스》, 《필름 코멘트》, 《카이에 뒤 시네마》 등 유수의 영화전문지가 그해 베스트 목록 상위에 올렸던 영화. <홀리 모터스>는 한때 천재라 불리었던 프랑스 감독 레오스 카락스가 <폴라 X> 이후 13년 만에 내놓은 작품이다. <홀리 모터스>는 마치 그 긴 공백기 동안의 숱한 영화적 구상을 한 편의 영화 속에 농축해 넣은 듯, 변화무쌍하고 정신착란적이며 기이하다. 혹은 풍부하고 실험적이며 아름답다. 난감하게도 온갖 부정과 긍정의 형용사를 다 갖다 붙여도 이 영화로 와서는 기어이 찬사가 되고 마니 그 숱한 비평적 상찬은, 극 중에 나오는 파리 묘지의 비석에 새겨진 '내 인터넷 사이트를 방문해 주세요'를 빌어와 '인터넷 사이트를 참조해 주세요'라는 말로 정리하고 싶어질 지경이다.


실은 <홀리 모터스>는 정리가 잘 안 되는 영화다. 어마어마하게 긴 흰색 리무진 뒷자리에 자리 잡은 오스카 씨가 11명의 인물을 연기하며 파리 거리를 헤집고 다닌 어느 하루를 다룬, 초현실적인 오디세이라고 해야 할까? 영화는 19세기 말, 영화의 원시적 형태인 '움직이는 사진'을 보여준 다음 극장 어둠 속에 유령처럼 앉아 있는 관객들의 모습을 목격하는 몽유병자 신으로 시작된다. 한밤에 잠에서 깨어나 숨겨진 문을 열고 극장 2층의 발코니에 이른 그는 카락스 그 자신이다. 영화와 꿈의 그 오랜 근친성을 떠올리게 하는 프롤로그 이후 우리는 카락스의 페르소나인 드니 라방의 기기묘묘한 열한 가지 변신술을 보게 될 것이다.


알려져 있듯이, ‘알렉스’와 ‘오스카’의 아나그램으로 자신의 이름을 바꾼 레오스 카락스는 드니 라방에게 그간 붙여주었던 ‘알렉스’라는 이름 대신 ‘오스카’라는 이름을 안겼다. 여기서 오스카는 리무진 뒷좌석을 분장실 삼아 거부의 은행가, 구걸하는 노파, 모션캡처 모델, 하수도 괴물, 아버지, 아코디언 연주자, 킬러 등으로 변신한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곳에서 각각의 인물을 연기하는 그를 따라 영화 또한 SF영화, 괴수영화, 가족드라마, 갱스터, 뮤지컬 등으로 다채롭게 변신한다. 이런 영화를 본 적이 있던가? 선형적인 드라마투르기는 폐기되었고, 조각난 이야기들은 결코 논리적으로 재구성되지 않으며, 단 한 순간도 다음 장면을 예상할 수 없다. 심지어는 주인공의 자기동일성도 깨져 있다. 자기 자신이면서 동시에 그 자신이 아닌, 혹은 모든 사람이면서 동시에 아무도 아닌 그 인물은 우리를 현실 저 너머의 세계로 이끈다.


이 영화는 몽유병자 감독의 꿈일까? 아니, 영화에 관한 영화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영화 관객에 관한 영화 혹은 영화 연기에 관한 영화는 아닌가? 어쩌면 영화의 미래(혹은 미래의 영화)에 관한 영화거나 페르소나에 관한 영화일지도 모르겠다. <홀리 모터스>는 거의 모든 차원에서 하나의 의미로 고정되길 거부할 뿐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럼으로써 그 모든 것이 된 영화다. 우습고 무섭고 슬프고 아름다운 이 영화의 핵심은 무엇보다 순수한 영화적 즐거움에 있다. 도취적 쾌락 속에 담긴 가장 급진적인 미학에 피로감을 호소할 수는 있어도 심드렁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데이비드 린치 영화의 유쾌한 버전이라고나 할까.


글/ 강소원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