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 소녀 강간 혐의로 전 세계를 시끄럽게 했던 로만 폴란스키가 가택 연금에서 풀려나 신작을 준비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때마침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로만 폴란스키의 초기 걸작선’이 상영 중이다. <물속의 칼> <혐오> <궁지> 모두 세 편으로, 폴란스키를 대표하는 영화들이지만 40년 넘는 그의 작품 세계를 돌아보건대 부족한 감이 없지 않다. 폴란스키에 대해서는 좀 더 이야기가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영화평론가 정지연이 로만 폴란스키의 비극적인 과거사와 영화 세계를 엮은 글을 보내왔다. ‘로만 폴란스키의 초기 걸작선’ 상영작에 대한 좀 더 세밀한 이야기가 궁금하시다면 뒤에 실린 리뷰를 참조하시길.

로만 폴란스키의 <맥베쓰>(1971)에서 가장 섬뜩한 장면은 왕비의 죽음과 관련하여 등장한다. 한밤 중, 고성의 숨 막히는 적막을 가르는 여성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진다. 홀로 남은 맥베스는 나지막이 읊조린다. “이제 공포는 실컷 맛보았다. 살기등등한 생각도 이제 예사가 되어 그 어떤 무서운 일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게 되었다” 차가운 돌바닥에 관절이 끊어지고 시뻘건 피를 뿜으며 처참하게 죽은 왕비의 시신을 확인한 왕은 역시 태연하게 말한다. “언제든 죽어야할 사람이었다. 한번은 듣게 될 소식 아니었던가.”

맥베스의 심리적 공포를 극적인 스펙터클로 몰아붙였던 구로사와 아키라나 오손 웰즈의 버전과 비교했을 때, 로만 폴란스키의 <맥베쓰>는 가장 건조하지만 살의는 강렬하다. 여느 호러 영화에서도 쉬이 등장하지 않았을 정도로 처참한 주검을 묘사해놓고 폴란스키는 정작 그것을 목격하는 맥베스의 무심한 태도를 연출한다. 그것이 단순히 영화적인 연출의 방식이었다고 한다면 그리 주목할 만한 것이 못된다. 하지만 그가 칸영화제 황금종려상까지 수상했던 <피아니스트>(2002)를 상기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리고 그의 영화보다도 더 비극적이고 센세이셔널 했던 삶의 연대기까지 보태진다면, 그것은 단순한 연출의 방식이 아니라 그의 역사 혹은 인간의 삶을 바라보는 증언적 태도 그 자체임을 알 수 있다.

<피아니스트>는 폴란드계 유대인이자 피아니스트였으며, 모든 가족을 아우슈비츠에서 잃고 그 홀로 게토에서 살아남은 스필만의 자서전을 원작으로 한다. 가장 주목할 만한 지점은 학살과 폭력, 그리고 폴란드인들에게 멍에로 남은 죽음에 대한 무력한 순응과 방조에 대한 증언적 이미지다. 이것은 확실히 <쉰들러 리스트>(1993)와 같은 그간의 유태인 수용소 영화들의 그것과는 차별된다. 이러한 영화들이 거의 천편일률적으로 독일인의 잔악한 폭력과 유태인들의 비극적 삶에 대한 무한한 연민과 애도를 전면으로 내세웠다면, <피아니스트>에는 연민과 분노가 부재한다. <피아니스트>를 지배하는 가장 압도적인 이미지는 주검과 폭력에 대해 살아남은 자들이 보여주는 너무도 일상적이고 무심한 태도들에 있다. 그들은 그 모든 폭력을 목격한다. 그러나 그 모든 폭력은 이내 일상이 된다. 이윽고 그 비좁은 게토에서 조차 부유한 자와 굶주리는 자가 나뉘고 장사치가 넘쳐난다. 거리 여기저기에는 어린 아이들을 비롯한 시신들이 흔한 돌멩이처럼 널브러져 있다. 악취를 내며 썪어가는 시신들을 삶의 조건으로 고스란히 받아들인 게토 안 유태인들의 모습은 흡사 공포에 무심해진 맥베스의 고백처럼 체념적이다.

프리모 레비(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작가)는 수용소의 대학살에 대해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살아 남은 자의 이야기는 죽음의 진실에 다가갈 수 없다’고 했다. 그것을 누군가 재현한다면 현존하는 감독 중 폴란스키를 능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1933년, 파리에서 폴란드 유대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로만 폴란스키는 3살이 되던 해 폴란드로 이주한다. 그리고 8살 때, 게토에서 아우슈비츠로 이송되던 죽음의 열차에서 폴란스키의 어머니는 그를 열차 밖으로 밀어내 살려낸다. 혼자가 된 어린 폴란스키는 감시를 피해 노숙을 하며 고향으로 달아났고, 그곳에서 가톨릭계 폴란드인 가족의 도움으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숨어 살아 남았다. 미국의 평론가 짐 호버만은 <피아니스트>에서 강제노역장으로 이주하던 가족들에게, 캐러멜 한 조각을 비싼 값으로 팔아치우던 어린 소년이 어쩌면 폴란스키의 자화상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만약 그렇지 않더라도 역사적 학살의 순간에 폴란스키가 목도하고 각인했던 것은 거대한 폭력의 구조였으며 죽음 혹은 생존이라는 백짓장 같은 양면을 지닌 처참한 삶의 몸부림 이었을 것이다. 이 트라우마는 이후 폴란스키 겪게 될 또 다른 비극들 (만삭의 아내 샤론 테이트가 찰스 맨슨의 신봉자들에 의해 잔혹한 방식으로 살해당한 사건과, 이후 13세 소녀 강간혐의로 30년이 넘도록 미국 사법부에 의해 수배 등)과 더불어 그의 작품세계를 규정하는 주요한 키워드로 자리 잡는다. 제한적 공간이 압박하는 폐소공포증, 죽은 자들의 망령들, 가학의 기묘하고도 본성적인 쾌락들, 그리고 이성적 언어로 설명되지 않는 신경증과 강박증, 자본주의 정치체제라는 거대한 구조 내 옥죄인 숙명적이고 비극적인 인간들이 그것이다.

유령과 공포, 숙명의 서클

<유령 작가>(2010)는 미국 누아르의 새로운 지평을 열게 했던 그의 걸작 <차이나타운>(1974)과 기묘하게 닮아 있다. 전통적인 누아르 영화들이 팜므파탈의 덫에 걸린 남성들의 곤경을 흑백의 숙명론적 미학으로 묘사하면서, 웨스턴과 갱스터의 영웅이 기묘하게 얽혀있는 자기 파괴적인 고독한 남성 영웅이라는 캐릭터를 창출해냈다면, <차이나타운>은 선악의 이분법과 캐릭터를 역전시키는 것으로 구조화한다. 전통적 누아르에서 보험금과 치정으로 얽혀있던 사적 욕망들은 멕시코 접경지역의 수력발전을 둘러싼 이권 사업과 연결되면서 공권력 및 자본의 문제로 확장되고, 탐욕스런 욕정과 물욕의 화신이었던 여성들은 남성 가부장적 자본주의 권력 구조의 비련한 희생자로 묘사된다. 또한 잭 니콜슨이 연기하는 냉소적인 사립탐정은 진실의 주변을 맴돌지만, 결국 예정된 운명의 서클 안에서 탈주하지 못하고 권력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고 실패하는 사나이의 새로운 전형을 만들어낸다.

이 영화를 대표하는 예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탐욕스러운 자본가 아버지로부터 강간당해 딸임과 동시에 동생을 낳게 되는 비련의 여주인공은 모든 추악한 권력으로부터 빠져나가기 위해 자동차를 타고 달아나지만, 경찰의 총탄에 결국 살해당한다. 이 장면에서 경찰은 탐정에게 “모든 것을 잊어버리게, 여기는 차이나타운이야”라고 말한다. 이것은 위로와 치유의 말이 아니라, 그가 넘어설 수 없는 권력과 공간의 정치에 관한 충고이자 체념이다.

<유령작가> 역시 권력과 욕망의 구조 안에서 이용당하고 결국 실패하는 남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라크 전쟁으로 대표되는 현대의 학살극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전직 영국 총리가 대필 작가를 통해 회고록을 집필하던 중 거의 완성단계에서 작가가 사고로 죽게 된다. 그러자 그 업무가 새로운 유령작가(이완 맥그리거)에게 맡겨진다. 그러나 정계의 복잡한 권력관계, 그리고 영국과 미국을 둘러싼 전쟁의 밀약들, 심지어 총리와 그의 아내 및 비서 간에 얽혀있는 치정 드라마는 가까이 다가갈수록 심연을 알 수 없는 음모에 휩싸인 미궁이다. <유령작가>를 누아르의 계보에서 <차이나타운>에 비교한다면, 캐릭터와 관계들은 다시 한번 전도된다. 눈에 보이고 명백한 권력들은 허상이자 꼭두각시며, 진실은 언제나 추악한 욕망과 함께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스스로 ‘유령’이라 말하는 작가는 목격하게 된다. 그래서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차이나타운>의 변주이다. 작가는 총리의 회고록 출판기념파티에서 총리의 아내에게 진실을 알고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파티장을 나선다. 그리고 거리로 나서는 순간 교통사고를 당한다. 이때 사고를 알리는 충돌 음이 들려오고, 그가 지녔던 회고록 원본이 공중으로 흩날려 사라진다. 극중 자신을 언제나 ‘유령’이라고 소개했던 남자는 이 순간 흩날려 쓰레기로 전락하게 될 진실의 조각들과 함께, 그의 전임자가 그랬던 것처럼 진짜 유령이 되어 공중으로 부유한다.

이 기이한 주술적 운명의 실타래는 폴란스키의 오컬트적 취향과 유령에 대한 매혹, 그리고 현대사에 대한 은유로서 지속적으로 관철된다. 유령들은 자신이 죽어간 자리를 배회하고, 산자들은 망령들에 의해 그 공간에 강박된다. 유령은 진실을 알고 있으며, 진실은 산자에게 속삭여지지만(<유령작가>에서 전임 작가가 남긴 메시지들, 자동차에 입력된 네비게이션의 주소지, 그의 행적들을 알리는 우연적 사건들), 산자가 진실에 다가가는 순간 이는 죽음이라는 실타래가 되어 그의 운명을 앗아가 버리는 것이다. <유령작가>에서 서로의 운명을 속박하며 위장하는 권력자들의 진실은 오로지 유령들의 발자취에서만 드러나고, <차이나타운>에서 모든 진실은 결국 어둠 속에서 살해되고 잊혀진다. 결국 폴란스키에게 유령은 비극에 죽어간 자들이자, 진실을 알고 있는 자들이며, 산자에게 속삭이나 그것이 결국 죽음을 재촉하는 망령의 저주와도 같은 것이다.

결국 <유령작가>를 지배하는 숙명적이고도 음모론적 세계는 폴란스키에게 있어서 오컬트적인 마녀들의 주술적 세계의 동어반복이다. 현대 자본주의 정치사회를 음모론적 세계의 학살과 폭력으로 형상화한 <유령작가>의 계략들은 결국 <맥베쓰>에서 왕좌에 대한 무한한 권력과 탐욕을 자극했던 주술적 파워와 다르지 않다. 그것은 주술에 의해 사탄의 권력을 부여받고자했던 <악마의 씨>(1968)와 <나인스 게이트>(1999)에 묘사되는 음모로 연결된다. 폴란스키의 영화적 세계에서 이 모든 음모 혹은 주술은 평범한 일상 속에 은폐되어 있으며, 그것이 특정한 순간에 인간의 선악이라는 본성을 구분하지 않고 출몰한다. 그 욕구는 절대적 폭력, 가학의 쾌락으로 형상화된다. 가장 역사적인 테제로서 <피아니스트>는 나치가 수행했던 ‘악의 평범성’에 대한 가장 직설적 묘사이다. 또 다른 정치적 버전으로서 <시고니 위버의 진실>(1994)은 폭력과 악의 상징을 잔혹했던 군부정권의 반인륜적 행위로 한정하지 않고, 그 희생자가 같은 방식으로 폭력을 앙갚음하고자 하는 가학의 쾌락과 피학의 트라우마가 어떠한 방식으로 순환하는지 보여준다.

가학과 피학에 관한 섹슈얼한 버전은 <비터문>(1992)이다. 이 영화는 남자와 여자의 지배와 소유가 어떤 식으로 역전되는지, 어떤 식으로 극단화되어 죽음의 제의로 이어지는지에 대한 외설적인 욕망의 진술이다. 결국 폴란스키는 모든 인간의 평범한 일상에 내재된 폭력적이고 악마적 본성은 사소한 계기들에 의해서도 충분히 돌출되리라 확신하는 작가이다. 그래서 결국 <시고니 위버의 진실>의 엔딩 시퀀스에서, 가학자와 피학자는 서로를 지긋이 바라보며 공존한다. 절대적 가학자와 절대적 피학자를 구분하지 않는 이러한 공존은 학살의 시대를 경험한 감독의 냉소적이고 비관적 세계관 그 자체이다.

신경증과 강박증

폴란스키 영화의 여성들이 신경증 환자라면 남자들은 강박증 환자들이다. 이들은 모두 특정한 공간, 폐쇄적인 공간의 내부에 직접적이든 은유적이든 감금이라는 형태로 속박되어 있다. 먼저 신경증 환자로서의 여성 이미지는 <혐오>(1965)에서 잘 드러난다. 카트린느 드뇌부가 연기하는 캐롤은 성적 욕구와 결합에 대한 과민한 공포와 불안으로 스스로를 아파트에 감금하고 그 공간을 비집고 들어오는 남성들을 살해한다. 그것은 <차이나타운>의 에블린(페이 더너웨이), <맥베쓰>의 왕비, 그리고 <비터문> <나인스 게이트> 등에서 연기했던 폴란스키의 세 번째 부인이자 여배우인 엠마누엘 세이그너의 캐릭터 등과 연결된다. 또한 흥미롭게도 이 모든 여성들은 신경증 환자임과 동시에 남성 성애적 대상이며, 그 이상화 과정에는 폴란스키의 소녀성애를 의심케 할 정도의 백치적 순수함이 부과된다.

반면 거의 예외 없이 죽음과 실패를 향해 가는 폴란스키의 남성 캐릭터들은 <물속의 칼>(1962)에서 거만하고 과시적이지만 정작 젊은 소년의 육체와 치기를 질투하는 부르주아 남성의 좌절감, 혹은 아내의 실종을 아무도 인정하지 않고 도움주지 않는 낯선 타국에서의 분투를 다룬 <해리슨 포드의 실종자>(1988)의 인텔리 남편, 유령적 환영과 현실의 경계에서 분열하는 <테넌트>의 세입자, 성공을 위해 아내를 악마에게 바치는 <악마의 씨>의 연극배우 남편(존 카사베츠), 그리고 거대한 권력 속에서 패배와 무력감의 극단을 경험하는 <차이나타운>과 <유령작가>의 그들처럼 하나같이 자신들의 내재한 욕망과 공포에 의해 사이킥한 감금상태로 스스로를 유폐시킨다.

이 모든 유폐는 그것이 신경증 환자인 여성이거나 강박증 환자인 남성이건 모두 제한된 공간으로 심리적 상태를 투사하며 발생한다. <물속의 칼>이나 <비터문>에서 인물들을 세계와 차단하고 고립시키는 요트 혹은 거대한 유람선, <궁지>와 <맥베쓰>에서 지배와 감금이 이루어지는 고성들, <피아니스트>에서처럼 거대한 벽돌 담장으로 둘러싸여 아무도 쉽게 들어갈 수도 나갈 수도 없는 게토 혹은 수용소 등 이 모든 폐쇄적 공간들은 그 자체로 폴란스키 영화의 캐릭터가 되어 주인공들의 심리적 강박과 공포의 근원이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의 영화 속에서 이미 죽은 자들은 유령이 되지만, 아직 살아남은 자들은 경계에서 망연자실한 상태로 주저한다. 하지만 폴란스키의 답변은 의외로 간단하다. <피아니스트>에서 스필만을 도와준 나치 장교는 그와의 마지막 대면에서 “이제 전쟁이 끝나면 어떻게 살 것인지” 질문한다. 스필만의 대답은 간단하다. “피아니스트가 되어 다시 연주할 것이다”. 삶과 죽음, 진실과 은폐, 산자와 사자(死者), 구조와 개인, 폭력과 치유, 망각과 상실은 언제나 경계를 넘나들며 삶의 조건 속에 스며 있다. 일상은 그저 무심히 진행될 뿐이다. 무력하지만 그 안에서 그저 살아갈 뿐이다. <유령작가>에서 흩날리어 결국 쓰레기로 치워질 진실의 회고록 원본은 주검과 함께 유령이 되어 거리를 부유할 것이다. 험한 세상을 체감한 노장의 숙명적이고 냉소적 세계관이 여전히 쓰디쓰고 섬뜩한 이유다.

글/ 정지연(영화평론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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