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 그 운동의 정신을 정신의 운동으로

- 로베르 브레송의 <당나귀 발타자르>


<당나귀 발타자르>라는 제목을 들으면 짐승 울음소리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의 기억 탓인 것 같다. 어디서 들어본 듯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오프닝 크레딧이 나오더니 선율이 멈추고 갑자기 짐승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이 잘 잊히지 않는다. 그건 고통에 찬 울음인지 쾌감에 떠는 울음인지 배고픔을 알리는 울음인지 그리움에서 비롯된 울음인지 결코 알 수 없는, 그저 짐승 울음소리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짐승 울음소리였다. 그때까지 당나귀 울음소리란 걸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던 나로서는 그게 짐승 중에서도 당나귀의 울음소리인지 정확히 인지할 수 없었고, 단지 내게 주어진 어떤 소리로서 그것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에 와서도 그 소리를 자세한 말로 표현하기는 매우 난감하게 느껴진다. 그 소리에서 느꼈던 질감과 세기 같은 것만을 아주 약간 묘사할 수 있을 뿐이다. 거칠면서도 연약한 소리, 지르는 듯하면서도 겨우 쥐어짜낸 듯한 소리, 누군가를 부르는 것 같으면서도 누군가로부터 도망가려는 것 같기도 한 소리, 간절하면서도 무심한 소리, 충만하면서도 황량한 소리… 하지만 어떤 말이든 이 짐승 울음소리를 묘사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게 느껴진다. 혹은, 같은 말이지만, 그저 짐승 울음소리일 뿐인 이 사운드를 묘사하는 것으로서는 과도하게 느껴진다. 그것에는 어떤 말도 적당하지 않다. 그것은 어떤 말로도 대체 불가능한 사운드다. 그 앞에서 한 존재가 그 순간 영화적 소리로 태어나고 있음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들으려고 해야 할 뿐이다.

한편 이 영화의 가장 마지막에 놓여있는 것은 어느 초원 위에 누운 채로 죽어 있는 발타자르의 이미지다. 그 최후의 순간, 이 이미지의 평화로움은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갈피를 잡기가 힘들다. 고요하다 못해 적막하기까지 해서 끔찍하도록 무섭게 느껴져버리는 동시에 막연히 안도하게 돼버린다. 그 앞에서 한 존재가 그 순간 영화적 이미지로서 생을 마감하고 있음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보려고 해야 할 뿐이다.

<당나귀 발타자르>의 삶은 사운드로 시작해 이미지로 끝난다. 아마 우리 인간은 어떤 삶을 떠올릴 때 탄생은 사운드(아기의 울음소리)로, 사망은 이미지(고인의 누워있는 모습)로 기억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어떤 존재를, 그 존재의 출현과 소멸을 현시하려고 할 때 이보다 더 순수한 기표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 순수성이 이 기표들을 한없이 마음 아픈 것으로 만든다. 너무도 풍부하지만 동시에 너무도 불투명하다.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에 관해 말할 때 많은 이들이 ‘초월론’, 혹은 반대로 ‘유물론’, 혹은 둘을 거쳐 ‘변증법’을 말한다. 개인적으로는 초월론도, 유물론도, 변증법도, 너무 거창한 말처럼 느껴져 쓰질 못하겠다. 적어도 이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브레송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이 사운드들과 이미지들, 그것들로 조합된 사건과 캐릭터들 너머에 다른 것이 있는지 없는지가 그리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있다고 한들 구원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지 않고, 없다고 한들 육체에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변증법도 이 영화가 우리의 마음을 왜 그토록 아프게 하는지까지 설명해 주진 못하는 것 같다. 더 중요하게 생각되는 건 이 영화 속의 순수한 기표들, 탄생과 죽음, 사운드와 이미지를 어떻게 견딜 것인가의 문제인 것 같다. 브레송이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감정을 다루는 데 있어 우리를 기어이 표면들만이 존재하는 기록의 순간에로까지 끌고 갈 때 공허와 고독과 허무로 터져나갈 것 같은 이미지와 사운드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이 우리가 <당나귀 발타자르>를 보고 마음이 아픈 까닭을 생각해 보고 싶은 이 글의 관심사다.



<당나귀 발타자르>에서는 무엇보다 손들이 우리를 무섭게 한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 주정뱅이 아놀드가 그렇게 말한다. 뭐가 무서워서 그러냐는 술집 여자의 물음에 오로지 “무서워.”라고만 말한다. 그리고는 손을 떨면서 눈앞의 술잔을 집어들어 한 모금에 전부 들이키더니 다음 잔은 어떤 망설임도 없이 곧장 비워버린다. 아마도 그가 무섭다고 한 것은 우리의 눈앞에서 술잔을 거침없이 비워내고 있는 그의 손일 테다. 바로 앞 장면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밤하늘 아래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성호를 그었던 손, 그 손의 기만 혹은 욕망이 그를 무섭게 하고 우리도 무섭게 한다. 다른 손들도 무섭다. 새끼 당나귀 한 마리에 반해 그를 “우리한테 주세요.”라며 마구 쓰다듬던 이름 모를 소녀의 손은 그를 기구한 운명의 출발선에 데려다 놓기만 하고는 사라진다. 마리에 대한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징표를 나무의자에 새겨넣던 자크의 손은 곧 “내년에 봐.”라며 차창 밖으로 내밀어지더니 내년이 고통스런 수년으로,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세월이 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발타자르의 꼬리에 불을 붙여 그를 날뛰게 하는 동네 불량배 제라르의 손도 마리와 발타자르를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거나 숨게 만들었다가 붙잡기를 반복하며 끝까지 탐하고 유린한다. 물 장사를 하는 구두쇠의 손도 발타자르에게서 마지막 양식까지 빼앗아버리고 마리에게서도 쾌락만 취한다. 심지어 동네 신부의 손과 가지런히 놓인 남편의 두 손은 아내가 신에게 그를 데려가지 말아달라고 빌기를 마치기가 무섭게 그의 죽음을 선고한다.

<당나귀 발타자르>에서 손만큼 무서운 것이 하나 더 있다. 인간의 언어다. 어떤 책임의식도 없이 내뱉어지는 “우리한테 주세요.”, “내년에 봐.”라는 말들처럼 끔찍한 것이 또 없다. 당신을 전적으로 믿는다며 백지 위임장을 줄 테니 회계 보고를 할 필요도 없다고 했던 지주의 말처럼 야속한 것이 또 없다. 뒤늦게 찾아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구나.”라며 감탄하거나 결혼을 약속하는 자크의 말들처럼 부질없는 것이 또 없다.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주정뱅이의 말이나 신에게 남편을 데려가지 말아달라는 아내의 말처럼 허무한 것이 또 없다. 모두를 용서해야 한다는 신부의 말처럼 가혹한 것이 또 없다. 이행되지 않는 약속들, 도착하지 않는 구원들, 수리되지 않는 기도들….

이 영화를, 그리고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과 사랑을, 작동시키는 이토록 공허한 파편들로서의 손과 말들을 발타자르가 지켜보고 있다. 이와 관련해 때때로 의도적으로 건조하거나 기계적으로 만들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 영화에서 이상할 정도로 풍만하고 아찔한 서정이 치솟는 몇몇 장면이 있다. 그중 하나가 발타자르를 가운데 놓고 제라르와 마리가 서로를 잡을 듯 말 듯 혹은 서로에게 잡힐 듯 말 듯 빙빙 도는 장면이다. 둘의 손이 발타자르 위로 어지럽게 겹쳐지는 가운데, 소년의 얼굴은 다른 어떤 장면에서도 볼 수 없는 밝은 생기로 빛나고, 소녀의 얼굴에서도 열띤 호흡이 느껴진다. 영화 또한 갑자기 비관적 정조를 벗고 설렘과 환희의 무드에 휩싸인다. 그런가 하면 마리를 다시 찾아온 자크가 사랑을 말하는 장면도 있다. 다소 딱딱하게 대화를 나누던 마리와 자크가 앞에 놓인 발타자르를 바라본다. 눈앞에 발타자르가 나타나자, 마리가 “맞아, 발타자르야.”라며 부르고 자크가 “발타자르야.”라며 따라 부른다. 이어 불변과 아름다움에 관해 읊조리는 자크의 음성이 더없이 그윽해진다. 이 장면들에서 발타자르는 단지 거기서 극 중 인물들을 지켜보고 있을 것을 넘어서 자아와 타자의 결합에 있어 손과 말이라는 장애물을 뛰어넘는 데 종종 실패하고 마는, 혹은 손과 말이라는 매개물이 없이는 자아와 타자 사이에 놓은 거리를 뛰어넘을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된 인간의 비극적 조건 자체를 심드렁하게 반사하고 있는 듯하다. 아니, 타자까지 갈 필요도 없다. 자신의 몸과 마음이 타자의 것처럼 되어버린 주정뱅이 아놀드가 있지 않은가. 그를, 허공을 향해 휘둘러지는 그의 말과 손을, 발타자르의 눈이, 달과 구름의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밤하늘의 눈이 내려다보고 있다.

그렇게 당나귀 발타자르는 영화 속 인물들의 공허한 손과 말을 응시하고, 영화감독 브레송은 우리의 삶 혹은 사랑 속의 공허한 기표들을 응시한다. 그러니까 브레송의 <당나귀 발타자르>는 우리가 때때로 삶이나 사랑이 견딜 수 없이 괴롭게 느껴질 때 그것이 실은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수많은 자의적 언사와 몸짓의 조각들이 한없는 풍부함과 불투명성을 동시에 가지고서 우리에게 돌아오고 있는 것임을 스스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상대의 손짓 하나, 말 한 마디를 놓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과도한 해석과 불충분한 해석 사이를 오가며 앓는 동안 상대의 손짓 하나, 말 한 마디는 그저 침묵하며 나에게 응시를 되돌려줄 뿐이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않을 수 없다. 파편적 기표들의 침묵, 그것이 우리를 공포에 몸부림치게 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이 당나귀라는 점은 그래서 더욱 절묘하게 다가온다. 발타자르는 인간의 말을 하지 못하는 네 발 달린 짐승이다. 그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은 손과 말이고 그가 갖고 있는 것은 울음소리와 네 다리다. 그런 그가 욕망을 가진 인간들에 의해 고통받게 되는 것은 거의 필연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그는 인간들의 도구와 거래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여진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따금씩 자신의 존재를 알리듯 특유한 당나귀 울음소리를 내는 것, 누군가가 이끌거나 미는 대로 되는 데까지 발걸음을 옮기는 것뿐이다. 그런데 그의 우는 소리는 우리로 하여금 견딜 수 없다고 느끼게 하는 것 같고 그의 움직이는 다리는 그것을 견뎌낼 만한 힘을 느끼게 하는 것 같다.

당나귀 발타자르의 다리는 이 영화에서 가장 관능적이면서 숭고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 먼저 떠올리게 되는 대사가 있다. 제라르와 함께 술집에 있는 마리에게 어머니가 찾아와 묻는다. “저 애는 왜 만나지?” 이따금씩 당나귀와 같은 영혼과 운명을 짊어진 인간의 형상으로 느껴지는 그녀는 이렇게 답한다. “사랑해서요. 누굴 사랑하는 데 이유가 있나요? 오라면 오고 하라면 해요.” 그녀를 어머니는 “불쌍한 아이”라 여기지만, 그녀야말로 그것이 삶과 사랑을 통과해 나가는 가장 치열한 방법임을 아는 것 같다. 그 방법이란 다리가 가진 동력을 통하거나, 혹은 다리가 불러일으키는 동력을 통하는 것이다. 마리의 다리가 한밤중 정원을 거닐며 제라르의 손을 움직이고, 마리의 다리가 대낮의 길바닥에 넘어지며 제라르의 다리를 움직이고, 마리의 다리가 제라르를 찾아간다. 다른 누군가를 움직이게 하고, 다른 누군가로 하여금 자신을 움직이게 하고, 자기 스스로 다른 누군가에게 움직여 가는 다리, 그 다리의 동력이다.

그 다리의 동력을 사람들은 희롱하고 착취한다. 이 영화가 당나귀 발타자르를 주인공 삼아 끈질기게 보여주고 있는 것도 그런 다리의 운명이다. 그의 다리는 오라면 오고 하라면 하면서, 수레를 끌고 농기구를 끌고 마차를 끌고 빵 바구니를 짊어지고 화가들을 태우고 여물통을 끌고 발재주를 부리고 우물 펌프를 돌리고 상여를 짊어지고 밀수품을 이고서, 끝까지 나아간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을 희롱하고 착취하는 인간들의 손짓과 말들을 묵묵히 지나쳐간다. 그런데 이것이 발타자르의 다리를 의미심장하거나 감동적으로 느껴지게도 한다. 그건 노동하는 다리로건, 저항의 다리로건, 부랑하는 다리로건, 유희하는 다리로건, 다만 네 다리로 한자리에서 다음 자리로 이동해 나가며 삶과 사랑을 통과해 나가는 다리다. 그건 그저 앞으로 이동하는 운동을 통해 삶과 사랑을 끝내 견뎌내고야 마는 운동체다.



삶과 사랑에 관해 당나귀 발타자르가 주는 교훈 아닌 교훈은 영화 보기에 대한 교훈도 될 것 같다. 삶과 사랑처럼 영화도 때때로 견딜 수 없이 괴롭게 느껴질 때가 있다. 어떤 영화가 우리를 기어이 표면들만이 존재하는 기록의 순간으로까지 끌고 갈 때 공허와 고독과 허무로 터져나갈 것 같은 이미지와 사운드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시 당나귀 발타자르의 울음소리와 누워있는 모습으로 돌아가 보자. 그것은 이 영화와 이 영화의 주인공 둘 다의 탄생과 사망을 알리는 사운드와 이미지이기도 하지만, 이 영화를 보는 우리의 체험에 관해 무언가를 알려주는 사운드와 이미지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그건 우리에게 삶과 사랑처럼 영화도 때때로 그저, 오로지, 다만, 견디는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순수 영화 기호다. 물론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대체 어떻게 견디라는 말인가. 여기에 <당나귀 발타자르>는 어떤 거창한 해설도 거부한 채 발타자르의 다리를 보여줄 따름이다. 그 다리들, 아무런 언표도 제스처도 지니고 있지 않은 다리들이 뜻하는 바는 이런 것 같다. 여기 스크린 위에는 어떤 기표들이 지시하는 고정된 의미로서의 앎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어른거리는 어떤 것들에 의해 이끌리고 떠밀려가는 우리 정신의 부단한 운동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마치 다리와 같은 운동체로서의 정신으로 견뎌보라고 하는 말 같다. 그래서 이런 다짐을 중얼거려 보게 된다. 손과 말로 점철되고 얼룩진 삶과 사랑에 다리의 활력으로 견뎌나갈 것, 파편적 이미지와 사운드만을 건네는 영화에 다리의 정신으로 견뎌나갈 것. 실로 이 영화에서 가장 신비로운 장면들은 발타자르가 갑자기 달려나가거나 문득 걸어나가 버리는 장면이 아니던가. 이 글을 쓰며 참고한 책 중 브레송의 영화적 다짐들로 빼곡한 『시네마토그래프에 대한 단상』에서 이상하게도 “동적인 이미지는 행복감을 준다: 말, 운동선수, 새.”라는 구절이 계속 떠올랐던 것도, 그 구절로 아픈 마음을 달래게 됐던 것도 그래서인 것 같다.


이후경 영화평론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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